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야기

이성과 계시의 조화

jasunthoma 2012. 1. 19. 13:27

이성과 계시의 조화

20051107 김용석

서론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다. 이성은 사물을 올바로 판단하도록 도와주고 식별하도록 도와주는 힘이다. 그러나 이성을 가진 인간의 힘만으로는 알 수 없는 영역(神)이 있다. 일반적으로 계시(啓示)는 인간의 자연적인 경험이나 인식으로는 불가능한 종교적 진리를 신(하느님)스스로가 자기를 열어 보임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의지 혹은 가르침을 알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과 계시의 조화는 근원적인 차원에서 신(하느님)안으로 나아가는 인간을 가엽게 여기시고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으로 인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본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들은 성서의 권위를 힘입어서만 말하려 하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의 이성(rato)의 바탕 위에서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말하고저 한다(신국론, 19권 1장).’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성서만이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세계, 인간 및 신을 에워싼 커다란 문제들을 순수한 이성의 힘만으로써 다뤄나가는 철학은, 이 시대에 있어서는 종교적인 신앙과 결합돼 있었고, 또 종교적인 신앙은 철학과 결합돼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과는 대조적(對照的)으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전능(全能)한 ‘창조주’로서의 신(神)이 무(無)로부터 이 세계(世界)를 자기의사에 따라서 창조하였다고 보는 까닭에 신을 제외(除外)한 그 밖의 일절(一切)의 것은 피조물(被造物)이며 동시에 인간도 역시 피조물의 경지(境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나 모든 피조물은 오직 신에 의하여, 그리고 신을 위하여 존재할 뿐이므로, 결국 신적의지의 소산으로서의 인간은 창조주가 스스로의 신적언어(神的言語)를 통하여 ‘계시(啓示)’한 바로 그 창조주의 의사(意思)에 따라서 행동할 것만을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로써 말한다면 사람은 무엇인가를 의심하는 한 진리를 의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자의식에 있어서의 확실성(確實性)과 더불어 진리라는 개념(槪念)이 주어진다. 즉 자기인식의 확실성은 진리자체의 확실성인 것이다. 모든 참다운 것을 가능케 하는 진리자체란 참다운 모든 것에 자기 자신을 현시(顯示)하면서도 그 자신은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존립(存立)하는 객관적인 초월자(超越者)로 생각되는 한 그 진리는 곧 신(神)이 아닐 수 없다.

만약에 자연적인 사고와 초자연적인 계시가 정말로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 이들에게 공통적인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감춰진 대립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거듭해서 드러나는 법이다. 이런 문제 전체가, 신은 초월적이나 창조주로서 피조물들 안에서 인식될 수 있다고 하는 학설이나, 인간의 영혼은 비물질적이나 육체의 형상이라고 하는 학설이나, 인간은 세계의 보편적인 인간관계의 지배를 받으나 그 의지는 자유로와야 한다고 하는 학설 등이다. 이런 곳에서는 항상 이원론이 드러나지만, 다른 한 가지는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런 정신의 방법론에는 사태의 보다 심각한 문제점들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신앙과 지식 사이에, 논리적-인식론적으로는 아무런 원칙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앙과 지식을 확연히 구별짓는 일은, 교부철학 전체와 아우구스티누스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H. 마이어).’ 오직 정도에 따라서는, 마치 완전한 것과 불완전한 것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단절(斷絶)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여하튼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식과 신앙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것을 물은 다음,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원래에는 신앙이 앞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우리들이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언젠가는 인식하도록, 우리들의 마음이 준비하게끔 해 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이성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한에 있어서는, 사고가 신앙을 약간 앞선다(guantulacumgue ratio). 그리고 만약에 우리들이 생각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nisi rationales animas haberemus), 신앙을 할 수 없으리라는 점에서도, 사고가 앞선다.’ 이러한 생각의 결과로 한편으로는 계시된 신앙의 우월성이 보장됨과 동시에, 다른 편으로는 앞으로 태어날 신앙에 관한 학문의 가능성이 열려 있게도 되었다. 내적인 인간은 아직 지식의 합리적인 면과 신앙의 비합리적인 면으로 나눠져 있지를 않다. 여기서는 아직도 ‘동의할 때에 인식한다(cum assensu cogitare)라고 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과 같이, 신앙이 곧 사고다. 그러나 이런 사고는 다른 샘에서 길어낸 사고다.

생각건대 신은 물체가 아니기에 사물의 기억(記憶)으로서 존재할 수는 없다. 또 신은 우리의 정신과 같은 영체(靈體)이기는 하나, 양자(兩者)는 전혀 동일한 것이 아니기에 우리 자신의 기억으로서 존재할 수도 없다. 더욱이나 우리가 신을 인식할 때까지는 이를 다른 것과 같이 상기(想起)될 성질의 것이 못된다. 이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무의식중에 현전(現前)하는 신을 주장함과 더불어 기억은 의식(意識)을 넘어선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영성(領城)에까지 확대된다. 나의 기억은 나의 기억인 동시에 나 아닌 것의 기억이기에 우리는 거기서 나 아닌 것과 만나는 것이다. 신은 확실히 나의 영혼에 현전하고 있으나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물을 기억 속 깊숙이 가지고 있어 때로는 사라지고 때로는 다시 나타나는 식으로 기억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신을 기억 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신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이 아니고 실은 우리가 신속에 있기 때문에 성립되는 사태(事態)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속에 있으면서 신을 알아낸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 속 깊은 곳에 되돌아감으로써 거기에서 알아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영혼의 형이상학적 배경(背景)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기억이란 바로 이런 것이기에 거기서 신의 빛에 조명되어서 모든 진리가 우리 영혼 속에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을 상기(想起)한다는 것은 과거(過去)의 표상(表象)을 재인(再認)하는 식의 것이 아니고 그 상주적(常住的) 현전(現前)에 우리의 주의(注意)를 집중시키는 일이다. 우리는 눈이 그것을 피할 때에도 여전히 언제나 우리들을 비추는 그 사라지지 않는 빛에로 향하는 일이다. 그러기에 영혼에 있어서의 신의 기억이란 만물에 있어서의 신의 편재(遍在)의 한 특수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은 만물과 함께 있는 것이지만 이 신의 현전(現前)을 스스로 파악할 수 있는 것, 즉 알아내는 자는 천지간 만물 중에 인간을 빼고는 없기 때문이다. 실로 인간만이 지적으로 하고자 원함으로써 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두 가지의 실체가 녹아 붙어서 이룩된 하나의 새로운 실체(unio substantialis)인 것은 아니다.(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통일은 영혼이 육체를 소유하고 이용하고 지배하는 데에 성립된다. ‘영혼은 신체를 지배하도록 이성이 주어져 있는 일종의 실체다(영혼의 크기, 13권 22장).’ 그래서 인간은 본래적으로는 영혼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육체는 인간에게 있어서 (영혼과) 동등한 뜻을 지닌 구성요소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죽어버릴 이세상의 육체를 사용하는 이성적인 영혼이다(교회의관습, XXVII,52).’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이 신체의 한 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감각적인 긴장’과 마찬가지로 전신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때 우리들은 다시 스토아학파의 ‘토노스(τονος)’라는 용어를 기억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심리학의 본래적인 입장에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교부들의 일반적인 플라톤주의이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라고 하는 오리게네스에게는 아직도 남아있는 플라톤주의의 비관적인 색채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앞서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거부하기는 하나, 인간을 본질적으로는 영혼이라고 보는 이 시대에 이룩된 관찰은 계속 남아 있게 되며 또 이런 관찰은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인간전체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태도의 공통적인 것으로 되고 만다.

여기서 마침내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를 인간정신의 산물(産物)로 간주하려는 온갖 철학과, 그리고 오직 인간의 내심에 몰입(沒入)하는 것만으로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일절(一切)의 시도(試圖)를 뿌리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즉 인식대상이란 결코 인식행위에 의해서 조성(造成)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사유(思惟)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존립하는 하나의 현실인, 다름아닌 신(神)의 질서와 현실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결국 그는 삼위일체(三位一體)로서의 신의 본질론이라고 하는 그 나름의 독특한 지론(持論)을 펴나가게 되었는바, 이와같이 하여 그는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시켜 왔던 오리게네스나 아리우스 류(類)의 시도(試圖)를 삼위일체론에서 완전히 봉쇄하여 버렸다. ‘신적실체’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삼자적 위격체내에 존재하며 동시에 그 신적 실체는 이 모든 위격 속에 마다 완전히 현현(顯現)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성(悟性)의 힘으로는 좀처럼 파악하기 힘든 교의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영혼을 예(例)로 들어서 다음과 같이 비유(比喩)하고 있다. 즉 존재와 생명과 인식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영혼이 하나의 통일적 본질을 형성하듯이 역시 이것은 하나의 불가사의한 신적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결코 단순한 비교일 수만은 없는 이유는 인간이란 곧 신상(神像)과 동일하게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선은 최고의 사랑이요, 도덕의 중심 이념은 지고(至高), 지존(至尊), 지상자(至上者)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기에 이 사랑을 일반적인 사랑(amor)과 특히 구별하여 ‘애덕’(charitas)라고 칭한다. 애덕이란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는 사랑이다. 이 같은 애덕은 지상자인 신(神)에게로 향할 때만 가능하다. 신이 인격적으로 생각되기에 이 사랑도 인격적이다. 사람은 물건(物件)을 사랑하는 것처럼 인격을 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물건을 사랑하는 것은 그 자체를 위하는 것 밖에 안 되나, 인격에 대하는 애덕은 그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그것이 곧 사람을 사랑하되 신(神)을 위하여 사랑한다는 본뜻이다. 성서에서는 ‘제 몸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에 앞서서 사람은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신(神)을 사랑할 것을 명하고 있다. 여기에 신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두 가지 사랑이 아니고 한 가지 사랑인 것이니, 신(神)을 사랑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완수할 수가 있는 까닭이다. 거듭 말한다면 둘째 계명이 말하는 ‘이웃 사랑’이란 자기나 남이나 동등하게 사랑하게 됨으로써 자타(自他)가 함께 신 안에서 더불어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남을 자기와 같이 동등하게 하는 것, 자기와 같이 남을 사랑함으로써 자타를 벗어난 사랑 즉 자애와 타애를 분별하지 않고 양자를 넘어선 사랑의 경지에 도달할 때 자타는 동일한 평면에서 신(神)에 속하는 것이다. 이 마당에 사는 것은 벌써 나의 사랑(自愛)만도 아니고 남의사랑(他愛)만도 아닌 온전한 신의 사랑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영혼을 다루고 있는 곳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영혼이 정말로 하나의 실체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영혼이 실체라고 하는 것을 자아의식(自我意識, Ichbewubtsein)을 분석함으로써 근거지우는데 이 분석은 자아(나)가 실제로 있다는 것(실재성實在性), 자아가 독립해 있다는 것(자존성自存性), 및 자아가 계속해서 있다는 것(지속성持續性) 등의 세가지 점을 밝혀낸다. 즉 자아는 자아의 작용과 다른 어떤 것이다. 자아가 작용을 소유하고 있으며, 자아는 이 작용 자체도 아니며, 또 작용의 총화도 아니다. 오히려 자아는 작용할 때에 움직이는 원리 및 작용을 지도하는 원리로서 작용을 넘어서 있다. 「기억과 사고하는 힘 및 사랑이라는 이 세 가지는 나에게 속해 있으며,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하나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한다. 오히려 내가 작용을 통해 활동한다. 요컨대 나는 기억을 통해서 생각해내는 자다. 나는 지성을 통해 생각하는 자다. 나는 사랑을 통해 사랑을 하는 자다. 즉 나는 기억이 아니며, 이성이 아니며, 사랑이 아니라, 내가 이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삼위일체론, XV,22,42).」

결론

“자연적인 사고와 초자연적인 계시가 정말로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 이들에게 공통적인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본론에서의 물음은 이성과 계시가 전혀 어울리지 않다라는 물음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성)은 하느님(계시)의 현존을 체험하는 장소이나 인간의 본성(이성) 속에 하느님(계시)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포함한다는 의미라기보다 상호 소통하고 교류하는 차원에서 이성과 계시는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