신학이야기

원효지눌퇴계율곡다산의 주요사상

jasunthoma 2012. 1. 19. 13:33

원효元曉, 지눌知訥, 퇴계退溪, 율곡栗谷, 다산茶山의 주요사상

20051107 김용석

원효元曉(617-686) 철학의 기본 논리는 화쟁(和諍)의 논리이다. 화쟁이란 “말다툼, 즉 논쟁을 조화시킨다”는 뜻이다. 원효가 논쟁을 조화시킬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원효철학의 밑바탕에는 화엄철학이 깔려 있으며 화엄철학의 기본 논리는 하나가 곧 전부요, 전부가 곧 하나라는 것이다. 원효는 바로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지었다. ‘십문화쟁론’이란 온갖 학파들의 논쟁을 화합시킨다는 뜻이다. 원효는 쪽빛과 남색이 하나이고 물과 얼음이 근본적으로 같은 것처럼 서로 달라 보이는 주장들도 모두 석가모니의 말씀을 해석한 것이어서 모두 다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석하면 무수히 많은 주장이 나오지만 되돌리면 한 말씀으로 돌아간다고 보았으며, 이런 입장에서 여러 경전에 대한 서로다른 해석들을 다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효가 어떤 사람의 주장도 부정하지 않고 다 받아들인 것은 모든 주장을 종합한 것일 뿐 자신의 주장은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원효의 결론은 어떤 주장과도 같지 않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모두 틀렸다고 한 것이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였지만 결국은 하나도 안 받아들인 모습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합침의 철학이며, 원효의 철학은 이 같은 합침의 불교를 잘 보여준다.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원효는 많은 책을 지었다.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 『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처럼 ‘종요’라는 말을 붙인 경전에 대한 해설책을 무려 17권이나 지었다. ‘종’은 문을 연다는 뜻이며 여러 가지로 나누는 것을 말하고, ‘요’는 문을 닫는다는 뜻이며 하나로 합치는 것을 말한다. 원효는 살아가면서 어떤 것에도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불교를 전파하는 방식도 남달라서 길거리에서 탈을 쓰고 항아리를 두드리며 춤추고 노래하면서 일반 사람들을 만났다. 원효는 이같이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 된다는 규제가 없는 삶을 살았다. 이같이 거리낌 없이 살았던 원효의 삶을 무애행(無碍行)이라고 한다. 원효는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 관한 설법에서 깨달음도 자신의 마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깨닫지 못하는 것도 마음 때문이라고 하면서 한 마음에 두 개의 문이 있음을 말하였다. 마음을 비우면 깨달음을 얻고 마음을 채우면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원효의 철학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원효는 왕실 중심의 불교를 민중 중심의 불교로 바꾸었다. 둘째, 한국 불교는 원효를 통해서 비로소 토착화가 이루어 졌다.

지눌知訥(1158-1210)은 불교의 깨달아 가는 과정이 소 치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 목우자(牧牛子)라는 호를 즐겨 썼다. 그리고 어떻게 마음을 닦을 것인가를 소 치는 아이에 비유해 설명한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을 지었다. 선종은 교종과 달리 경전을 중시하지 않았다. 해탈이 달이고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것인데도 “자, 저 달을 보라”하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니까 어리석은 자들이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선종은 교종이 깨달음을 얻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경전에 얽매여 오히려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불교에서는 참깨달음의 주체인 불성, 즉 진리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 때문에 깨달음이란 바로 제 마음에서 오는 것일 뿐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이처럼 그 사람의 마음을 곧장 지적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해주려는 것이 선종의 가르침이었다. 지눌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란 바로 내 마음이며, 따라서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닫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완전한 모습으로서의 불성이 들어 있어서 이것을 깨닫는 일이 모든 수행의 출발이라고 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지눌은 자신의 마음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심 때문이다. 그러나 욕심을 일으키는 그 마음이 바로 본래 부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욕심을 일으키는 것도 이 마음이고 깨닫는 것도 이 마음이기 때문에 이 마음을 떠나서 깨달음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눌은 욕심을 일으키는 그 마음을 밝게 비추어 보는 데서부터 부처의 참모습을 깨달을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나는 아직 부처가 못된 존재라고 보는 생각 자체가 나와 부처를 따로 놓고 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그런 헛된 망상을 모두 버리고 자기 마음의 참모습을 비추어 보라는 것이 바로 지눌 철학의 출발점이다. 그렇게 깨달아가는 과정의 첫 단계는 ‘돈오(頓悟)’이고 둘째 단계는 ‘점수(漸修)’이다. ‘돈오’는 자기 안에 부처의 본모습이 들어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 것이며, ‘점수’는 자신이 바로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았더라도 타성에 젖어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망을 가라앉히기 위해 계속해서 마음을 닦는 것을 말한다. 지눌은 이 과정에서 주의할 것으로, 첫째는 자기 마음이 부처의 마음인 줄 모르고 깨닫는 일은 뛰어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나같이 능력 없는 사람은 불가능하다고 스스로를 낮추어 보는 생각과, 둘째는 내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쭐해져서 더는 수양하려고 하지 않는, 스스로를 높이는 태도를 들었다. 지눌의 철학은 남종(혜능)과 북종(신수)을 하나로 합친 것이며 그 위에 다시 교종을 합친 것이다. 지눌은 부처가 입으로 전한 것이 ‘교’이고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인데, 석가의 마음을 통한 가르침과 입을 통한 가르침이 다른 것이 아니므로 교종과 선종을 합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부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내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경전은 배의 방향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조계종이 그 바탕은 선종이면서도 경전을 중시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지눌의 철학에서 온 것이다.

퇴계退溪(1501-1570)의 철학사상은 고봉 기대승과 벌인 유명한 4단 7정 논쟁에 잘 나타나 있다. 4단은 맹자가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어려움을 보았을 때 마음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남에게 양보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의미한다. 측은지심이 잘 발전하면 인(仁)이 되고, 수오지심이 잘 발전하면 의(義)가 되며, 사양지심이 잘 발전하면 례(禮)가 되고, 시비지심이 잘 발전하면 지(智)가 된다고 하였다. 7정은 4단과는 다른 감정인데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슬퍼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욕심내는 일곱 가지 감정으로 사람들은 배우지 않고서도 저절로 그렇게 할 줄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퇴계는 理와 氣가 떨어질 수 없다고 해서 4단에 氣를 섞어 말한다면 氣는 악의 근원이기 때문에 4단에도 선만 있을 수 없게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을 본래 타고난 순수한 모습과 욕심에 얽매인 모습으로 나눌 수 있듯이 인간의 감정도 4단과 7정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퇴계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 보았다. 하나는 밖으로 드러나는 실천의 근거가 주로 그 사람 마음속의 4단에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7정에 있는 경우이다. 전자의 실천이 항상 도덕적으로 옳은 까닭은 그 실천의 발단이 자신의 순수한 본성인 理에 있기 때문이고, 후자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어그러지기 쉬운 까닭은 그러한 실천의 발단이 악의 근원인 氣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군자든 소인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속에 理와 氣가 함께 들어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퇴계는 理와 氣가 같이 있다고 해서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본다면, 결국 사사로운 욕심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감정과 욕심이 섞인 감정을 하나로 보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마침내 옳고 그름만을 생각하는 군자와 이해 관계만을 생각하는 소인을 구분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4단과 7정을 굳이 구분하려는 이황의 생각 속에는 이처럼 하늘과 땅의 차이와도 같은 군자와 소인을 결코 뒤섞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퇴계는 자신이 겪은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옳은 것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선비(사림)들과 그 반대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몰아냈던 사이비 선비(훈구)들의 차이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퇴계 철학에서 理는 모든 존재의 존재 원리인 동시에 도덕 원리이다. 퇴계는 참다운 인간이 되기 위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을 경(敬)이라고 하였다. 이 때의 敬은 공경이나 존경의 경우처럼 누군가를 높인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으로, 경건하다거나 근신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퇴계의 학문을 평가할 때 학자들은 그의 학문이 출발이나 귀결 모두를 敬으로 꿰뚫고 있다고 한다. 경건한 마음을 갖는 것이 진리를 깨닫는 문(門)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중심은 사람이며, 사람의 중심은 마음이고, 마음의 주재자가 바로 경건성이다. 그래서 이황은 마음이 움직이기 전이나 마음이 움직였을 때나 항상 敬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경건성이란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항상 깨어 있는 순수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율곡栗谷(1536-1584)은 理와 氣를 함께 보려고 하였기 때문에 “理와 氣를 나누어 보려는 사람은 참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였고, 理와 氣가 묘하게 함께 어우러져 있음을 이기지묘[理氣之妙]라 하여 깨닫기도 어렵고 말로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율곡은 理와 氣의 관계를 이통기국(理通氣局)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통기국이란 ‘理는 형체가 없고 氣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理는 만물에 통하지만 氣는 막힌다’는 뜻이다. 퇴계가 혼란한 현실에서 이상을 가려내어 그 이상을 지켜가기 위해 가장 높은 도덕 원리를 강조했던 것과는 달리, 율곡은 현실을 떠난 이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율곡은 모든 변화는 음양의 순환이며, 음양 또한 하나의 氣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理도 氣의 변화를 떠나서는 말할 수 없다고 보았다[理氣之妙]. 인간은 자연의 법칙인 생리적 본성(生老病死)과도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서 필연 법칙을 거스를 수 있는 능동성이 있다고 본 셈이다. 이러한 힘은 인간이 지닌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같은 의지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마음속에 있는 도덕적인 힘이다. 율곡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욕심 섞인 마음(人心)과 순수한 마음(道心)에 대해서 말했는데, 도심은 항상 좋은 것이지만, 인심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율곡은 4단과 7정은 인간의 순수한 본성과 그 본성이 밖으로 드러난 감정의 관계를 따지는 문제이지만, 인심과 도심은 4단 7정 위에 의지가 더 관련되어 있는 문제라고 했다. 도심에서 시작하여 도심으로 끝나는 경우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며, 인심에서 시작하여 인심으로 끝나는 경우는 가장 일반적인 경우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도심에서 시작하여 인심으로 끝나는 경우와 인심에서 시작하여 도심으로 끝나는 경우다. 율곡은 이 같은 마음의 이중성을 어떤 마음에서 시작하여 어떤 마음으로 끝나는지로 나눈 것이다. 사실 인간은 순수한 마음에서 어떤 일을 시작하였더라도 욕심 섞인 마음으로 끝나기 쉽다. 그러나 사람은 의지적인 노력에 바탕을 둔 실천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욕심 섞인 마음에서 시작하였어도 순수한 마음으로 돌이켜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율곡의 생각은 사회를 보는 눈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모든 사회가 창업(創業) - 수성(守成) - 쇠퇴(衰退)의 과정을 거쳐 갈 때 사회의 주체가 사람이고 사람에게는 능동적 실천이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인간의 노력으로 쇠퇴기에 접어든 국가나 사회를 다시 새롭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이 경장론(更張論)이다. 하지만 경장론이 아무 때나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경장할 때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경장을 통해 바꾸어야 할 대상은 법률이나 제도이고,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은 훌륭하고 어진 정치를 해야 한다는 원칙과 삼강오륜 같은 도덕 법칙이라고 했다. 율곡은 경장의 목적을 백성을 위하는 일에 두었다. 법이나 제도가 오래되면 폐단이 생겨서 그 피해가 백성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백성을 위해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때를 놓친다면 그러한 시도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변화를 잘 보고 바꾸어야 할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다산茶山(1762-1836)이 이룬 다산학의 뿌리는 이익의 중심이 된 경세치용 학파다. 하지만 그의 학문 속에는 박제가 ․ 유득공 ․ 이덕무 등과의 교류를 통해 받아들인 북학, 전통 주자학, 양명학, 천주교를 포함한 서양학문, 그리고 신작 ․ 김정희 등과의 교류를 통해 얻은 청대 고증학까지 다양한 요소가 녹아 있다. 다산의 학문에 나타난 첫 번째 특징은 경험주의적이며 실증주의적인 점이다. 두 번째 특징은 신비주의적인 요소에 대한 비판이다. 다산은 주희가 완성한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공자와 맹자가 말했던 실천 중심의 유학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다산은 인간의 본성을 선천적인 도덕성으로 이해하고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한 성리학자들과 달리, 마음이 인간 생명의 실체이며, 마음의 속성인 성(姓)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기호(嗜好)에 따라 실천에 의해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산은 타고난 기질이 맑으냐 탁하냐에 따라 선악이 갈라진다고 본 견해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사람이란 몸과 정신이 합쳐진 존재이므로 한계를 지닌 육체와 생리적인 감각 때문에 착한 일보다 나쁜 일을 하기가 더 쉽다고 보았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착한 일을 좋아하고 나쁜 일을 부끄러워하는 신령스러운 지각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산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늘에 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주적인 선택 의지에 두었다. 다산의 인간 이해는 자유 의지에 따른 실천 속에서 도덕의 근거를 찾으려고 한 데에 큰 의미가 있다. 따라서 다산은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4단도 인간의 내면에 들어 있는 도덕성이 겉으로 드러나는 단서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덕으로 향해가는 실마리라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행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덕인 셈이다. 이처럼 다산은 인간의 본성을 형이상학적 이기론으로 설명한 성리학자들과 달리,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성에 기초한 현실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다산은 불교는 마음을 닦아서 일을 실천하는 것이고, 유가는 일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인간다움을 실현해 가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산은 백성들이 이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고 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적인 욕구를 긍정하였다. 그리하여 자유 의지에 근거한 실천에서 인간의 고유한 성질을 파악해 낸 것이다. 이같은 다산의 사상은 유교의 본래적인 모습을 바꾼 것이 아니라, 공자의 본래 생각에 충실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천적인 모습으로 되살려 내려고 한 것이다. 다산의 역사의식은 평등지향적 신분관을 보여주었다. 당시 제도나 관습에는 여전히 엄격한 불평등 구조가 담겨 있었다. 다산은 무너져 가는 민중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변의 도덕과 상하관계를 내세우던 성리학자들과 달리, 임금과 신하의 관계까지도 옛날부터 지금까지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온 것이라고 했다. 다산은 자신이 꿈꾸는 이러한 사회를 민란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식인들의 자각을 통해서 이루어 보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