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명은 사랑입니다
-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
20051107 김용석
서론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는 성모님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성모님께서 보여주셨던 가난, 정결, 순명 때문이 아니다. 성모님은 복음 3덕을 모두 끌어안으시고도 남을 사랑을 느끼게 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에게서도 성모님과 유사한 사랑, 즉 고통 속에서 사랑을 느끼고 사랑 하면서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오직 하느님께 맡김으로써 깊은 사랑의 체험을 이루게 된 것이다.
본론
사람들은 예수 아기의 데레사 성녀가 희망의 계시자, 포교와 신뢰의 성녀, 겸손의 완전한 본보기, 영적 어린이의 길의 교사였다고 말한다. 이 사랑에는 데레사의 내적인 역동성과 생명력과 활동, 진보와 통일, 그리고 모든 것을 총괄하는 힘이 있다. 데레사가 온갖 소명을 ‘모두’ 택하면서도 “사랑이 모든 소명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외쳤을 때 강하게 느끼고 원하기까지 한 그 빛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사랑은 무한하다는 이 사실이 바로 데레사의 메시지의 놀랄만한 풍부함을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를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것, 이 사랑만이 제가 탐내는 보물이라는 것을 저는 너무나 잘 압니다.”라고 데레사는 당신께로 가서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사랑임을 일찌감치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데레사는 죽기 전까지 이 확신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부자유스럽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희생을 매일 바쳐야 하는 수도 생활이 그대로 제 눈앞에 선하게 나타났습니다. 또 자기 일에만 급급하고 자신의 소명의 숭고한 목적을 잊어버리기 쉽다는 것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훗날에 갈멜에 갇혀서 별이 반짝이는 한 조각의 하늘밖에는 볼 수 없게 될 시련의 때가 오면 오늘 보았던 것을 기억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은 제게 용기를 북돋워 줄 것이며, 제가 오로지 사랑하고 싶은 하느님의 크심과 권능을 생각해서 저의 조그만 이익은 쉽사리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데레사가 알고 있고 또 열망한 사랑의 기쁨은 다른 사람들과 이 사랑을 나누는 기쁨이 아니다. 데레사의 마음속에 있는 이웃에 대한 사랑도 전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이 넘쳐흘러 당연히 지속됨으로써 하느님의 특별한 이 사랑과 일체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열성, 다른 모든 사람들을 이끌어 갈 열성 즉, 무엇보다도 하느님 당신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갈망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분을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려면 고통을 견디고 많은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이 데레사 생활의 중심이라면 신뢰는 그야말로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 보이는 환경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느님은 이루지 못할 원을 일으키게 하지는 못하신다.”는 신뢰는 그 분의 자비로우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지극히 약하고 참으로 무력한 중에도 신뢰하는 것에 있다.
데레사의 신뢰는 신뢰하는 사랑이라고 일컬어지듯이 독특한 빛깔을 띠는 사랑만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알아야 하겠다. 그것은 사랑의 충만에 이르는 길이다. 신뢰의 중심은 사랑이다. 이 사랑의 중심에 이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신뢰이다. 우리가 이를 수 있는 신뢰, 이 신뢰는 하느님께로 우리를 들어올리실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우심에 대한 신뢰이다. “제가 얼마나 약하고 불완전했는가. 그리고 수도 생활을 7년이나 했지만 여전히 그대로인 것을 생각하면 이 소원은 무모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항상 위대한 성녀가 되겠다는 한결같이 대담한 신뢰를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 공로도 없으니까 저의 공로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오직 덕과 거룩함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 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저의 약한 노력을 만족히 여기시어 저를 당신께로 까지 끌어올리시고, 당신의 무한한 공로로 저를 덮어 주셔서 성녀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신뢰는 하느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특출한 의식,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절대적인 확신, 필연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간 신념 바로 그것이다.
데레사 성녀는 모범으로 삼을 만한 탁월한 성녀로 일컬어진다. 이 성녀의 사랑에서 비범한 것은 전혀 없다. 성녀는 ‘작은 영혼들’이 실행할 수 있다는 점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이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무례한 언동을 한 뒤에 용서를 청하러 와서 당신의 팔에 안기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이 기뻐 설레이십니다. 예수님은 방탕한 아들의 아버지가 하인들에게 한 말을 천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먹고 즐기자.’ 아, 예수님의 어지심과 자비로우신 사랑은 너무도 알려져 있지 않아요. …사실, 이 보물을 갖기 위해선 겸손해지고 자신의 허무를 인정해야 합니다. 많은 영혼들이 하기 실어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자식으로서 자신의 잘못을 사랑의 불덩어리 속에 내어 던져 태워 버릴 때 그 잘못은 영원히 소멸된다고 확신한다면 이 사랑의 힘은 분명히 믿어야 함에 틀림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가난함과 약함을 깨달은 이상 하느님께 무엇을 더 드릴 수 있겠는가? “현세의 삶이 끝날 때, 저는 빈손으로 당신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아, 행복한 그날부터 사랑이 제 안에 스며들고 저를 에워싸는 것 같고, 매순간 자비로운 이 사랑은 저를 새롭게 하고 영혼을 깨끗이 하여 아무런 죄의 흔적도 남겨 놓지 않는 것 같아서… 저는 연옥을 두려워 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지극히 경탄할 만한 것이다. 지체하는 일이 없는 사랑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언제나 새롭고 끊임없이 정화되어, 우리가 생활을 계속해 가면서 우리의 근원이신 주님께로 되돌아감에 따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관대하게 부어 주시는 생명과 용서의 용솟음에 완전히 사로잡힌다. 데레사가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해도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는 방탕한 아들을 그분께서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알고 있는 까닭이다.
사랑이 데레사의 가르침과 생활의 중심이라는 것이 명백하다면, 성녀에게서 사랑의 충만함으로 이르는 길 역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로우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길이며, 동시에 성녀의 철저한 가난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게 해서, 믿음과 위탁은 가장 넓혀진 가장 단순한 길이다. “예수님을 모욕하는 것, 그분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믿음의 부족입니다.” 데레사에 의하면 잘못은 단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다. 즉 믿음의 부족이다.
콘라드 드 메스테르의「빈손」이라는 작은 책은 데레사의 믿음에 관해 연구한 뛰어난 책으로 데레사의 믿음을 ‘빈손’이라는 한마디로 압축하였다. 이 책에서는 데레사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모욕시킬까봐 두려워했다고 말한다. 이 두려움은 “차츰차츰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바뀌게 될 것이다. …데레사는 틀림없이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 삶의 중심임을 발견할 것이다. 즉 하느님의 자비는 작은 사람을 위해 거기에 있다는 것을, 그가 작기 때문에 그를 위해 거기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작은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여 이 자비에 온전히 내맡기는 사람에게는 그 자비가 얼마나 큰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로 겸손하다는 의미 외에 여러 뜻을 갖는 작음이라는 상징은 이후로부터는 주로 신뢰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하느님의 경외심과 다를 바 없는 두려움, 즉 사건들과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있지 않은가? 또 자신으로서 갖는 두려움도 있지 않는가? 라고 물을 수 있겠다. 하지만 데레사는 이와 반대로 주장하고 있다. “사랑의 길을 달리고 있는 우리는 미래에 생길 수 있는 고통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신뢰 부족이고, 없는 것을 만들어 내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하느님을 두려워함으로써 하느님을 부인하여 하느님을 지레 짐작하는 식으로 상상 속에서 미래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나약한 이 존재를 낙담시킬 수 없을 것이다. “바람도 비도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어두운 구름이 사랑의 태양을 가린다 해도, 이 작은 새는 자리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이 새는 구름 저편에 그의 태양이 변함없이 빛나고 있음을 알고 그 빛이 잠시도 사라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데레사는 그 점을 단언했다. 작고 가난한 것으로 충분하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분께서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제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한 데레사는 “자기 겉옷을 포기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 자신의 마지막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노예, 하녀로 여기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데레사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을 조금도 찾지 않으려고 많은 주의를 했다. “예수여, 당신께서 전부가 되어 주소서. 예수께서 전부가 되소서. 그리고 저는 무(無)가 되게 하소서. 예수께서 알려지시고 사랑받으시도록 나를 잊어야 하며 또 잊혀져야 한다.”라며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만을 위해서, 특히 기도 중에 자기 자신을 잊으려는 고심은 가장 섬세하고 가장 은밀한 형태를 띠게 된다.
육신이 병으로 파괴되는 동안 마음을 짓이기던 믿음에 대해 내적인 치열한 투쟁을 하면서 데레사는 괴로워했을까? 아니다. 그때에도 데레사는 ‘죄인들의 식탁에서 먹을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경스런 말이 튀어나오는 이 지옥에서 사랑의 활동이 솟아나오도록 이곳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같은 열정으로 혼자 중얼거렸던 것이다. 데레사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미친 것이라고 할 것임을 잘 알았다. 그러나 미친 듯한 참된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가. 데레사는 다른 곳에서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사랑할 때면 미친 듯이 엄청난 이 사랑을 말하고 싶은 욕구를 느낌니다.” 데레사는 지옥에서 고통을 겪을 것에 대해선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이 사랑이 상상적인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녀 마음의 움직임은 그렇지 않았다. 사랑에 바치는 데레사의 봉헌물은 하느님께서 전부가 되시어 그녀 안에서 모든 것을 태워 버리실 수 있는 순수한 자기 망각인 것이다. 그렇다 자신의 참모습을 알려고 더듬으면서 첫발을 내딛지만, 차츰차츰 거리낌 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일치로써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려는 단 하나의 원의만이 사랑에 담겨 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은 은총이다.
“그분의 뜻이라면 제가 걷고 있는 어두운 길을 일생 동안 걷겠습니다. 언젠가 사랑의 산 끝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좋겠지만, 이 세상에서는 아닐 것 같습니다. …제 약혼자는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저보다 그분을 더 사랑한다는 말을 제외하고는 저도 그분께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실이란 것을 마음속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보다도 그분을 더욱더 따르기 때문입니다. …저의 극기는 제 마음대로 하고 싶은 생각을 꺾고 언제나 남을 도와줄 준비를 하며 대꾸를 하지 않고 남몰래 작은 일을 해주고, 앉을 때 등을 기대지 않는 등 여러 가지였습니다. 이런 하찮은 일을 하는 것으로 저는 예수님의 약혼자가 될 준비를 하였습니다.”
사랑하며 고통을 겪는 다는 것, 사랑하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는다는 것, 더 잘 사랑하기 위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 모든 사람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 언젠가는 경험한다. 그리하여 참으로 고되고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데레사는 사랑하며 고통을 겪는 것이 행복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행복이라고 단언한다. 데레사는 죽기 전에 열변을 토했다. “사랑하며 고통을 겪는 것은 가장 순수한 행복입니다.” 데레사의 마지막 시 속에 이런 진주가 박혀 있다. 몇몇 단어를 제외하면 그 당시 자신을 괴롭혔던 것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지만, 데레사에게 있어서 사도신경이라고 말할 수조차 있는 이 시를 성모님에게 헌정하고 싶어 했다. “천국의 임금님께서는 당신 어머니께서 어둠 속에, 마음의 고뇌 속에 잠겨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여, 지상에서 고통을 겪는 것은 은혜겠지요? 그렇습니다. 사랑하며 고통을 겪는 것은 가장 순수한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제게 주신 모든 것을 도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저 때문에 거북하게 생각하지 마시라고 해 주세요. …그분께서 숨으실지라도 저는 그분을 기다릴 것입니다. 저의 믿음이 소멸될 일몰 없는 그날까지….”
“저는 지상에서 행복과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고통 안에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세상에서 숱한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영혼들에게 알려야만 할 것입니다. …기쁨과 열정은 제 영혼의 밑바닥에만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제가 몹시 고생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러한 말들은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데레사가 삶의 마지막 주간에 겪은 육체적 고통, 그 고통의 절정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데레사는 그 고통이 너무도 심해서 자살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고통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데레사는 쓰디쓴 약이 든 컵을 가리키며 “저의 생애는 쓴 것이 아니었어요. 저는 온갖 쓴맛을 기쁨과 단맛으로 만들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 저를 위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오, 드디어 저는 다시는 고통을 겪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괴로움은 제게 달콤하기 때문이지요.”
어린 데레사는 세상의 많은 것들의 허무함과 그들의 일시적이고 덧없는 특징을 이해했다. 동시에 예외적인 환경과 교육으로 배양된 그녀의 믿음은 지극히 탁월한 것이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하늘 쪽으로 방향을 완전히 돌려 살았다. 데레사는 내세를 향한 투명한 이 시선을 오래 간직한 것이다. “영원한 것만이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데레사는 고통을 겪는 것 이상으로 사랑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데레사는 “전적으로, 자기를 찾지 않고 후회 없이, 자연스럽게” 사랑하였다. 데레사는 사랑의 달콤함을 느끼지 않고 변치 않는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사랑했다고 부연할 수 있겠다. 데레사는 근근히 십자가를 지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사랑하였다. 데레사는 인간에게 가장 흔한 고통을 사랑으로 변모시켰다. 우리도 데레사처럼 온갖 고통 속에서도 거리낌 없이, 경계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에 바칠 수 있기를 바란다.
“만일에라도 당신께서 저보다 더 약하고 작은 영혼을 만나시기라도 한다면, 그 영혼이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우심을 굳게 믿어 자신을 온전히 내맡긴 다면, 당신은 이보다도 더 큰 은혜를 넘쳐흐르도록 그에게 즐겨 내려 주실 것같이 생각됩니다.”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성모님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론
끝으로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모습으로 까지 끌어 올릴 수 있는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메시지인 사랑에 관한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자 한다. “저는 지상에서 행복과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고통 안에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세상에서 숱한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영혼들에게 알려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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