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양면성을 읽고
20051107 김용석
서론
정체되어 있는 진리가 아니라 끝없이 소통하는 진리로서 인간의 내면의 세계와 외부의 세계, 언어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를 비롯하여 현 시대의 인간들이 자아를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이론적인 인식만으로 머물러야 하는 진리가 아니라 삶에 도움이 되는 실천적인 진리로써, 인간의 양면적 모습을 인식하려는 노력으로써 진리에 바르게 접근하도록 도와준다.
먼저 진리에 관한 두 가지 견해는 진리가 무엇인가하고 묻는데 있다. 그 물음 이면에는 좀더 심오한 그 반대의 명제가 숨어 있다. 그리스적 진리 개념은 인식에 우선적으로 비중을 두고 있다. 참이란 주어져 있는 사실에 대한 올바른 진술이라는 것이다. 란트만에 따르면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진리란 근원적인 의미에서 존재파악이라는 것이다. 즉 진리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 신의 신뢰성까지도 표현하는 것이다.
본론
만일 우리가 진리의 전통 이론에서 벗어나 진리의 현상에 대해 사심 없이 접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연적인 언어 사용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언어 사용 그 자체로 무엇을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언어의 역사를 일별하는 것이 충분한 가치가 있는 암시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설적인 연관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 언어 속에 주어져 있는 현재의 자연적 언어 사용일 것이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 자체의 규정이라는 것이다. 진짜의 반대는 가짜이며 이는 존재하도록 미리 주어져 있는 것과는 다르게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어떤 것이 구체화되는 방식으로 한 차원 승화시키는 것이다. 참은 파악되는 그대로이고 단순하게 무(無)규정적인 것과 모호한 것에 대립한다. 참은 분명한 규정성에서 밝혀낸 어떤 것을 표현하는 것이고 완전성에 도달한 어떤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참이란 자기 본질에 일치하는 그대로 아무런 제한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참된 성자”란 단순한 거짓 성자와는 달리 현실의 성자인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러한 사람이어야 할 그러한 성자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며 그 자신으로 성자일 수는 없으나 바로 성자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을 지칭한다. “참된 렘브란트”는 진짜 렘브란트와 구별하여 사용되며 렘브란트 자신이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그 방식이 그와 동일하고 그 질이 그와 유사한 그림을 가리킨다. “참된 기적”이란 실재하는 기적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기적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정말 같지 않은 어떤 것을 사람들은 기적으로 간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특수하게 그를 잘 드러내어 주는 질적인 관점에서 사람, 혹은 대상을 “참”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의 현현(顯現)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사건은 현실적인 기적이 아니고 문제의 그림은 실재에 있어서는 렘브란트가 그리지 않았으며 그리고 문제의 사람도 현실적인 성자가 아니다. 그러나 확정할 수 있는 진리는 진술, 혹은 의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질이거나 혹은 인간의 성품을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사실”(Sache)은 우리들이 어떤 사태를 확정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 허위와의 혼란성에서 비로소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방해 속에서도 결국은 쟁취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지속적인 노력에서 비로소 얻어지는 결과인 것이다. 옳다고 하는 것은 눈앞에 있는 것이어서 다만 그 즉시로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참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확정될 수 있도록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폐되어 있으며 가려져 있다.
내가 어떤 기만의 희생자로 된다고 의심할 때 그리고 나를 그러한 기만에서 벗어나도록 시도할 때 비로소 나는 진술의 진리에 대해서 묻게 된다는 사실이다. 진리에 대한 물음은 기만에서 발생한다. 우리를 속이고 실망시키는 것은 단지 타인의 의도적인 기만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만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물음에 있어서 기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자기 해방이 중요하다. 진리 문제는 실제적인 요구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있고 자기 해방으로 될 때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진리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진리”라고 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에서 그 연관성을 찾고 있다. 그는 이 말을 동사 어간인 숨기다(verbergen)에다 부정사인 a를 접목시켜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므로 진리란 그에게는 미리 처음부터 “비은폐성(Unverborgenheit)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진리가 탈취당해야 하는 은폐성은 사람들이 사물을 단순히 주의할 수 있는 불빛 앞으로 가져와서 제로 포인트(zero point)에서 시작하듯 인식을 분명하게 단계적으로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불가시성(Unsichtbarkeit)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리의 획득은 오직 전체 인간의 최고 긴장에서만 가능하다.
진리에 대한 물음이 의심에서 나온다면 그러한 의심을 제거할 수단을 발견해야 하는 과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래야 의심으로부터 보호할 수가 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사물의 영역에서는 문제가 상대적으로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감각적인 눈빛은 진술의 진리를 확인한다. 감각적인 눈빛이 어떠한 이유에서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증거를 신뢰하여야 하고 더불어 한 사람의 증거는 다른 사람의 증거를 통해서 재검토되어야 한다.
감각적 지각은 원칙적으로 타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눈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구가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적합한지 혹은 어떤 기계가 옳게 작동을 하고 있는지 하는 것을 우리는 미리 처음부터 알 수는 없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시험해 보아야한다.
유용한 것이란 주어지기 이전의 목적을 위해 효과 있는 것으로서 증명되는 것을 말한다. 풍부한 것이란 인간 자신이 성장함과 동시에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능력을 개발하는 그것이다. 유용한 것이 이미 알려져 있는 세계내의 합목적적인 태도에 관계하는 것인 데 반해 풍부한 것이란 사전에 알려져 있지 않는 새로운 가능성을 산출하는 생산을 의미한다. 풍부하다는 것은 학문에 있어서는 새로운 발단 명제이고 이념이며 그리고 그러한 것 속에 가능성으로서 잠재하여 있는 것으로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추측일 수도 있다.
우리의 주위에는 실용주의적인 진리의 개념이나 생철학적인 진리 개념에 의해서도 파악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내가 인간적인 태도를 옳게 이해하는지 사회질서를 옳게 판단하는지 어떤 문학 작품을 옳게 해석하는지 하는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결과로만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개념의 풍부성은 대개 긴 안목에서 비로소 증명되기 때문이다.
진리란 언제나 인간 자신이 냉혹한 현실에 부딪치게 되는 그 어떤 달갑지 않은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진리는 의식적인 기만이든 무의식적으로 발생한 환상이든 간에 대체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것, 가리움과 덮개의 표피로 덮여 있는 것이다. 아무런 변명 없이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면 그러한 진리는 “순수”하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란 언제나 냉혹하고 잔인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리의 제2척도는 한 사람이 얻어낸 인식을 다른 사람이 입증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적어도 개개인이 자기 안목에서 입증하는 다른 사람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그는 자기 자신의 사실에 확신할 수가 있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요식화됨으로써 극단적이 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정확하게 진리에 관하여 논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른 영역을 구별해야 한다. 감성적 지각의 영역과 실용주의적 응용 영역과 정신세계의 영역을 상호 소통적 경험의 영역이라고 표현한다.
타인의 기능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의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 첫째의 것은 인식을 창조하고, 둘째의 것은 그러한 인식을 입증하는 것이다. 감성적 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인식의 영역, 특히 철학의 영역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개개인은 과오를 범할 수 있다. 그래서 개개인은 사도(邪道)의 사고 과정 속으로 스스로 빠져 들어가 자신의 힘으로써 더 이상 헤어 나올 수 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개개인은 타인의 통제를 필요로 한다. 우리 모두는 시험 삼아 처음으로 표명하게 된 사상이 타인의 확정을 통한 입증에서 현실성이 있다고 하는 상황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독백적 언어와 대화적 언어로서 표현하고 그와 동시에 독백적 사고와 대화적 사고간의 유사한 구별을 하고자 한다. 독백적이라는 개념은 연극에서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생각만 했던 것을 표현하는 그런 식의 의미는 아니다. 독백적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전달에서부터 장황하게 연관되는 표현에까지 이른다. 여기에 반하여 많은 사람들이 서로 바꾸어 가면서 참여하는 언어는 대화적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언어의 두 형식과 상이한 두 가지 사고의 형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독백적 언어와 사고는 말의 형식을 제약한다. 독백적 언어와 사고는 체계적으로 전개된 사상의 과정이다. 독백적 언어는 그와 동시에 권위주의적 언어이다. 왜냐하면 논증은 이러한 언어 형식이 여기서는 “오직” 지성적인 영역에 근거한다고 하더라도 일종의 지배적 사고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는 진리를 파악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심 없는 잡담과는 다르다. 대화는 싸움이다. 왜냐하면 양자가 진리를 얻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서로가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들의 사상을 첨예한 시험장으로 끌어넣기 때문이다. 특히 타자가 언제나 칭찬만 하는 곳에는 어떠한 진지한 대화도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모순이 독성이나 혹은 토론의 의욕에서 변종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러한 싸움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싸움에서는 상대자의 파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상호 승인하는 가운데 원칙적인 동등권의 의식에서 공동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진리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독한 사고는 설명을 요하는 것이며 비판적인 것이나 진지한 의미에서 창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고는 서로 다른 범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며 연구자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노력해서 이룩하는 사고 작업에서만이 성장할 수 있다.
진정한 대화를 저해하는 난점들은 어떤 것이고 대화를 위해 실현되어야 할 전제들은 어떤 것인가를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있는 능력이란 어려운 물음들이 생기는 곳에서 이 물음들에서 표현되지 않은 것과 표현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말을 애써서 이끌어 내어야 한다. 난감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에는 과오라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타자의 대답에서 비로소 내가 시험 삼아 표현한 사상이 어느 정도로 옳은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독단주의는 개방적인 대화의 가능성을 거부한다. 독단주의 자체가 이미 확실하게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단주의가 특히 위험하게 되는 것은 정치적, 종교적 영역에서이다. 그들은 진리를 위한 어떠한 공동의 노력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을 자기네들만의 독점적인 소유 속에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론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독단주의에 있는 지배욕에서 그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과 싸움을 벌인다.
진리의 조건은 진리란 결코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언제나 개방되어 있으며 이성적인 대화 속에서 확증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소위 진리를 소유하면 진리는 곧바로 비(非)진리로 둔갑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비교적(秘敎的)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도 깨우쳐 주어야 할 과제로서 독백적 형식을 합당한 것으로 증명하려는 “이론”은 깊은 통찰을 일깨워주는 교육적인 과제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노인층과 젊은 층간의 관계에서나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에서 보면 일방적으로 진행되어지는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신분 또는 성숙성의 구별이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큠멜은 <<윤리적 교육의 과제로서의 선에 대한 통찰>>에서 “선에 대한 통찰”은 일반적인 진리에 대한 예로서 우리가 이미 탐구한 바 있는 “정신적인” 영역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고대의 사회 형태들은 하나의 폐쇄적인 세계상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폐쇄성이 현대의 발전된 문화 세계에서는 개방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현재 보편타당한 도덕적인 규범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상호 모순 되는 수많은 견해들이 팽배하여 있다는 사실이다.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호간의 대화 형식을 협상(Verhandlung)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조용한 친구간의 대화나 본래적 대화의 다른 모든 형식들과 전쟁으로 인한 평화협상, 노동자의 임금협상, 법원의 변론 등과 엄격히 구별된다.
상호 소통적 경험은 관찰과 같이 사태에 관계하지 아니하고 해석 이전의 사태에 관계한다. 어떻게 진리의 물음을 행위의 세계와 상호 소통의 세계로부터 분리해 내는가 하는 방식이 결정적일 것이다. 사태(Tatsache)란 자연적인 경험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장과의 연관성 속에서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행위란 우리들이 신뢰하는 세계 내에 있는 공동의 태도를 표현한 것이다. ‘참’, ‘옳음’, ‘객관적’이라는 용어는 오직 합목적인 것과 비(非)합목적인 것이라는 척도에 달려있다. 단순한 진술만으로 진리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진리에 대한 의문은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에 대한 회의가 발생하는 경우에 비로소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어떤 인간의 태도에 있어서 옳음에 관해 토론할 수가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대화는 근본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자유의 차원에 있는 두 상대자가 완전히 개방된 상태에서 서로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선취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무엇보다도 이상적 언어 상황과 그에 일치하는 생활 형식이란 인간을 추상적 형식에서 비(非)역사적인 본질로서 고찰하는 무시간적 규정성이며 모든 합의란 계속해서 전개됨으로써 정비되어질 수 있으며 진리를 탐구하는 인간의 긴장에서만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문화의 단면은 조정 가능한 것의 영역이다. 모든 인간의 행위만이 목적적 행위이거나 생산인 것은 아니다.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표정이나 몸짓, 심지어는 위대한 예술품에 있어서도 표현이 존재한다. 여러 문화 영역의 전체 테두리도 존재하며 정신사의 전체 범위에서도 존재한다. 논의가 진리를 찾는 대화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형식인지 하는 것과 대화의 다른 형식(표정, 몸짓 등)을 논의 형식으로 대치할 수 있는가?
논의란 논거를 가지고 싸움하는 투쟁이다. 투쟁에서는 오직 논거의 힘만이 결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대화에서는 반대의 의견이 주장된다고 하더라도 논증하지 않는다. 논의는 완전한 의식의 차원에서 전적으로 자신에 선행하는 반면, 대화는 한 사실을 차츰차츰 해명해 가며 사전에 분명하지 않았던 전제들을 분명하게 하고 또한 그때까지 애매하던 이해를 비로소 명백하게 한다. 즉 대화란 논의와는 달리 일종의 해석학적인 작업인 것이다.
대화는 차후에 진술하거나 확정할 수 있는 결과에 이르지 않는다. 대화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던 진리는 전체로서의 대화 속에 들어 있고 분명하게 말하면 대화 상대자간에 내포되어 있다. 논의는 하나의 합의를 추구하고 사전에 지속하던 논쟁을 종결하기 위한 하나의 일치를 추구하며 대립의 주장을 조정하는 의사소통을 추구한다. 그 목표는 합의이다. 즉 대화는 진리를 추구하고 그러한 진리가 오직 사실에 대한 일치와 더불어서만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 문제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분석을 요구하는 여러 가지 상이한 종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정신세계의 영역에 합리적인 인식의 주도로서만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심신의 상태에 윤리적인 요청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대에 모순 되는 결과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의미로 바꾸어 놓으려 하는 시도는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다. 그 같은 진리를 인정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진리란 고독한 사고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공동의 대화에서만 나타난다. 진리 자체를 파악하기 위한 전제로 된다. 대화의 윤리적 전제를 진지성과 개방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대화는 사람을 속이고자 하거나 비밀에 부쳐두고자 하거나 고통을 주거나 부끄러워하는 경우에서는 어떠한 풍부한 대화도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미혹된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스스로를 개방적으로 표현할 수가 있다.
“비(非)진리 속에 있는” 존재가 “존재적으로 부정적인 모든 ‘가치’”를 멀리 할 수 있는 순수 존재론적 의미에서 사용되는 반면에 우리들의 관점으로는 인간이 비(非)진리와 대결하는 가운데에서 진리를 획득하는 과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그러한 과정을 본질적으로 윤리적 태도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 비밀에서부터 나와 통행할 수 있는 데까지 가고 그로부터 떠나 다음 통행할 수 있는 데까지 가서 비밀에로 전회하는 것은 과오이다. 사람은 과오를 범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인식하면서 “진리의 빛”을 파악하려고 한다면 인간 자신은 무엇보다 먼저 파악되어질 전체적인 현존재를 “과오”의 상태에서 밝혀 나가야 한다.
“본질적이면서도 존재에 관계하는 진리”는 상호 소통에서 발생한다. 상호간의 자기를 개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로 진리란 오직 자기 존재로 비상(飛翔)하는데 일치할 때에만 획득될 수 있다. 자기 존재 없는 진리란 존재하지 아니한다. 동시에 고통스럽지 않은 진리의지 없이는 어떠한 자기 존재도 불가능하다. 진리를 파악한다는 것은 고독한 개개인에게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특히 상호 소통의 특수한 형식에서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인식의 진리는 오직 인간의 내적 존재 진리로 가는 도정에서만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 왔다면 그와는 반대로 인간의 자기 생성이나 자기 자신을 위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윤리적인) 능력도 비합리적인 영역에서나 감정과 정열의 영역에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합리적인 전제나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활 관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 직결되어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합의 이론은 “참된 합의”의 사실적인 전제만을 밝혀내기 위하여 논의에 참여한 상대자의 인격적 태도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눈을 돌린다.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나는 이상적 언어 상황을 이상적 화자의 인격적 특징을 통해서가 아닌 구조적 특징을 통해서 즉 기회의 대칭적 배정을 통해서 대화의 역할을 지각하고 언어 행위를 수행하도록 하며 또한 특징짓도록 시도하였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지금까지의 사고 과정에서 새롭게 이룬 것은 대화의 성립을 위해 불가결한 태도가 동시에 대화를 초월하여 거기에서 생기는 공동생활을 위한 광범위한 결과를 낳았다는 인식이며 또한 논의의 조건들이 순수한 상호 소통적 행위의 조건과 독립하여 생각될 수 없다는 인식이다.
우리가 진리를 파악하려고 할 경우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 실현해야하는 전제조건을 밝혀야 할 것이다. “진리”란 분명하게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며 동시에 그 인식의 조건에 대해 묻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변화 과정 속에서 그 자체가 변한다는 사실, 인간의 정화(淨化)가 동시에 인식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시하며 “진리”란 그 자체가 변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현전성(Vorhandenheit)이란 도구성의 “탈락적 양태”로서 나타난다. “탈락적 양태”라는 개념이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하는 대단히 위험한 개념적 도구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개념을 사용할 때 폭넓은 체계적인 함축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부정적으로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이고 새로 만족할 수 있는 규정성은 미리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은 실재적 생활의 욕구에 관계하며 또 그로부터 제기된 문제에서 볼 때 방해된 교제 연관성의 재생산에 관계해서 실천으로 인한 하나의 이론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론이란 잠정적으로 임의성에 근거하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실천의 욕구에 관계되어 있다. 우리는 인간이 아무런 장애 없이 도식주의를 통해서 현실의 충만성을 자기 스스로 수용할 수 있는 태도를 직관(Anschauung)이라고 표현한다. 직관이라는 말은 좁은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서 사물을 파악하고 포착하는 넓은 의미로서도 쓰인다. 이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에 의해 스스로를 나타냄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에 의해 스스로를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현상학적 옛 주장에로 되돌아가고 만다.
탈제한성에 대해 인간은 “마음이 쏠리고” 있다는 것, “기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즉 기분은 세계상을 일정한 방식에서 각색할 뿐만 아니라 전혀 경험할 수 없을 수도 있는 현실의 특정한 측면에 이르게 하는 통로를 열어 준다는 것이다. 사람이 세계를 완전히 새로운 눈을 가지고 볼 수 있고 심오한 세계의 본질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상태는 스스로의 아무런 노력 없이 하나의 선물처럼 인간에게 순간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외적인 흥분제를 쓰지 않고 생기는 최고 행복감의 도취적 상승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예술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생기는 도취의 상태도 배제하지 않는다. 만일 일반적으로 기분이 진지한 인식 가능성을 개시한다면 그것 역시 도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취는 기분의 모든 특성을 실현시키기 때문이며 또 그것의 격렬함이 주는 특수성으로 거기에 상응하여 미미한 시간적인 지속으로 인한 그 밖의 기분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욕망이나 격렬한 운동으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서도 사람이 더욱 안전하게 자기 자신에 근거하게 되는 조용한 청명성에서 영적인 심신의 상태에서 이해의 고유한 능력은 발동한다.
인간자체 속에 있는 진리를 위한 순수한 감수성이 고도의 완전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점에 있어서 인간에게 특수한 윤리적 요청을 제기하고 있다. 순간이지만 아침의 상쾌한 기분이 찾지도 바라지도 않았음에도 사람에게 엄습하여 올 수 있다는 사실로서 “은혜”에 대한 언급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행복한 개시성(開示性)의 상태는 항상 일정하지가 않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상태를 지속시킬 수는 없다. 또한 조용한 청명성(淸明性)도 도취와 같은 생활 감정으로 빨리 변하여 버리는 휴식하고 있는 기분으로서 구별된다. 그러나 이러한 청명성 역시 서서히 사라져 걱정과 근심 그 밖의 불쾌한 기분으로 바뀔 수 있는 위협을 늘 받게 된다.
사물에 대한 태연함과 개방성은 우리가 기술(記述) 세계 내에서 그 기술로 인해 위험에 처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고 존립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근거와 바탕을 우리에게 약속한다. 즉 자기 존재 안에 있는 인간에게는 자기 존재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결과는 인간이 대단한 긴장 상태에서 “싸움”이나 “탈취”를 통해 비로소 획득할 수 있는 진리에도 이러한 태연함과 개방성은 모순 되지 않는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평화롭게 참 존재 안에서 안전하게 휴식하는 상태가 중요하다. 이와 같이 청정(淸淨)한 태연함에서 우리는 궁극적, 결정적으로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윤리적인 전제를 발견하고 이로써 우리가 지금까지 애써 왔던 외적인 기점에 도달한 셈이 된다.
오늘날 인간이 고요한 청명성이나 태연함에서 신뢰성을 가지고 세계를 보는 그러한 세계상은 오늘날의 인간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주위를 둘러보면 진지한 세계상과는 아주 반대로 세계는 깊은 불신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이어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남으로써 지금까지 자명한 것으로 여겨졌던 생활 질서의 문제가 뿌리째로 뒤흔들리게 되어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기만적인 환상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한 결과가 세계와 인간 전체에 대한 깊은 불신을 야기하여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오늘날의 상황과 지난 시대를 구별하는 분기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로 인하여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아직도 “신성한 세계”를 믿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난은 참으로 가장 심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보편적인 불신의 강에서 함께 허우적거리는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배를 잡고 웃도록 만들며 동시에 그의 윤리적인 품행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게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불신과 의혹의 정신은 오늘날 일종의 공공연한 위험으로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만일 불신이라는 것이 이제 인간에게 남겨진 최후의 것이라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란 전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낙천주의적 세계관과 염세주의적 세계관이 대립할 수 있으며 후자는 인간을 파멸시키는 잔인한 진리에 대한 확신이며 전자는 위로하고 담지하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다. 이러한 물음은 어떠한 논거를 가지고도 하나의 완전한 입장을 결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양 입장의 각각은 나름대로의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사에는 서로 대단히 다른 성격을 가진 전형적인 두 형식이 대립하여 있다. 그것은 고대의 희극과 비극에서 잘 나타난다. 인간의 운명과 같은 큰 문제가 다루어지는 진지한 형식인 비극에 그 강조점이 놓여있다. 이에 반해 희극은 오직 긴장을 푸는 울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아마도 시대착오적인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문학에서는 이미 그러한 문제를 넘어서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밝혀내고 냉정한 진리를 은폐하지 않고 기술하며 기만적인 가상의 가면을 찢어 버리고 벗기는 것이 오늘날 당면한 예술의 결정적인 과제이다.
문학의 “사실주의적” 경향성에는 하나의 특정한 현실상이 바탕으로 되어 있다. 즉 표면과 이면에 따른 분류,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름다우나 기만적인 표면과 그 뒤에 은폐되어 있는 냉정하고 냉혹한 현실의 분류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상과 인간 태도의 이중적 가능성은 서로 일치한다. 오늘날에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을 아주 부정적으로만 그리는가 하면 아직도 세상에는 밝은 면들이 있다고 믿는 구제 불능의 멍청이를 그리는 사상가를 심오하고 진지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소용돌이에 대해 투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의 사고의 일반적 원리가 정신 분석과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가장 잘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프로이드(S. Freud)의 정신 분석은 다음과 같은 것을 밝혀낸다. 즉 리비도(Libido, 성욕)가 본래적인 인간의 근본 작용을 밝혀 주고 있다는 사실과 정신세계는 예술, 학문, 종교 등과 함께 본능의 에네르기를 승화시킴으로써만 어떤 파생된 것으로서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참된 현실은 충동 속에 들어 있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오직 저지된 충동의 직접적인 만족에 대한 성과에 불과할 뿐이다.
이데올로기 비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즉 경제적인 관계는 본래 현실적이며 정신적인 세계는 오직 “이데올로기적 상부 구조” 혹은 그것의 단순한 반영으로서 자신을 정당화시키며 적대자를 속이기 위한 권력 투쟁의 기만적인 수단으로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가상이 투시되는 것이고 그 이면에 들어 있는 힘의 가면이 벗겨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다”와 같은 인식은 새 것을 어떤 낡은 것에다 환원시키는 데 기여하고 세계의 폐쇄성을 유지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인식의 영향력은 각각의 경우에 따라 안심할 수도 있고 혹은 실망할 수도 있다. 즉 새로운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이 위협적인 것으로서 나타났던 경우에는 안심할 것이고 희열을 찾아냈다고 믿었던 경우에는 실망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늘 신뢰하고 있는 세계 이해의 테두리 내에서만 머물러 있고자 하면 타성에 젖게 된다. 이 타성 속에서 사람은 가능한 한 전통적으로 그렇게 해오듯이 새로운 것의 출현을 막으려고 시도한다. 왜냐하면 모든 새로운 것은 안정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때문에 자신의 세계는 빈곤하게 된다. 그 자신의 세계는 언제나 동일한 습관의 테두리 내에서만 진행될 뿐이다. 그러나 창조적으로 앞서가는 발전과 인간 생활의 풍부성은 어떤 새로운 것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사고 도식을 현실 세계에 적용시킨다면 상당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이거의 예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즉 “국가는 법의 조직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또는 국가는 권력의 조직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의욕은 즐거움을 강조하는 대상의 표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며’ 동시에 그러한 대상의 비존재에 관한 표상이고, 의욕은 한 감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가치는 즐거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원리는 서술을 단순화시키는 일에 기여할 뿐 아니라 동시에 본래적인 암시력이 내포되어 있는 평가 절하의 경향성을 띠게 된다.
인간의 영역에서 순수하게 이론적인 체계화의 노력으로 발생하는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의 원리 사용과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진리의 의지는 거짓 요구를 찾아내기 위하여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에 봉사한다. 인식하려고 하는 노력이 이제는 가면을 벗기려고 하는 의지로 되어 특유의 공격적인 특징을 획득하게 된다. 진리의 의지는 허위의 가면을 찢어 버리려 하며 그러한 노력에서 진리의 특정한 윤리적 바탕을 갖게 된다. 이것이 이상주의적 태도이고 이러한 태도는 세계를 좀더 개선하고자 하며 그러한 범위에서 포착할 수 없는 정당화의 필연성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계몽의 정신이란 윤리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다. 현실은 우리가 시험할 수 있는 하나하나의 경우에서가 아닌 일반적으로 혹은 모든 경우에 다 그러하며 이러한 것은 어떠한 시험 이전에 이미 처음부터 미리 확정되어 있다.
먼저 혐의(Verdacht)와 무고(Verdachtigung)의 본질의 전재로부터 우리들의 전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결과를 개괄하게 된다. 먼저 사람들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지는 특정한 개개의 혐의에서부터 출발하려 한다. 혐의라는 개념은 단순한 경우에서 시작하는 것이 목적에 적합할 것이다. 혐의란 어떤 사람이 범죄의 행위를 했다는 추측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러한 혐의는 단순한 추측과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써 구별된다. 즉 혐의에서는 어제나 어떤 벌이 취급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추측은 무차별적이며 희열에까지도 상황에 따라서는 희망과도 관계할 수 있다. 누군가를 무고(誣告)한다는 것은 그가 그러한 행동을 했다는 추측을 공공연하게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무고는 고발과 구별된다. 고발은 공공연하게 드러나 있는 사태에 관계하고, 무고는 아직 은폐되어 있는 것에 관계한다.
혐의는 혐의를 증명할 증거를 입증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혐의는 은닉을 전제로 하며 거짓이나 혹은 허위를 전제로 한다. 혐의는 마치 사상이나 추측이 아주 갑자기 그에게 등장하는 것과 같이 그 자신의 아무런 행동 없이도 나타날 수 있다. 혐의는 인간에 대한 요구이고 하나의 해명을 요청하는 것이다. 혐의와 무고는 이와 같이 필연적인 삶의 기능이다. 일단 혐의를 품게 되면 우리는 타자와 아무런 사심 없이 이야기할 수 없으며 또한 타자의 사고에 올바르게 관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그러한 혐의를 배경에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해 타자의 진술에 신뢰감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특정한 행동에 대해 의심하는 경우 보다 그의 위로나 심상, 그의 어떤 충실성과 성실성을 의심하는 경우들이 훨씬 더 중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반증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에 전혀 반대할 수가 없으며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혐의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
탈가면하려는 의지는 혐의를 확실하게 입증하려고 하고 공공연하게 세상의 이목에다 밝히려고 하는 노력에서 발생하게 된다. 탈가면이란 이면에 있는 “참 얼굴”을 탈은폐하기 위하여 용의자의 기만적인 가면을 벗겨 버리는 것을 말하며 그로써 당사자는 자신이 허위로서 행사하였던 권력과 단절되는 것을 말한다. 탈가면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아주 분명하게 가치 평가된 양면적인 한 관계를 설정하며 기만적인 외면의 뒤에 있는 참된 핵심을 추측하게 된다.
혐의와 탈가면하려는 의지는 필연적으로 생활의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혐의와 의지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어날 수 있는 기만에 대해 깨어 있도록 지켜주거나 무기력한 모든 습관에서 구해내 주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가능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하나는 피곤한 회의주의로서 무지몽매한 대중을 완전히 경멸하고 무시하는 오만에 찬 지자(知者)의 의식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엘리트라 생각하며 자신들만 알고 있는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의사소통을 하는가 하면 자신들처럼 염세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사물의 깊은 연관성을 투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한다. 이러한 태도로부터 큰 회의론자가 등장하게 된다. 또한 이들과 구별되는 부류는 불안전성과 취약성으로 인해 불신적으로 되어 어떠한 고귀하고 위대한 것도 참으로 여기고자 하지 않는 작은 회의론자들이다. 여기서 올바른 경계를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진리의 내용은 결정적이고 고유한 것이며 인간의 정신적 현존재를 향상시키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파멸시키는 진리는 인간이 탐구할 수 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다. 인간은 긍정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을 “찬양하는” 인간의 삶을 실현시키고 향상시키는 진리를 탐구한다. “진리는 찬란한 빛으로써 우리에게 눈과 가슴을 열어주고 어떠한 일에 처함에 있어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주위를 되돌아보도록 하여 새로이 신앙으로 충만하게 하도록 용기를 준다.”
니체가 삶을 촉진시키는 작용을 진리의 척도로 삼았다면 삶을 촉진시키는 진리의 작용이 인간 삶의 불가결한 전제일 수 있는가? 진리란 인간에 대해서 어떤 고통스러운 것이고 인간을 경탄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이제 곧 우리는 진리 문제의 발생이 인간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소박하게 그냥 수용되어 왔다는 통설에서 벗어나게 하며, 또한 그것의 발생은 깊은 동요를 일으키게 하는 의심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의심으로 새로운 확신에 이르게 되는 변증법적인 진로가 생길수도 있다. 언어가 대체로 고통스러운 진리에 관해서 언급된다는 사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인간은 진리에 항상 강요당한다는 사실에 근거를 둘 수 있다. 의심은 근본적으로 반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뢰의 미덕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신뢰란 어쨌던 불신과 혐의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신뢰한다는 것은 증명 가능한 아무런 확실성도 없이 그 사람을 믿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아주 큰 난점은 이러한 신뢰에는 보장이 없고 오히려 언제나 모험만이 따를 뿐이며, 그래서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과 더구나 그는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의 손에 자신을 맡겨야 함으로 때로는 실망도 손해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삶과 존재의 신뢰에서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안정감을 느끼며, 그러한 바탕에서만 완전하고 의미 있는 삶이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매우 어려운 점은 신뢰란 증명할 수 있는 지(知)를 수단으로 해서 보장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 다른 경험들 즉 희열과 위로에 찬 경험들은 그것이 맹목적인 경신(輕信)이 아니어야 한다면 신뢰하는 사람의 과감한 투신을 요구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신뢰란 어떠한 것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과 궁극적이고 심오한 진리도 오직 삶의 투신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모험을 완전히 의식하는 가운데서 불신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뛰어 넘을 수 있으며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관계를 재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란 “자기가 은폐하는 바로 그것이다.” “비밀은 우리에게 인간을 폭로한다.” “은폐하라”, “폭로하라”와 같은 어휘들의 또 다른 암시는 빛을 두려워하는 심연(深淵)이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심연에서 사람은 부끄러워하여 심연을 숨기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어둡고 희열하지 못하는 인간의 측면이 본래적 현실이라고 하는 확신이 서 있는 것이다. 인간은 참으로 “불쌍한 작은 비밀 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상은 이미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염세주의적인 인간상과 같은 것이다. 한번 일깨워진 의심은 늘 존재하여 있게 된다. 우리는 통용되고 있는 요식을 다른 용건으로 수용하기 위하여 의심을 가지고 사는 것을 배워야 하고 또한 의심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의심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두 가지의 근본적인 경향성이 존재한다. 그러한 경향성을 리쾨르는 “의심하려는 의지”와 “순종하려는 의지”로서 상호 대립시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상을 살해하는 것이고 상징에 순종”하는 것이다. 전자는 “의심하려는 의지”로서 파괴적인 해석학을 이룩하였으나 후자는 “순종하려는 의지”로서 해석학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현대에는 “성자의 상징”이 이미 변조되었고 또 어떤 대상으로 굳혀졌기 때문에 우리는 상징의 세계로 직접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다른 측면으로부터 진리가 깊은 양의성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살아가는 사람의 은폐된 비진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심사숙고하는 분석적 염세주의의 비(非)진리도 존재한다. 우리는 진리의 양면적인 얼굴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으로는 사람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냉혹하고 잔인한 진리와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하고 담지하는 진리, 다시 말하면 의미를 실현하는 세계의 진리가 존재한다. 만일 우리가 한편에 치중한다면 그 삶은 잘못된 것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간의 평형 또는 양자를 모두 포괄하는 종합 명제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일자의 진리는 타자의 진리에 모순 된다. 참으로 인간은 어떠한 태도를 위해야 하는가? 해결책은 오직 하나의 진리를 다른 진리에 지속적으로 시험하고 상대화하는 끊임없는 운동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
진리란 결코 하나의 최종적인 확신으로서 주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언제나 새로운 비판적 반대 운동을 하는 가운데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 비판적 고찰 방식이란 모든 혐의를 추구하여 가차 없이 인간 정신의 모든 진술을 그 진지성에 따라 묻는 것이며 동시에 신뢰적 고찰 방식이란 현상의 풍부성에 몰두하여 현상을 이해하면서 의미 실현의 궁극적인 것을 획득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리쾨르가 언급한 바 있는 양자의 해석학은 필수적이며 이 양자 중의 어떠한 것도 타자의 해석학에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전시대(20세기)에 가차 없이 환상을 파괴함으로써 인간을 그 기만적인 안정에서 쫒아내는 것이 과제였다면 오늘날 모든 긴장을 정돈하는 것이 중요하고 신뢰와 책임을 가지고 이룩할 수 있는 매래에 대한 새 희망을 재획득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개별적으로 심화하는 이러한 관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구는 일자를 타자와 구별하는 것이다.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님”과 더불어 “무엇과는 다른 어떤 것”의 원리로 표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원리의 도움으로 사물들의 차별성을 밝혀내는 일과 새로운 사건들이나 혹은 주도면밀함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것과 이미 알려져 있는 것과의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그 이전의 것에는 아직 내포되어 있지 않았고 또 그러한 것에서 추론될 수도 없는 어떤 새로운 것이 출현하는 발전 과정에 있어서 새로 등장한 것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성향의 도움으로 인해 세계가 우리에게 투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실제로 새 것, 즉 다른 종류의 것이 그 새로움에서는 전혀 인식되지 않는다는 위험도 따르게 된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판단의 능력, 다시 말하면 인식의 능력을 필요로 하며, 그러한 능력으로 인해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것이 어떤 상이한 것으로 입증되며, 그리고 새로운 것이 왜 실제로 새로운 것인지 또 이미 언제나 알려져 있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가 밝혀진다.
구별이란 단지 첫걸음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구별을 통해 분리된 것을 다시 통합하는 일이며 전체의 상을 그리도록 하는 일이다. 직관에 주어진 것을 현실화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 서술이다. 서술은 대화에서 이루어지고 서식에서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서술은 그러한 것을 초월하여 자신을 실현하고 대상으로 깊게 침잠하게 하는 수단이며 그러한 조건이 학문에 적용되었을 때 특수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대상을 조심스럽게 서술하는 것이 모든 체계화된 학문적 작업의 단초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언제나 자명하게 재강조 되고 있다.
서술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묘사하다(schildern)와 일치하는 말이다. 묘사는 행동적이며 생기가 있어야 한다. 묘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나에게 관계하는 인상이다. 묘사는 이 점에서부터 대체로 분명하게 인상주의적 성격을 갖게 된다. 이에 반하여 서술은 훨씬 더 객관적이다. 서술에서는 사실이 중요하지 그 사실로 인해 만들어지는 인상은 중요하지 않다. 서술은 철저히 사실적으로 조정되어 있다. 서술은 더 나아가 정확하여야한다. 그러므로 서술은 개별성에 관계하여야 하고 개별적인 부분을 논구 분석해야 하며 다시 전체로 종합되어야 한다.
우리는 일어난 사건을 다른 사람에게 보고(Bericht)한다. 대상을 눈앞에다 분명히 제시하기 위하여 상세함을 요구하는 서술과는 달리 보고는 간결하고 명확하며 엄밀해야 한다. 이에 반하여 기록(Protokoll)은 또 다른 것이다. 기록은 개개의 사건과정을 적어두는 것이며 차후의 작업을 위해 그러한 사건 과정을 고수하는 것이다. 기록은 개개의 사실에 매여 있다. 기록은 개별 사실의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되고 어떠한 가치 평가를 내려서도 또한 어떠한 가설적인 관계선을 가져서도 안 된다. 기록은 오직 고립되어 있는 사실을 가공하지 않은 상태로 재생해야 한다. 기록은 상호간의 차이가 없는 것이며 그로써 보고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고는 이미 분명한 차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Erzahlung)란 또 다른 차이가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체험한 바를 이야기하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것은 어느 순간까지는 보고와 일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의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야기는 잘 포장되어 꾸며질 수 있고 쾌적한 분위기의 개별적인 것에 그냥 머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사실의 진리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다시금 이와 구별되는 것이 기술(記述, Darstellung)이다. 기술한다는 것은 근원적인 의미에서는 어떤 것을 자신 앞으로 내세우는 것을 말하고 전위적인 의미에서는 어떤 것을 직관적으로 소여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기술한다는 것은 육체처럼 현재 나타나 있어 우리들이 그 자체를 본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소묘나 회화에서 나타날 수 있으나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언어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즉 묘사는 생동적이어야 하고 생기가 있어야 하며, 기술은 직관적이어야 하고, 서술은 정확해야 한다.
우리는 현실 생활을 서술에 대한 단순한 기쁨에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 달성을 위해 서술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상상하지 못하는 표상을 전달하기 위하여 언제나 어떤 대상을 다른 사람을 위해 서술한다. 일종의 서술은 자신이 직관으로 알고 있는 어떤 대상을 그것을 알지는 못하나 어떤 이유에서 알고자 하는 다른 사람에게 서술하는 것이다. 서술은 다른 사람이 현실로 나타나서 그가 현실에 일치하는 탐색의 상을 그리는 것이다. 서술은 그러한 특정한 목적 없이 단순히 청자나 독자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도 가능하다. 서술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준다.
우리는 학문적 작업의 단초에는 관찰이 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다 서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관찰은 오로지 내가 직접적으로 현재 임하고 있는 시간적인 사건에 관계한다. 지난 사건에 관해 나는 보고, 서술은 할 수 있으나 관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찰은 무한대로 나가지 않으며 서술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학문에 있어서 서술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바와 같이 그렇게 큰 역할은 하지 않는다. 계획에 따른 관찰이나 이론 형성을 위한 세심한 측정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기초로 하고 있는 모든 것은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서술은 아니다. 반대로 통상적인 학문적 수행은 이미 언제나 서술을 능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서술은 먼저 주어져 있는 관점에 따라서만 규정되어 선정된 자료를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시되는 것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설정된 모든 관찰과 측정이 어느 한계에 있어서 “맹목적”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관찰과 측정이 조심스럽게 설정된 서술에 의해 지배되지 않을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한 서술에서 비로소 그 다음에 따르는 관찰과 측정을 위한 영역이 펼쳐지게 된다.
서술은 차별성을 두면서 부분들을 분석함으로써 어떤 규정성을 획득하게 된다. 분석이란 서술의 본질적 특성이다. 이와 같이 서술은 개별성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새로운 규정성 안에서 부분에서부터 다시 전체의 상이 생기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술은 단순한 기록과는 구별되어 개별성의 연대기적인 열거법을 능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술은 여기서 전체의 “상”(像)과 같은 어떤 것을 생성시켜야만 하며, 이를 전개시키기 위하여 서술은 하나의 분명한 선취(Vorgriff) 개념과 함께 시작하여야 한다. 여기서 선취 개념은 개별적인 요소들을 비로소 생성하는 전체에 연관시켜 옳게 이해하도록 용납하는 것이다.
서술의 위대한 예술성은 서술 이전에 이미 동반되어 나타나 있는 도식을 불충분한 것으로 입증하는, 기대하지 않았던 새 것을 위해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서술을 요구하는 “순수한 현실”은 우리가 준수한 현실을 묘사하기 위하여 단지 포착할 필요가 있었던 그런 단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수반되어 있는 이해를 수정하는 가운데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한 현실은 서술에서 비로소 성립하게 된다. 훌륭한 서술은 대상과의 힘든 투쟁에서와 수반되어있는 기대와 대상과의 모순 사이를 항구적으로 논구 분석하는 가운데서만 획득될 수 있다. 그러므로 훌륭한 서술은 언제나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서 가능하다. 모든 서술은 힘을 긴장시키고 흥분시키는 그러한 투쟁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단지 비생산적으로 남을 뿐이다.
서술의 난점은 학문적인 문제 제기에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자연 관찰에 있다. 서술을 올바르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매우 정확하게 관찰해야만 한다. 서술은 지금 까지 주의 깊게 보지 못하였던 것을 밝혀내어 알린다. 특히 자신을 서술하고 또 그러한 작업을 통하여 한층 더 깊게 그 대상 속으로 침잠하여 들어가는 것에서는 물론이고, 청자나 독자로서 그러한 서술이 가능하게 되는 것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또 다른 하나는 언어적 고착화의 어려움에서 발생한다. 우리가 사건진행을 정확하게 서술하고자 시도하면 할수록, 말(단어)로 파악하기는 점점 힘들어지며 올바른 단어를 선정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으로 된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서 제공되는 단어는 불충분한 것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언어와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발생한다. 즉 사전에서 보지도 못했고 혹은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지 않았던 어떤 것이 밝혀지며 포착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서술은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그들도 그러한 것을 볼 수 있게 한다. 서술은 실제적으로 창조적인 능력이며 현실을 가시화하고 증대시키는 능력이다.
예술에서 우리는 무한한 인내로 끊임없이 연습함으로써 서술에 대한 어떤 분명한 능력에 다다르게 된다. 서술은 자기 망각의 헌신에서 극단적인 전념을 요구하며 그것이 향하는 방향은 일정한 서술을 최상의 가능성으로 완성되도록 하는 데 있고 그러한 서술을 넘어서 가능한 사용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서술의 예술도 규칙적인 것은 아니다. 진정 서술의 예술은 그것이 처음인 것처럼 언제나 새로운 혼신에서 매번 새로 연습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학문은 항상 그 대상을 서술함과 더불어 시작되어야 하나, 그것으로 서술의 작업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학문은 목표로 세운 결과의 측정을 재검토하기 위하여 서술을 언제나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서술은 결코 근본적으로 학문 밖에서 학문을 성립도록하는 그런 전 단계가 아니라 오히려 상호 의존의 순환적 관계이다. 바로 이러한 서술의 관계 속에 학문을 앞으로 내닫도록 하는 강한 힘이 있고 이 힘은 언제나 새로운 자기비판을 강요함으로써 학문적인 고착 상태(Routine)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서술을 학문의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학문의 관점에서의 서술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정한 진술을 마련해야 하는 과제를 가지기 때문이다. 서술이란 가장 단순한 형식에서 일반적으로 A라는 사람이 아직 어떤 것을 알지 못하는 B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에서 재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실제 생활의 차원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탐색의 상”(Suchbild)에 관해 언급했던 것이며 그러한 것을 우연히 일치할 수 있는 단독적인 개개 특징의 열거와 구별했었던 것이다. 서술은 서술된 대상이 직관적인 상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괴테(J.W. Goethe)의 말을 빌리면 “전체를 이룩하도록” 해야 한다. 서술은 이러한 방식에서 해당되는 사실의 기술(記述)로 된다.
그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먼저 묘사된 대상 그 당시에는 우리에게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들인 색깔과 형식 그리고 전체적인 미와 의미성이 묘사를 통해 분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언어적 기술의 경우도 매우 유사하다. 직접적인 직관에 있어서 의식적인 명료성으로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회화적인 묘사를 통한 형식에서는 비로소 그 아름다움과 형태를 나타내게 한다.
예술 속에서 형성된 것을 현실 속에서도 재발견할 수 있다. 묘사야말로 우리에게 대상을 비로소 구상적으로 명백하고 의미 있게 해주며 우리는 그로 인해서 그 전에 보았던 것보다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새롭고 더 깊은 시각, 그로 인한 세계의 풍요성 그것이 바로 예술에 대한 깊은 행복감이다. 새로운 작품 속에 어떤 신선한 것이 첨가된다면 이미 이전에 파악하였던 모든 것들은 다시금 새롭고 더욱 예리하게 나타나며 또한 묘사를 통해 색다른 형태를 만들어 내어 풍부하게 한다. 바로 이러한 것이 조형 예술의 작품을 통해 우리 속에서 전개되는 시각의 선험성이다.
예술은 참으로 현실적인 교제의 짐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나 그와 동시에 그렇게 벗어나있는 것은 또한 이미 언제나 일정하게 형성되어 있는 일종의 직관이다. 우리가 이미 재해석된 세계에 존재하는 한 그로 인해 우리는 다시 처음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가 하는 의문이 발생한다. 미술을 통해 직관을 형성한다는 것은 현실 생활의 편협된 관점에 집착하여 있는 구속성을 타파하는 것이고 비로소 사물을 그 자체로부터 직시할 수 있게 하며 마침내는 우리에게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개시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술에 있어서도 이미 나타나 있는 그러한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이는 똑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때까지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은 우리의 체험이 형상을 획득함으로써 명료하게 된다. 개별적인 것을 단독적으로 고수하려고 하는 단순한 서술은 용납되지 않는다. 문학적인 말로 바꿈으로써 비로소 분명한 형상을 획득하게 되고 새로운 깊이로부터 세계를 개시할 수 있게 된다. 즉 문학에 있어서의 기술이 바로 인간 인식의 기관이라는 사실이다. 문학적인 기술에서 우리는 현실에 직접 관계하게 되고 우리들 자신의 삶의 현실에 관계하듯이 외적 자연의 현실에 직접 관계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예술의 수단으로 파악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이 형성되는 동시에 우리의 삶이 예술을 기술로 설정하는 형식들 중의 형식을 획득하게 된다.
문학이 세계와 인생을 파악하기 위한 일종의 기관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나 문제는 단지 그러한 문학만이 유일하게 유용한 기관인가 하는 것이다. 특히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기술이 유독 예술의 형식으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정치적인 투쟁의 모든 표어나 학문적 은어의 새로운 각인, 호사스럽게 꾸며진 모든 광고 언어 등이 바로 그러한 형식들이다. 이들은 단지 대상에 “일치”할 때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단순화되지 않는다. 문학은 언어적인 기술의 다른 형식들과는 달리 사물들 자체가 제시하고 있는 사실 그대로 스스로를 보게 한다. 문학은 사물을 조작적으로 단순화하지 않고도 그 전체적인 풍부함 속에서 보도록 한다. 이러한 풍부함이 지금까지 예상하지 못했던 충만성을 우리에게 스며들어 오게 함으로써 문학은 우리를 대단히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서술은 그 자체를 위해서 예술적인 묘사로 발전하는 가운데 아주 특출한 방식으로 세계를 개방적이고 사심 없이 파악하도록 하는 기관이다. 그러나 우리는 헝클어진 편물에서 한 가닥의 실을 뽑아내듯 단지 미세한 부분만 살펴보았으므로 서술의 한계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서술은 제시되는 대상의 표면에 밀착되어 있고 세계가 그 자체로부터 스스로를 나타내듯이 그렇게 세계를 보도록 할 뿐이다. 세계는 완전히 암흑과 은폐되어 있는 배경으로 싸여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언제나 되풀이해서 불안하게 그리고 위협적으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세계로 밀어닥친다. 인간은 그러한 빈틈이나 허구를 적당한 수단을 이용하여 막으려고 시도해야만 한다. 이 수단은 바로 설명(Erklarung)이며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미 알려져 있는 것으로 환원시킴으로써 해결책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과학에서 실험적으로 설정된 설명 근거를 가설(Hypoghese)이라 부른다. 가설은 검증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렇게 우리가 실험적으로 설정된 설명 시도의 임의성을 의식하고 있는 한 우리는 한정적으로 오직 작업의 가설에 관해서만 언급할 수 있다.
가설은 여기서 수수께끼 같은 관찰을 이해하게 하는 근거를 제시하여 준다. 이러한 것은 필연적으로 가설이 증명될 수 있게 한다는 사실로 충분하다. 특히 가설을 확신했던 한 가지 예는 화학에서 원자의 존재를 가정했던 일일 것이다. 원자들은 항상 일정한 무게 관계(원자량)에 따라서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주의 깊은 관찰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관찰된 현상 이면의 은폐된 근거를 탐구할 수 없다는 뉴턴의 입장이 전적으로 의미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원자에 대한 가정은 화학의 광범위한 경험 영역을 간단한 방식으로 직시할 수 있도록 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원자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는 근본적으로 획득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탕은 완전히 다른 측면에서 올 수도 있으며 가설이 설정되어 있는 현재에는 아직 전혀 예견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트(S. Freud)는 자신의 저서인 <<해학과 무의식에 대한 관계>>에서 기계론이 정신 분석에서 병적이고 영적인 과정으로 연구된 것처럼 해학에서도 그와 동일한 무의식적인 기계론이 작용한다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추론적이라 할 수 있다. 만일 결론이 도출된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생소한, 특히 사고에서 새로운 종류의 영역에 도달한다면 이때의 결론을 하나의 ‘가설’이라고 부르지만 가설이 추론되어 나온 자료와 가설의 관계를 정당한 증명으로서 타당하다할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똑같은 가설에 이를 수 있을 때 마침내 가설은 ‘증명되어진 것’으로서 타당할 것이다.” 가설은 추론적인 설명의 토대이다. 그러나 가설은 그 자체로서는 증명될 수 없는 것이며 만일 증명되어야 한다면 다른 방법으로서 달성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한계는 항상 남겨져 있다. 본질적인 사실은 이론이 가설과 마찬가지로 가정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이론은 이처럼 체계적으로 전개된 가설이며 그 자체로서 가설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과학에서 선취적인 가설의 기능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경험 과학, 예를 들어 물리학의 일상적인 작업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작업은 먼저 탐구할 수 있는 사건을 관찰하고 서술하는 데에서나 적절한 탐구 규정의 도움으로 측정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만일 우리가 눈을 뜨고 있다면 찾아낼 수 있는 크고 작은 종류의 새로운 발견들, 이것은 찾음(Suchen)과 연구함(Forschen) 그리고 찾아냄(Finden)의 영역이다. 둘째 새로운 현상 영역을 밝히기 위한 필연적인 체계적 관찰과 탐구 그리고 측량 등, 이러한 사실들은 방법적 서술의 영역으로서 요약 될 수 있다. 셋째 현상의 이해를 돕는 설명, 이것은 어떤 현상들을 이미 알고 있는 다른 현상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일어난다. 넷째 설명이 불가능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가설. 이는 바로 구성적 이론의 장소가 된다.
한층 더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더 긴박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 정신과학의 영역에 대한 관계이다. 정신과학도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가설이 설정, 검증 혹은 반증된다. 그러므로 정신과학에 있어서 가설의 역할을 바르게 규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無)규정적인 것에서부터 규정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진행이며 이것은 방법적으로 아주 다른 수행 방식을 요구한다. 우리는 차후에 검증해야 하는 해석을 미리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연구하는 가운데 해석이 마치 안개 속에서 일정한 형태가 보이듯이 서서히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우리는 이해 속에 내포되어 있는 선취의 완벽한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설은 아직 머뭇거리며 찾고 있는 즉 아직 개방되어 있는 미래에 대한 선취를 알지 못한다. 가설이 설정되면 가설은 이미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는 것이다.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 있어 가정(Annahme)과 혐의(Verdacht), 간주(Unterstellung), 추측(Vermutung), 예감(Ahnung), 기대(Erwartung), 이러한 개념들은 종종 서로 구별되지 않고 쓰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여러 가지 다른 어휘 의미의 범위를 가능한 한 완벽하게 논구 분석하도록 시도해야 하며, 심지어 그 구별까지도 일상 언어 사용에서 대체로 통용되고 있는 경우 이상으로 자세하게 밝혀내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사상적인 명확성의 수단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그러한 연관성을 좀더 심오하게 이해하는 수단이다.
은폐된 심연은 “밑에 놓여 있는 것”으로 이미 밝혀진 것처럼 가설에는 표면과 이면의 구별이 들어 있다. 그러한 구별은 심연에까지 이른다. “밑에 놓여 있음”은 존재론적 의미에서 어떤 “심연의 층”(Tiefenschicht)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법칙에 이르는 이행을 의미하며, 특히 보편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보편화는 현상의 “이면”에로 들어가려 하지 않고 오직 현상 자체만을 “서술”하고자 한다.
존재론적으로 좀더 깊은 지층(地層)은 동시에 발생학적으로 더 이전의 지층이다. 우리는 현재적인 것을 그 발생에서부터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충분히 뒤로 물러난다면 우리는 동시에 존재론적으로 더욱 심오한 지층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주저하면서도 언제나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해명하고자 하는 신비로운 근원적 근거이다.
결론
생산과 소비가 끝없이 반복되며 팽창하는 현 세계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무의미하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인간이 그동안 탐구한 진리에 얼마나 선행하면서 또한 얼마나 진리에 역행하였는가를 살펴보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는 것은 상호 소통하는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이 아닐 수 없다.
삶의 근거 자체의 깊이는 해명 불가능한 특히 우리를 깊은 심연에 빠트리는 양면적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로 이것이 창조적인 운동에서 모든 생명이 전개되는 담지적인 근거이고 동시에 사람을 자신과 더불어 이끌어 가는 그리고 그가 올가미에서 스스로 벗어나고자 시도하여야 하는 혼란의 힘이다. 이러한 모순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해결 불가능하다. 이 양면에는 모두 정당하고 필연적이며 삶 자체에 관해 요구된, 특히 그 자체 지양 불가능한 진리를 가진 고찰 방식이 근거한다. 여기서 우리는 삶 자체의 심연에서 포기하지 하지 않고 인내로 견뎌 내어야만 하는 진리의 놀라운 양면성에 또다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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