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읽고
마리아론/ 연구2년/ 20109101/ 김용석(손자선토마스)
들어가는 말
현대의 과학 문명을 살아가면서 신앙인이 당면하게 되는 안타까움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기쁨의 상실일 것이다. 상실감은 사람을 만나도 기쁘지 않게 하고, 일을 해도 기쁘지 않게 하고, 기도를 드려도 기쁘지 않게 하고, 심지어는 웃어도 기쁘지 않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실감은 내 것인 그 무엇이 나로부터 빠져 나갔다고 생각할 때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이러한 상실감을 회복하는 일은 아주 중대하게 체감된다. 그것은 전문화 된 세상에서 살면서 자신이 접근해야 할 부분과 근접할 수 없는 부분이 명확히 구분되어진 사회구조가 나만의 도성을 쌓아 올려놓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타인과의 관계를 냉소적으로 변질시켜 놓을 때 이러한 상실감은 더욱 증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상실감을 회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상실감을 기쁨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칼 라너의『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본론요약
칼 라너는 마리아에 관한 접근에 있어서 그의 방대한 교의적인 지평위에서 풀어나가기에 다소 생소한 내용이 있을 것이라고 제언에 붙이며 간단한 윤곽을 제시하며 본문을 시작한다. 먼저 신학에서의 마리아에 관하여 칼 라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 어머니’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마리아는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접근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음을 직시한다. 또한 성인 공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에 관하여 마리아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이 글의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도록 서술하고 있다.
첫 번째는 교의에 관하여 짚어본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자기 자신의 교의를 가지고 있다. 마리아의 신적 구원 경륜에 관하여 하느님 아들이 마리아에게서 받은 인간적 본성과 실체적 합일을 하기 때문에 마리아는 참으로 “주님의 어머니”며(루카 1,42), 하느님의 어머니이다(에페소공의회, 431년). 남자의 도움 없이 하느님의 아들을 수태했다(마태 1,18; 루카 1,34-35, 탄생 전의 동정성). 출산시의 고통에서 면제되었다(창세 3,17에 따른 고통). 교회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탄생 후에도 언제까지나 동정녀였음을 고백한다(553년 제5차 공의회).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교회는 완전히 구원된 마리아가 이미 육체와 영혼의 완전한 완성에 도달했음을 선언한다(마리아의 승천, 1950년 11월 1일 비오9세). 두 번째는 성경의 증언을 찾는데 그 자료가 부족함을 느낀다(루카 1-2; 마태 1-2; 요한 2,1-2; 마르 3,31-35; 요한 19,25-27; 사도 1,14). 성경에서는 마리아가 다윗의 후예, 즈카리야와 엘리사벳이라는 사제 가문과 친척, 나자렛의 요셉과 약혼과 결혼, 가브리엘 천사의 알림, 수태와 출산, 예수님의 유아 시절의 사건, 나자렛으로 귀환, 종교적 실천(성전에 봉헌, 아이의 할례, 성전 순례), 노동과 가난한 생활, 하느님의 결정을 기쁘게 수용,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예수님이 바라는 대로 신앙의 모범적 태도, 십자가 아래 계심,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기도, 이 들을 제외한 다음의 마리아의 생애와 죽음에 관해서는 역사적으로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세 번째는 모든 세대에 의해 복되신 자라 일컬어지는(루카 1,48) 마리아에 관한 공경이다.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에 관한 특별한 공경은 결코 흠숭이 아니고 상경지례(上敬之禮)이다. 마리아에 관한 이 공경은 여러 가지 축일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신학에서의 마리아에 관하여 칼 라너는 가톨릭 신자는 무엇보다 성서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관하여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교회의 신앙과 교도권의 규범이요 표준이기 때문이다.
신학자는 하느님에 관한 것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마리아는 인간 자체에 대한 신학, 인간 자체에 대하여 하나인 영원한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의 가장자리에서가 아니라 그 안에 포함시켜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신앙 고백의 중심에 있다. 인간에 대한 교의가 없이는 하느님에 대한 교의도 없고 인간학 없이는 신학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한 위격 안에 하느님이요 사람이신 하느님, 우리 사이에 계시는 인간 존재로 알지 못하면, 하느님에 대하여 참되고 진정하고 구체적인 어떤 것도 말할 수 없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우리 주님의 어머니, 복된 동정 어머니에 관한 신앙의 가르침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다.
마리아의 기본 개념에 관하여 서술함에 있어서 칼 라너는 신적 모성에 관한 복된 동정녀의 성격과 역할에 대해서 여러 다양한 주장을 열거한다. 신적 모성은 마리아에 관한 교의 가운데 결정적인 진리라는 학자들이 있음을 소개한다. 이어서 신적 모성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주장을 견지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요약하면서 간단한 양식으로 복된 동정녀의 특징적 구실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학자들에 일침하며 부분적인 접근에서보다 전체로서의 마리아학의 신학구조를 제시하는 차원에서 가장 광범위한 일반적인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완전한 그리스도교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마리아가 그 현실적 실현이고 완전한 그리스도 신자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완전한 형태의 그리스도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영원한 삼위 하느님의 구원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일이라면 마리아는 자기 정신의 신앙과 자기의 복된 태 안에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즉 자기 존재의 모든 힘으로 아버지의 영원한 말씀을 받아들인 까닭에 완전한 그리스도 신자요 그리스도다운 모범적인 인간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렇게 비추어 볼 때, 마리아는 분명 완전한 그리스도 신자이고, 가장 완전한 형태의 구원 자체가 실제로 의미하는 현실적이고 전형적 표현이다. 그렇게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일의 가장 완전한 본보기는 신적 모성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가장 완전한 방법으로 구원되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 신적 아들의 구원업적의 가장 멋있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칼 라너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관한 포괄적인 관념을 모색한 다음 예수 그리스도의 연결선상에서 동정녀의 죄없는 잉태를 소개한다.
복된 동정 마리아의 죄없는 잉태는 예수님의 처녀 수태와는 다르다. 그것은 마리아가 다른 인간 존재들의 잉태와 물리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복된 동정 마리아의 죄없는 잉태는 마리아가 존재하는 첫 순간부터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으로 인하여, 즉 마리아의 아드님이 이루어 놓은 구속을 힘입어 성화 은총으로 하느님에 의하여 꾸며졌음을 단순하게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복된 동정 마리아의 죄없는 잉태는 단순하게 마리아가 존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신적 은총의 생명을 소유하였고, 하느님의 선행하는 은총에 의하여, 마리아가 공덕 없이 받은 은총의 생명을 소유했다는 데서 성립한다(1854년 비오 9세의 무염시태 교의). 복된 동정 마리아의 죄없는 잉태는 하느님이 인류를 그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계시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완성을 향한 계획은 전체성 안에서 가장 먼저 마리아에게 적용된 것이다. 그래서 죄없는 잉태는 하느님의 부름이 가장 개인적인 것에로의 부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동정 마리아에 관하여,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 관하여 칼 라너는 말하고 있다. 즉 교회의 믿음에 따라서 처음부터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임을 확실히 고백하는 전통을 고찰 한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은 복된 동정녀의 존재 시작에서부터 천사가 소식을 전한 날까지 마리아 생애의 과정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구세주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심과, 인성과 신성이라는 본성의 이원성에도 불구하고 그 신적 위격의 단일성에 의거한 교회의 믿음과 정신 안에서 처음부터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신(神)인간의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임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 신비에 관하여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음은 충격적이다. 루카는 일차적으로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관점에서부터 복된 동정 마리아의 위대하심과 중요성을 살피지 않는다. 그는 복된 동정녀가 신앙 안에서 순명의 동의를 통하여 여인들 중에 복된 자가 되심을 보여 줄 뿐이다.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전능은 역사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대화가 생겨난 것이다. 이 대화는 본래 개방되어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마지막을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우리 한 여종이 천사의 소식에 무릎을 굻고, 자기 마음의 자유와 무조건적인 자기 봉헌으로 “주님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하고 말하였기에 최종적인 완성에로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복된 동정 마리아의 신적 모성은 은총일 뿐이고, 내적으로 구원의 역사에 속하기에, 그 모성은 마리아에게 우리와 실제적인 관계를 형성시켜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어머니께 신적모성에 관하여 몇 가지 고백을 천명하고 교회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는데 칼 라너는 예수님의 어머니의 동정성을 부각시킨다.
초대 교회 때부터 전해온 사도신경은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시어(ex maria virgine)’라는 말로써 마리아의 신적 모성에 대한 믿음을 천명하였다. 교회는 항상 마리아가 지상 아버지의 협력 없이 자기 아들을 낳았고, 예수님을 낳은 후에도 동정으로 지냈음을 교회신앙 일부로서 가르쳐 왔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봉헌된 동정을 본래의 이상으로 여기고, 그 원리에 따라 동정 마리아를 그러한 동정의 이상적 모범으로서 찬양하는 것은 지각없는 것이 된다. 그것은 결혼과 부부 사랑의 중대성과 의미를 경시하고, 특히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는 부부의 사랑과 그 결실성이 그리스도의 성사들 중 하나에 의하여 축성되었음을 잊어버리도록 부추기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신적 아들을 잉태하기 전에만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역시 동정이었고, 그 후에도 마찬가지로 동정이셨던 것은 마리아는 은총을 순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신적 모성의 이유로 인하여 항상 동정이었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이 동정적 태도를 단순히 정신적 태도로만 본받을 것이 아니라 정말 그의 은총으로 복을 받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결혼과 부부의 사랑을 승화시켜 복된 동정 마리아의 이 동정적 태도에 상응하는 바를 생활화하고 경험해야 할 것이다.
또한 칼 라너는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교회의 믿음으로 확인된 바있는 마리아가 항상 죄가 없었고, 원죄에서뿐 아니라 개인적인 죄에서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벗어났음을 알고 있다는 점을 제언한다.
교회의 신앙 안에서 성경의 증언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이 마리아 안에서 가장 빛나고 완전하고 포괄적인 방법으로 실현되었고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통하여 거룩한 역사 안에 발현되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의 당연한 결과로서 마리아가 죄없는 동정이어야 하고 은총이 충만한 하느님의 어머니여야 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와 마리아아의 순수함과 죄없음의 관계에서 항상 교회는 마리아를 능가할 수 없다. 마리아는 찾으러 나섰고, 초조했고, 모든 것을 알고 있지 못했고, 흐느꼈고, 길을 물어야 했으며, 자기 인생 여정의 이정표를 찾아야 했기에 교회의 모범이자 죄인들의 피난처로서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사실 교회는 마리아의 생애를 알지 못하지만, 마리아에게 준 기원, 마리아의 동정성, 마리아의 죄 없음 그리고 마리아의 거룩한 종결에 관하여 칼 라너는 관심을 기울인다.
교회는 이 거룩한 종결의 본질을 하느님 어머니에 관한 자기 신앙의 내적 요소로서 인식하고 있다. 1950년에 하느님의 동정 어머니가 지상 생활을 마친 뒤에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 영광에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교회는 마리아의 정체를 알고 있다. 마리아가 어떻게 살았는지, 구원의 신적 계획에 있어 마리아의 중요성은 무엇이었는지, 마리아가 거룩하고 위대한 역사 안에서 행한 배역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있다. 그 이유 때문에 교회는 마리아가 자기 생활의 전 실재로써 모든 그리스도 신자가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인간 생활의 한 결과와 결실로 기대하는 그 완전한 성취 안으로 들어갔음을 미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마리아는 지상 생활을 마친 뒤 영혼과 육신을 가지고 하늘의 영광에로 들려 올라갔다”고 교회가 증언한 바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칼 라너는 앞 본문에서 마리아에 관하여 교회의 관점에서 서술했음을 피력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우리가 교의적으로 믿어온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검토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중개자는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지에 관하여 질문하면서 자연스럽게 마리아에게 보여주는 신뢰와 공경에 의하여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쁘고 즐겁게 마리아를 우리의 중개자로 선언한다고 피력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성을 통하여 마리아가 중개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까지 서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기도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위하여 기도한다. 우리 중에는 누구도 아직 있지 않은 무엇을 존재케 하면서 새로이 생겨나게 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중개인이고, 서로를 위한 중개자이다. 한 개인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중요한가, 또한 어떤 모양으로 , 혹은 어느 정도로 그는 자기 형제를 위하여 은총의 중개자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각자에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있어서 축복이 될 수 있는 선물과 은총을 포함하여 당신 은총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복된 동정녀가 중개자로서 어떠한 중대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마리아 자신과 동일한 서열에 있지 않고서는 마리아에게 속하는 중개자의 임무를 규정하고 직시하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다. 마리아의 중요성은 마리아가 죽음에 의하여 최종적 영원한 영광과 완성 안으로 들어 올려진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세상역사 안에서 잠시 협력했다가 공허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우리에게 주님을 준 중개자이고, 주님 안에서 주님을 통하여 모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진심으로 마리아를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마리아는 거룩한 동정녀로서, 영원하신 말씀의 참다운 어머니로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수태한 동정녀로서, 구원받은 모든 이의 어머니로서, 하느님의 생명 안에 영원한 여인으로서, 하느님과 일치한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어머니로서, 지금도 우리 가까이 살고 있는 어머니로서 동정 마리아임을 칼 라너는 종합한다.
나가는 말
본문 요약을 통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정 성모 마리아는 과학문명 속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중대한 의미로 다가온다. 내 것과 네 것을 명확히 구분하여 잃고 얻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 현실에 가깝다고 보인다. 그러나 내어 주는 것을 기뻐하신 동정 성모 마리아와 함께 살아간다면 그 무엇을 주더라도 상실감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기쁨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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