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묵상
1. 빛은 퍼지고 뻗치고 나아가는 것이 속성이다. 그러니 복음의 빛 또한 온세상에 선포되고 전파되는 속성을 가진다고 볼여진다. 빛의 빛으로서의 복음의 빛은 그리스도론의 논거에 의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명시화한 그리스도론을 통해서 세상에 인류들은 광명에로 나아가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는 혜택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체계화하고 정의한 그리스도론의 발전이야말로 인류의 행복의 증진이요 인류 구원의 역량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2. 우주적 성부로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은 인간의 속성을 추ㅏ하셨다. 오랜 장구한 세우러로 보여지는 인류사 안에서 당신은 구세주로서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셨다. 그 인격적 속성을 원조 아담과 무관하지 않으시며 항상 우리들을 도우시어 우리 안에 계신다.
3. 모든것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계획은 분명한 창세이전의 예정이다. 성자께서는 교회를 세우시지는 않으셨으나 이미 당신 안에 교회는 빛의 형태로 존재하고 ㅣㅇㅆ었다. 그 교회가 바로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천국은 먼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한 것에 그 성령안에 성부와 하나되는 곳에 계신다. 그곳이 곧 천국인 것ㄱ이다. 구원의 신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구원의 심오한 진리란 내가 구속될 때 해방을 느끼고,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에 오를 때 세상에는 안락과 향연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일이 되는 모든 표상안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당신이 몸소 오시는 불 인식에 사건을 합당화 시키심으로 죄를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처원에로 끌어올려진 것이다.
4. 앞에서 천국이란 성령께서 임하신 모든 곳이 바로 천국임을 언급하였다. 성령은 사랑의 관계다. 즉 명사적인 개념으로는 성령의 임하심을 알 수 없다. 성령은 동사적ㅇ니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그것도 능동적인 인간의 집요한 동적 행위 안에 그저 수동적으로 내려오는,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천상적 동적 작용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부활이다. 예수님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불철주야로 뚜이어다니는 여인의 심정 가운데, 능동적인 동적 행위 가운데에 수동적으로 주님께서 현현하시는 천상적 상급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5. 하느님의 손으로 마귀를 퇴치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하늘나라는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 이 순간, 이시대에는 무슨 내용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느님의 손은 창조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있는자 바로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있는자 바로 그 자체는 만물의 근원을 의미하며 모든 것이 거기로부터 유의미한 표상으로 유래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하늼의 손은 살리시는 손이요, 생명을 주관하신는 관리의 손이요, 무너뜨리시고, 뭉개시며, 뽑아버리시는 정화의 손이심을 알게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손으로 마귀를 퇴치하시니 마귀는 마귀 그 자체에 머무르는 고정 불변의 물적 표상이 아니라 바라보는 시선의 잘못된 편견에 의해 만들어지는 대상 객체적 관점의 불평등함이 악마요, 사탄이며 마귀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쉽게 접근하자면 물자체가 아니라 물자체를 대상으로 바라보는 대상적 물자체인 것이다. 그 대상이 되는 사람도 그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아무런 하등의 잘못이 없는 존재이지만 자의적인, 자구적인 속단을 겸비하게 되면서 바라보는 시선이 오류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 오류를 범하는 자 자체가 바로 마귀인 것으로 여겨진다.
6. 교회는 하느님의 밭이다라는 말씀은 곧 상호 교류적인 협조적인 플렘테이션의 장으로 설명해 볼 수 있겠다. 하느님께서 교회라는 밭을 경작함에 있어서 장기적인 프로그램과 농업환경의 집약이라는 실질적인 체계화를 꾀하여 누룩에 빵이 부풀듯이 겨자씨가 무럭무럭 자라나듯이 최고의 조건으로 천상적 환경을 제공하시기 위한 것이 바로 교회라는 틀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러므로 제도화된, 플렌테이션화된 농토인 교회가 없이는 하느님의 말씀 즉 무럭무럭 자라나게 하시는 분의 성실하심이 우리 인간들에게 불필요하게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이 먼저인지를 알아본다면 먼저는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나중에는 인간적 접목이고 적용이고 활용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약용되고 있는 제도적 악이 자칫하면 교회가 그것을 모방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밭으로서의 제도적 교회의 근원을 먼저 밝혀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너도나도 쓰고 있지만 그 밭은 좋은 열매도 내고, 쓰고고도 신 포도인 들포도도 내고 있기 때문이다.
7. 그리스도의 몸은 새로 창조된 새 사람들을 형성시킨다. 새 사람들은 옛 관습, 악습에 물든 육신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새 옷을 입은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 모든 생명은 거기로부터 나옸기 때문에 아직 그리스도화되지 못한 모든 사람들도 타종교라는 터울을 벗어버릴 수 있을 때 그들의 참 생명이 그리스도의 몸인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영원히 자기자신으로서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생명을 받게 되는 새사람들은 죽더라도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 다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성부께서는 성자를 보내주셨던 것이다.
8. 교회를 지탱하게 하느니 것은 그리스도다. 즉 교회론을 지탱해주는 것도 또한 그리스도론이다. 서로 상호 협조와 보완의 관계를 형성하며 모든 사람들을 정의와 은총으로 이끌고 감싸주는 것이 바로 교회의 신비와 그리스도의 신비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셨는데 세상에는 교회가 세워졌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조금만 김이 생각해 본다면 교회가 생기지 않았다면 하늘나라는 지상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즉 교회가 없이는 그리스도도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즉 교회가 없는 그리스도는 소외당한 그리스도임이 분명할 것이다. 소외당한 그리스도는 진정한 하늘나라의 선포자가 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여겨진다. 자기 정체성을 잃고 어떻게 타인도 아닌 하느님을 언급할 수 있겠으며 하느님의 거처인 하늘나라를 선포할 수있을 것인가? 그러나 교회를 통한다면 결코 천상에서도 지상에서도 소외되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생각하기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다. 내 몸에 영혼과 마음이 모여서 살아가듯이 그리스도도 교회와 더물어 존재하고 활력을 얻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교회 밖에 그리스도가 없을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교회의 자비성에 관한 문제다. 핵심을 걷어낸다면 아무리 큰 조직체라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9.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꾸짖어도 회개하지 못하게 하신것은 분명 하느님의 백성은 우매한 대중안에서 형성되어 진다고 볼 수 있도록 제시된다. 만약 꿰뚫어보고 경청하며 성찰하는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교회를 인간의 몸의 수많은 지체와도 비교하듯이 각각의 지체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체 중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곧 피부일 것이다. 피부는 인간 전체를 덮고 있으며 인간을 추위로부터, 더위로부터, 여러가지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넑고 많은 부분을 형성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피부가 곧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교회의 백성, 하느님의 백성인 것이다. 모두가 알아듣는 다면 교회는 귀의 역할만이 발달한 우스운 꼴의 인간처럼 되고 말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다 알아본다면 인간의 지체는 눈이 열개, 아니 백개, 수백개의 눈으로 둘러 쌓여 이상한 모습을 가진 기이한 생명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올바른 모습, 성장하는 교회의 모습 속에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산재해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자, 성찰하지 않는자는 겉으로는 이목구비는, 신체는 팔등신의 황금비율을 자랑할 지라도 실재로는 비뚤어지고 어긋나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경거망덕한 사람으로 변질되어서 보이지 않는 드러나지 않는 결함을 지닐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분명한 선택을 한 민족이며, 하느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민족이다. 그들이 듣지 않고, 보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것은 그들이 깨닫지 못하여 그들 잔의 몫을, 그 만큼의 몫을 부여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나머지 몫이 이방인들의 손에 주어졌으니 세상 끝날까지 완성되어질 하느님의 나라 건설에 투신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하느님 백성으로서 어느 누구도 예외되지 않음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면 가다가 멈춘 사람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한 것을 한탄만 할 것은 아닌 것이다. 그들도 가다가 멈춘 만큼의 하늘나라 백성의 역할을 인정받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월계관을 쓰는 영광은 지속적인 기도로 끝까지 그 계획을 왁장하고 지속시킨 백성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10. 멜키세덱의 영원한 사제직분을 잇는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연유한 사제직은 하느님의 직속 대리자라고까지 여겨진다. 멜키세덱은 모든 토속신앙, 종교행위의 본보기로 보여지며 그러한 멜키세덱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계획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구약의 성조인 아브라함마저도 그러한 멜키세덱에게 예물로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의 성조가 멜키세덱의 영원한 사제직분을 획증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된 사제직은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천상 잔치의 파스카적 의미를 띤다고 볼 수 있다. 그 사제직은 모든 종교, 전통, 토속신앙까지 포함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제직은 일반 사제직 안에서 직무 사제직으로 보호되고 육성되어진다고 생각한다.
11. 칠성사 중 으뜸이라고 여기고 싶은 성사는 고백성사다. 고백이라는 마릉ㄴ 하느님과의 친밀로 요약될 수 있다. 친구들과의 고백, 보모님과의 고백, 연인간의 고백 등 나를 낮추어 평쳐보이는 의미로서의 고백은 많은 정신거 희생을 동반한다. 먼저 나 자신에게 화해에 필요한 정신적 통회를 요구하여 혼란을 겪어야 하기에, 두번째는 고백 사제에게 가기전에 이미 녹초가 되는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 상처를 잘 치료해서 자생하도록 환기를 시키는 것도 좋은 치유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의 정신적 희생은 고해사제에게 가서, 고해 사제 앞에서 자신의 정싡거 고뇌를 뒤로 물리고 하느님과의 친밀에 앞서 자신을 펼쳐 열러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심한 자아 상실감을 겪을 수 있는데 허허 벌판에 서 있는 자기 자신처럼 멍해지는 듯 무슨 말씀을 드렸는지, 어떻게 고백을 했는지도 모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때 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것 또한 심한 우울함으로 마음이 혼란해지고 정신이 산만해 질 수 있는데 이럴 때 정신적 개방감으로 환기시켜 마음을 추스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대와의 친교인 보속행위가 남게되는데 보속은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의 모습을 돌이켜봐야 할 것이다. 이웃과 친구가 아닌 나 자신이 그 대상일 경우에는 하느님 안에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듯이 자기자신을 바라보며 자기와의 충분한 대화를 통해 회심으로 나아가며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12. 예언을 한다는 것은 쉽게는 어제 하루를 돌아다보고 오늘에 살아가는 바를 밝혀 비추어 보는 것으로 이해되고, 어렵게는 깊은 관상 중에서 하느미과의 통교를 통한 게시적 말씀들을 묵상하고 이를 시대에 비추어 해석해 내는 것으로 설명해 볼 수 있겠다. 먼 산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찾아내려는 시도도 어떤 면에서는 예언직의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전전에서 찾았듯이 무엇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를 깊이 있게 바라보고 헤아리는 행위는 예언자적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성서적 예언직은 신앙과 도덕에 관한 거울을 성경을 통하여 비추 어서 하느님 백성들을 탈선하지 않도록 지탱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3. 교회의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된다. 이백성들은 신앙안에서 단일하고 유일한 백성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신앙안에서만이 피부, 종족, 문화, 종교, 언어 들을 포괄할 수 있으며 이 모두를 일컬어서 유일하고 단일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보편화 시키는 것이 가능해지리라 생각된다. 그렇게 될 때 현세적 단일 민족이라기보다는 현세를 초월한 그러나 그 초월한 세상은 ㅅ현세와 멀리떨어져 있지 않은 어떻게 보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가깝게 붙어있는 파이크 관속에 기름과 공기와 물이 차례로 유입되어 서로 붙어서 흘러가듯이 함께 동반하고 있는 세상이 바로 초월적 세상과 현세와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즉 삶과 죽음이 붙어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심장이 뛸 때 펌프압이 찼을 때는 죽음이요, 빠졌을 때는 삶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심장이 펌프질을 하기 위하여 혼 힘을 다 소진한 결과로 펌프압이 생기기 때문에 펌프압이 찼을 때는 심장 자체는 죽음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펌프 압이 빠졌을 때는 생명을 유지한다라는 의미는 압력이 빠지는 동안 심장은 휴식을 취할 수 있고 먼저번에 소진했던 힘이 돌고 돌아 새 생명을 주는 활력으로 인하여 휴식중인 심장에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시키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백성은 신앙안에서 초월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요 동시에 현세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한 모습을 일컬어서 보편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이해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14.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되듯이 교회 안에서도 구원되는 것이다. 단순히 교회를 장소적, 거룩한 사물의 표면적 성격으로만 이해한다면 현세를 살아가는 동안에 한해서 유한성을 띤 구세적 의미로 볼 수 있지만 교회를 그리스도와 함께 바라볼 때 교회는 현세와 내세 그리고 과거까지도 포함하는 인류사에 주관하는 중추적 성격을 가지는 유일한 구원의 장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먼저 살았던 사람은 묻히고 사라지지만 우리에게 물려준, 전해준, 사라지지 않은, 묻히지 않은 그 무엇인가가 연결되고 전수 받은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지금은 백골이 진퇴되어 흙이 되었을 지라도 그의 영성, 영혼, 정신은 고스란히 세상에 남아서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영혼의 기운은 때로는 망각되기도 하지만 어떤 특정한 장소, 건물, 유적들을 통해서 다시 기억되고 살아있는 영혼, 정신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영성적 역할을 하는 표징적 성격으로 교회가 존재하며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의 대명사적 성격을 띨 수 있는 것이다.
15.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인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직분을 사는 사람이 주는 것인가? 그러나 사람을 도구, 신앙의 유산으로 쓰시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한 믿음 안에서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세례를 주시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갈라진 형제들은 세례라는 아주 소중하고 고귀한 것만을 취하려하고 자신의 비참함이나 잘못을 쉽게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한 의도로 오해 될 수 있는 성사로 고백성사를 예로들 수 있겠는데, 그렇게 된다면 고백성사는 무엇이든지 가리지 말고 먹으라고 하신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꼴이 될 수 있다. 주님 안에서 복을 받는다면, 시련과 고통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이치다.
16.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무수한 사람들에게 냉소적인 자세로 다가가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자연법 안에서 하느님의 신적 계명을 떠나서 살 수 없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세례는 받지 않았더라도 그들까지도 하느님은 감싸 앙ㄴ으시고 사랑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관심과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말은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최종목적은 아님을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선은 하느님 뜻대로 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세례는 받았으나 매번 고의로 계명을 거스르며 성사를 남용하는 것은 해악에 가깝기 때문이다.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것은 신앙을 떠나서 더 근원적 물음에 답하는 자세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17. 그러나 복음 전파는 선택, 취사 선택이 아님을 또한 상기해야 할 것이다. 복음 선포, 전파는 본성의 흐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본성이며 본질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착하고 선하게 세상을 사는 것 만이 우리의 목적, 최종 도달점, 종착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 전파는 개척정신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복음 전파는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그들 속에서 침투되어 그 속에서 죽어 한알의 밀알이 되어 묻혀서 그 안에서 싹을 틔우는 본성적 행위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복음이 전파된다면 주님의 부활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죽지 않고 무엇을 이루려 한다면 복음전파 복음선포, 선교정신에 위배됨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18. 종들의 종인 교황직은 비천한 그리스도의 형상화된 상징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곧 우리의 미약함, 비천함의 역동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종들의 종이라는 말을 더 심화시켜 볼 말은 마땅히 없는 것 같다. 미천한 자들의 미천한자, 가난한 자들의 가난한 자, 아버지의 아들, 비참한 자들의 비참한자 등으로 달리 말한다고 해도 종들의 종 만큼 그리스도를 상기시키는 명확하고 명철한 표현은 없는 것 같다. 목동과 목자들은 양들을 보살피기도 하지만 때로는 잡아먹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한 목자이시며 영혼의 목자이시다. 영혼을 보살피고 안식처를 주며 쉬실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은 목자의 직분이 된다. 그러한 직분을 이어받은 목자가 바로 종들의 종이신 교황직이며 주교직일 것이다.
19. 파견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사도로 부르시고 곁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시고 다른곳으로 떠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교회의 본질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떠나 보내기 위해서는 떠나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떠나느 사람은 정주 생활에 애착을 가져서는 막상 떠나야 할 때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다 보지 말라는 말씀은 이와 함께 묵상하기에 상당한 의미가 있다. 롯의 아내가 소돔을 향해 되돌아 본 것은 세속의 부귀 영화에 대한 애착에서 연유한다고 본다. 영화를 누릴 수 없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올 것이고 그 날에 그 노력과 공덕은 자기 것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떠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또한 교회의 창립정신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0. 한 조직을 운영해 나간다는 것이 인간적인 능력으로 그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있다. 인간은 그렇게 되리라는 확신만을 가지고 제도 안에서 일들을 추진할 뿐 그 결과는 항상 뜻대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들에게 주어진 직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수 많은 업무 수행에 관여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되리라는 확신만이 필요할 뿐이지 그 일의 결과는 언제나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직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 일을 끝까지 지켜보고 완수할 사도들은 계속해서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직무가 완성되는 날까지 계속해서 직무수행에 필요한 사도들을 뽑아 세워야 할 것이다.
2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시나 특히 종으로서의 본분을 살고 있는 주고들 안에 현존하심은 정통한 사실이다. 누가 더 그리스도를 닮았으며 누가 더 그리스도의 자녀다운가를 판가름하기는 어렵지만 인간적이고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조금이라도 하느님의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과 그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는 기준이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본다면 당연히 주교들 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고 보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주교들은 그리스도를 현존시키는 만큼 모든 일에 있어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혹은 공평하고 정의롭게 처리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22. 혼연일치가 된다는 것은 사심없는 마음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할 것이다. 제자들 중에 어느누구 하나라도 사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부활체험 이전의 교회의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부활이전의 제자들을 보자면 모든 것을 내어놓고 공동 소유로 돌봐 줌으로서 혼연일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부활이전의 모습과 부활 이후의 공동체의 모습이 다른가? 부활이전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 단을 꾸리시고 돌보셨다. 먹을 것을 챙겨주셔야 했고 잠자리를 잡아 주셔야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공격을 일일이 다 막으셔야 했다. 그런데 부활이후에는 그럴 필요가 없으셨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는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스스로 챙겨 먹어야 했고, 알아서 잠자리를 정해야 했으며, 가르침을 받기보다 오히려 이제는 가르쳐야 했다. 그러므로 부활 전의 공동체의 모습은 인간적인 공동체요 인격적인 공동체로 볼 수 있다. 즉 예수님께서 직접 개입하셨기 때문에 자유로왔고 개방적이었으며 즉흥적인 공동체였다. 반면 부활이후의 공동체는 제도적 공동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 누구도 예수님을 대신해서 칭겨주고 말씀으로 위로를 주지 못했던 것이다. 더이상은 말씀의 가르참은 없는 것이다. 살아계시는 동안 말씀하신 바대로만 살아가야 하며 그 한정된 말씀만을 가지고 그 말씀을 토대로 해석하고 분석하고 확정하고 발전시켜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그 말씀을 임의대로 해석하고 발성해서는 안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에 누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바로 잡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단은 혼연일치가 되어 그러한 잘못된 방향에 제제를 가하는데 온 힘을 다해 노력을 기울였던 점을 돌이켜 생각해야 할 것이다.
23. 교회는 전파되고 확장되어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세속적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마음넉었으며 그들의 젊음을 오롯이 도로바쳐 주께서 주신것을 주님께서 도로 가져가시게 자신들을 봉헌한 것이다. 이에 주님께서 골고루 나누어 주신 은총을 관리할 지역교회, 부분 교회들이 각 나라, 민족, 종족들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은 오히려 주교들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것처럼 가르침을 받고, 함께 먹고, 잠자리를 챙겼으며 오손도손 함께 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일구어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잇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활 이전의 예수님께서 직접 통치하실 때를 일컬어서 지역교회 혹은 부분 교회적 개념으로 이해를 해 본다면 쉽게 접근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부활 이후의 공동체는 부분교회의 장이요 또 그 교회들이 전체 교회로 정향되어 있음을 늘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전체 교회는 제도적 교회의 모습으로서 교황에게 전권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돌아가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모든 것 하늘나라의 모든 것 지상의 모든 것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위임하셨기에 전체 교회가 그 권한을 이어받은 교황을 둘 수가 있는 것이다. 교황이 없이는 전체교회가 있을 수 없으며 전체 교회가 없이는 또한 부분 지역 교회가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모범적인 사제단, 목자단을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난다고 생각된다. 어느 지역 교회를 가든지 사제들은 어느 원로, 촉망받는 원로 사제를 중심으로 모이고, 나누며, 가르침을 받들기 때문에 초기 공동체적 인격적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읻. 한 발 더 나아가 본다면, 평신도 생활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임을 유추해 볼 수 있겠는데 그들도 그들 나름의 위계 질서 안에서 예수님의 공동체는 살고 전파되고 있음을 굳이 인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24. 이제는 세상 끝까지 주님의말씀을 선포하라는 선교사명 안에서 많은 신자들이 생겨나고, 불어나고 있으므로 그들을 가르치고 먹이며 잠자리를 챙기고 관리할 주교들을 또한 많이 배출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될 것이다. 사도좌에서 신자들의 영적 결핍을 해소해 주기 위한 배려를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교직을 임명해야 할 것이다. 많은 주교들이 생겨나는 것은 큰 은총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전파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25. 그러므로 주교직의 모델이 기꺼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이 세상 끝까지 우리 안에 계시기에 주교들은 하늘나라의 백성들을 깨우치고 이끌어 가는데 있어서 아무런 오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올바로 잡아 주실 것을 전적으로 믿고 있기에 아무런 부담도 주교에게 지워질 수가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 사심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가르치거나 권력으로 내리누르려 한다면 스스로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권한도 위임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교직 안에서 예수님의 권위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정신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살아있는 유기체적인 공동체가 주교직 안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서 형제적 친교를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곧 하늘 나라의 모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으면서도 서로를 위로해주는 것은 하늘 나라를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상상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교직은 그 자체로서 세상을 해방하는 그리스도론적 완전성에 도달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6. 사제 중의 사제, 유일한 사제이신 예수님의 완전성에 돨할수 있는 사제단의 으뜸이 되는 주교는 최고의 제사장의 성격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성체의 제사장으로서 전례를 주관하기에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자제직에 가깝도록 제사를 집전할 수 있으며 그 제사는 천상적 성격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만찬과 일치할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제사장이라고해서 누구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주교들을 통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주교직을 참 사제, 참 제사장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합당한 례를 받아들이고 동참할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주교의 기도는 누구보다도 진지하며 자유롭게 지향된다고 생각한다. 그 자유는 예수님 안에서 해석되어지는 선택된 자유이며 그 자유에 입각한 기도는 세상 어떤 기도보다 보편성을 지니게 된다고 생각한다. 주교의 이러한 합법적인 집전은 구속을 가져다 주기보다 오히려 더 풍성한 전례가 될 수 있도록 투명하고 정결하여 모든 백성이 의심없이 사심없이 전적으로 마음을 열어놓고 전례에 참여할 수 있는 신뢰감을 더해주는 것이다.
27. 하늘나라의 백성인 양떼들은 직접적인 주교의 통제를 받게 되는데 이것은 미사성제를 통해서 가능함을 증거,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매일의 미사성제가 주교좌 성당에서 봉헌되기에 그 양떼들은 직접적으로 주교님의 지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많은 본당 공동체에서 치뤄지는 미사성제의 경우에는 어떠할까? 즉 사제에의해 이루어지는 미사성제에서 주교님의 완전, 완성적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가? 실질적으로 전달상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직접은 아니지만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을 부인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사제직 안에서 모두는 그리스도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이니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미사성제가 된느 것이다. 미사성제야말로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요 천상잔치가 되는 것이다.
28.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일꾼들이며 원로사제들의 원로인 주교를 대신하는 임무는 당연히 사제들에게로부터 나올 것이다. 특히 많은 부분 교회가 형성되었고 일부 부분교회를 형성하는 소공동체로서의 본당구역을 관할하는 임무는 전선의 최전방에 위치하는 중요한 역할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주교의 협조자로서의 사제들의 사제직무는 본당에서 관할된 하느님의 백성만이아니라 조직과 조직 사이를 유기적으로 움직여 줄 수 있도록 매끄럽게 일처리가 될 수있도록 관할 하는 보이지 않는 사제들의 전문적 협조 직무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주교의 협조자들이 한데 어울려 완전한 공동체로서 그 위상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은 그러한 짜임새있는 구조적 모범을 보고 어두움에 빛을 보듯이 이를 보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왓음을 알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제가 세상의 등불이라고 한다면 그 즉시 등불은 활활 타올라 온세상이 불길로 휩싸일 것이다. 그러나 사제가 그렇게 많지 않을 뿐더러 많은 사제들이 실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은 보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시점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많은 사제성소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사제들이 많이 배출되지 않고서는 온세상을 그리스도의 성심의 불길로 활활타오르게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9. 종신 부제직은 한국교회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이렇다할 관심에서 제외되는 듯하다. 성무 집행중 미사성제의 집전말고는 모든 성사를 거룩히 수행할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거룩한 부제가 많이 장려되어야 함을 공의회는 밝히고 있으나 한국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혼선을, 혼란스러움을 피하고 선교에 더 큰힘을 실어 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사제직으로 관심이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0. 평신도의 직책은 교회 안에서와 교회밖에서의 이중의 정체성적 성격을 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신분은 교회적으로 신앙인이지만 많은 교계내의 직책 중 많은 부분에서 위임을 받아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와 세속을 이어주는 역할은 평신도의 고유한 사명이자 권리가 될 것이다.
31. 사제들이 세속에 관여하여 어떤일을 주관할 수 없는 것은 사제의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평신도도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활동하고 교회에 메여있으나 사회적 소명에 우선적으로 충실해야함은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2. 평신도와 성직자는 결코 다름이 아닌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소명직에 관한 세부사항에서가 아니라 모두의 지향이 일차하는데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뿌 ㄴ이기에 평신도든 성직자든 한마음, 한 식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 중심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개인 혼자 뿐, 즉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허무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33. 성무집행을 제외할 많은 신심 호라동과 풍성한 은총을 거저 누릴 수 있는 것이 평신도의 특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소금이 되는 것은 평신도의 모습으로 지망되며 세상의 빛, 등불이 되는 것은 성직자들의 모습으로 지망된다.
34. 평신도의 사제직은 집전자로서가 아닌 제사장의 봉사자를 위한 봉사직에 그 의미를 둘 수 있다고 여겨진다.
35. 증거하고, 증명하고, 확증하고, 예언하는 것은 세상 끝날까지 세속적 유혹과 마귀들에게 굴복당하지 않도록 깨어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6.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신 왕이셨음을 견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왕직은 이렇듯 조롱의 대상으로서 표현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시관을 벗어 던지싲 않으셨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조롱의 대상, 우스겟거리의 대상은 외관에서 가해지는 그 무엇으로도 진실을 외곡시킬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사랑과 평화, 생명과 정의는 아주 고차원적인 물음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순한 삶, 일상적인 삶 안에서 그 모두를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평신도의 왕직은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모방한 고귀한 직무라고 할 수있다.
37. 교회로부터 주어지는 은총과 축복을 받을 권리가 평신도들에게는 주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그 유산의 풍요로움을 누리며 행복해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38. 생명의 사도, 생명의 수호자, 살아계신 하느님의 표지가 되어야할 의무가 평신도들에게는 주어져 있다.
39. 교회는 그리스도와 결합됨, 혼인함으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누리게 됨을 알 수 있따. 그래서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거룩함도 믿는 이들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내게 된다. 그리스도의 풍만한 가슴으로부터 전해오는 거룩한 감동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서 함께 누리게 되는 은총이 되는 것이다.
40. 세속에 발을 담그고 정신을 빼앗기고 거룩한 사랑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막중한 괴로움을 동반하게 될 것임을 전제로 한다. 예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죽기까지 완성되어야할 장기적인 실천이지 일시적인 선행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만약 일시적으로 자녀가 완성된다면 그리스도의 모범이 아무런 소용이 없이 일시적으로 다할 것이 분명한 것이다.
41. 여러직책과 성덕중에서 가장 마음에 끌리는 성덕은 동정부부라는 초월적 삶이라고 생각한다. 동정부부의 삶은 구너장해서는 안되겠지만-생명의 실천차원에서-누군가는 그 삶을 살고 있어야 할 필요성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42.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성덕의 실천이며 이 사랑은 자연법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직접적 본질의 사랑으로 생각한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내어 줄 때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그 방향을 같이 한다. 먼저는 주는 것이다. 주는 것이 있어야 받아서 성장할 수 있고 성장하면 다시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43. 복음적 권고인 가난, 정결, 순명은 어떤 면에서 접근한다면 절대적 계명을 능가하는 실천적 계명으로 보여지기까지 한다. 즉 해도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를 두는것은 하지 않도록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꼭 명심해야 할것이다. 좋지않은 표양이면 아예 못하도록 못을 박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고한다는 것은 자유로이 해야한다는 강한 법적 효력을 내포하고 있는 듯 하다. 그것은 자유의 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4. 수도회에서 발하는 서원은 공적인 약속으로서 꼭지켜져야할 분명성이 제시되지만 보통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모님과 약속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럴때 보다 신자다운 완전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잘지켜지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을 생각하고 성찰할 수있도록 유도해주기 때문에 개인적인 약속, 또는 서원을 많이 할 수 있으면 있을 수록 많은 은총을 받을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45. 수도자는 예수그리스도의 공적 가르침, 공생활을 포함한 그 외의 더 많은 예수님의 삶을 관상하고 묵상한다는 점에서 신비체와 가깝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교권의 보호와 육성을 받지 않으면 전체 안에서 하나되는 일치를 맛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회는 각별히 교황의, 교권의 보호를 받고 보충되는 것이 합당한 것이 된다.
46. 수도자들의 증거의 삶은 자기 자신만의 수덕적 삶에 머물러서는 안됨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덕해응ㄹ 본보여 신앙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회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밝은 모습으로 다가가고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들의 수덕은 사욕에 미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47. 수도자의 사명은 다른 어떤 약속만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느 것 같다. 지기의 성소에 항구히 머물 수 있는 것은 수도자의 사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48. 과연 교회의 종말적 모습은 어떤 것일까? 형태가 있든지 없든지 언어적 소리의 형식일지, 문자적 상징의 상태일지 흐르는 바람속에 영혼의 일정한 기운 또는 온기일지, 도무지 세말에 완성될 교회의 모습은 알 길이 없다. 무지로부터의 해방의 모습이 세말에 완성될 교회의 종말적 모습이 아닐까? 하늘의 별이 쏟아지는 밤이 끝없이 지속되는 영혼의 유희, 그때에 믿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을 믿음으로 알 수 있다. 그때까지 믿음이 지속되도록 교회는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셨듯이 그 때에도 믿는 모든 이들은 땅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땅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이 해방될 것이다.
49. 세상의 종말때까지 지속될 교회의 지상여정은 끝없는 찬양과 찬송의 울림을 하늘을 향해 보여드려야 할 것이다. 교회의 천상적 경배는 지상여정중에 더높이 올려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위해서 꾸준히 노력하고 연구하고 갈고, 닦아 하느님의 업적이 더욱더 고양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50. 신앙생활에 있어서 극기와 쇄신은 하늘나라를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써 평상시에 몸에 익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랑을 마중나간 신부들이 졸음에 빠져 신랑을 뵈옵지 못하고 잔치집에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극기와 쇄신은 절제와도 그 맥을 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쓴다는 말이 있듯이 이러한 지혜는 신랑이 오실때까지 등불을 밝혀 둘 기름을 모아두는 지혜가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론적 지혜는 소비에 있지않고 절제에 있다는 것이다. 소비는 세상의 논리와 같을 것이다. 세상에 속해 있는 교회의 백성들은 그들의 소비의 부분별함을 잡아주는 키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절제의 지혜일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교회의 백성들을 보고 그들도 그렇게 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1. 많은 공의회를 치러오면서 교회의 가르침은 때에 따라 하느님께로 더욱 가까워 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옛 가르침에 오류를 지적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 때에는 신아인들의 심성이 그러한 가르침에 국한되어 버렸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교류가 많아진 지금의 시대에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제 2차 바티칸공의회로 하여금 개선한 교회의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있고 앞장서가는 교회의 면모를 갖출 수있게 된것이다.
52. 한 여인에게 하느님의 아들을 나게 하심은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이다. 하느님의 계획을 인간이 다 알 수는 없지만 인간적 모습으로 사표되는 것은 인간에의해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 계획은 인간을 궁지로 몰아서 속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하고 복스럽게 하기 위함임을 주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없는데에 있게, 넘치게, 후하게 주시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3. 생명의 생명을 세상에 낳아주신 동정마리아는 천상의 모후로 우리들의 삶에 깊숙히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그런 위대한일을 해 내셨기에 하느님의 가장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 되셨음은 마땅하고 거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가정을 꾸리고 현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부모들은 성모 마리아의 위대한 협조를 상기시키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인간적 협력이 아니라 천상적, 아버지와의 협력이 될 것이며 그러므로 하느님의 무상적 생명을 실제 삶 안에 낳아주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54. 동정녀 마리아는 그리스도 예ㅜㅅ님을 낳으심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엿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엣 속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하느님의 아들과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성립되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어려운 신학적 연구들은 결국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일구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여진다.
69. 성모신심은 비단 가톨릭만이 아니더라도 많은 종차에서 맣은 관심을 두고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좋은 아들은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모친을 위하는 아들의 심성은 종교까지 초월할 것이다. 그런 공번된 윤리 도덕에 비추어 보더라도 성모신심의 잔잔한 울려퍼짐은 능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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