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Sacrosantum Concilium)묵상
1. 전례의 개혁과 성책을 강구하기 위해서 거룩한 공의회는 전례적 ㅡ이미를 증진시키고, 적응시키고, 장려하고, 진흥시키는 노력을 할것을 선포하였다. 전례의 개혁을 간단하게 정의하기란 쉽지 않지만 굳이 요약하자면 전례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례의 정신은 친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판견일 것이다.
2. 전례는 그 속성상 영적이며 현세를 초월한다. 그렇다고 현실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적이며 동시에 인간적이시듯이 거룩한 교회의 전례도 관상을 통하여 활동을 지향하고 할동하면서 관상에 전심하도록 정향되어있다. 전례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선과 악, 영과 육, 활동과 관상, 현세와 내세, 지상과 천상, 마르타와 마리아 등과 같이 예를 들수 있겠지만 실은 전례의 의미를 이러한 이분법적인 설명으로 접근하기엔 미흡한 점이 부단하다. 사실 전례는 부활 체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전례는 그 자체로서 신비다. 전례는 신비체험이며 기적체험이다. 그러나 모두가 체험하면서도 그 사실을 모두가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목격한 제자들은 기뻐하면서도 믿기지가 않아 어리둥절해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의심을 품는다(루카 24,36-41). 이렇게 인간의 양면성은 서로 등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서로 뗄수 없으며 구분지을 수 없다. 전례를 통해서 이러한 신비를 깨닫게 되면 자신이 체험속에서 체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러한 무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3. 성교회가 합법적으로 승인한 전례는 동방전례의 예루살렘전례, 안티오키아와 시리아 전례, 서부시리아 전례에는 미로니트 레바논 전례, 비잔틴 전례, 아르메니아 전례가 있으며 동부시리아 전례에는 네스토리우스 전례, 칼데아 전례, 칼데아 전례에는 이란 이라크 접경지역 전례, 말라바르 전례가 있다. 알렉산드리아 전례에는 꼽트 에집트 전례와 에티오피아 전례가 있으며 서방전례의 로마 전례, 밀라노 암브로시오 전례, 갈리아 전례, 모자라빅 스페인 전례가 있다. 이들 중에서 특히 비잔틴 전례는 예식속에 나타나는 신비를 이콘(Icone)을 통해서 거행하는데, 오늘날 비잔틴 전례에 속하는 신자는 대략 2억명 정도이다. 여기에는 희랍 비잔틴, 슬라브 비잔틴, 아랍 비잔틴, 알바니아 비잔틴, 우크라이나 비잔틴 전례가 있다. 무엇보다도 다양함 속에서 단일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전례의 보편성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5. 먼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느님과의 화해를 완전히 성취하셨고 그로인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풍족한 봉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도구의 역할을 했다는 기능적 의미에만 머물수 없다. 그렇게까지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신 아버지의 부성적 사랑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지상에 보내심으로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서 당신 몸소 화해를 체득하시며 막정에 이르러 화해의 극치를 최후의 만찬을 통해 세워주셨다. 그러므로 전례는 하느님께 드리는 완전하고 풍족한 봉사적 행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음과 삶을 재생하는 생명의 서막이다.
6,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람은 미사성제와 성사 안에서 천상적 삶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결합된 성령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 성령은 원천적으로는 성부께로부터 왔지만 직접적으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거룩한 전례에 있어서 성자가 빠진 성부와 성령이 있다면은 그 의미가 인간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7. 그리스도께서는 성체 형상 안에 현존하시고, 사제의 인격안에도 현존하신다. 여기서 사제란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도 계시고 저기에도 계시고 어느곳에도 아니계신 곳이 없으며, 어느 시간이나 아니게신 때가 없으시다. 그런데 왜 교회, 전례, 성사, 신자, 사제와 같이 특별하게 보이는 사람과 장소와 때에 국한된 것처럼 보이는 것인가? 쉽게 말하자면 토양이 그렇게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온세상에 아니뿌려진 곳이 없이 그리스도의 씨가 뿌려졌으나 그것을 발견하고 깨닫고 기뻐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쁨에 충만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보기에 특별하고 특출하게 보이는 것이다.
8. 지상에서 거행되는 전례에 참례하는 것은 신앙인의 순례의 목적지인 하늘나라에서 거행되는 천상의 전례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라는 이 헌장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신앙인이 어떠한 세속적 유혹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이에 굴복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이 현세적 삶을 충실히 살아 가야할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9. 냉담 중인 신자가 마음을 돌려 다시 성당에 나오기는 상당히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을 훼손 당했기 때문이다. 성당에 다니면서 겪게되는 일들 중에서 많은 경우가 신자들의 마음을 저울질 한다. 상처받은 신자들은 자기의 여린 마음이 저울에 미달됨으로써 두려움과 무서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이 굳어지고 차가와졌음을 괴로워한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것이다. 마음 한곁에는 항상 아버지의 포근한 품이 있음을 느끼지만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지기에는 그의 한숨이 너무 깊다. 풍요로웠던 시절의 기억이 너무 멀어져 버렸다. 냉담자들은 더이상은 교회의 충만한 성사를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온유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인간적인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그들을 직접 치유해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예수님의 성사인 교회의 천상적 표징을 통하여 힘을 얻기를 기원한다.
10, 전례는 교회 활동의 정점이라는 말은 전례행위에 국한된 의미만을 지향하지 않는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행에 가담하지만 그의 목적은 세상의 구원에 있지 않다. 그러나 기도의 정점이자 신덕의 최고봉인 전례는 빠스카의 신비를 통하여 정의로운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이세상에 알려지도록 통회의 정신, 낮추인 정신, 겸손한 마음을 일깨워 주기에 모든 인간적 선행을 초월하는 것이다.
11. 전례의 완전한 효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자들의 참여와 협력이 필요하다. 여기서의 참여와 협력은 일시적인 협조와는 다르다.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봉사적 협력은 일상생활 전체를 관통한다. 단지 주일미사 때에만 신앙생활이 집약되고 미사 후에 성당을 멋어나면 신앙인이 아닌체하며 성사생활과 무관하게 살아간다면 이것은 참여와 협력의 소극적인 표현에 무무르는 것이다. 전례에 있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은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일할 때도 쉴 때도 전례적 정신으로 살아간다.
12.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자는 매사에 소극적이게 마련이다. 신앙을 떠나서 무엇인가, 누군가에 대한 염원이 없이 행하는 행위는 단순한 동작에 불과 하다. 그러므로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13. 전례는 모든 신심행사중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 어떠한 신심 단체의 중요한 모임이라도 그 중심에 전례가 자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활동은 힘이 없다. 추진력 또한 없다. 그러므로 오래가지 못하고 와해 될 것이다.
14. 전례의 개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절제된 동작, 엄숙한 분위기, 정갈한 마음, 겸손한 영혼, 수수한 옷차람, 간결한 예식, 화려한 성인, 차별된 시간, 명료한 말씀, 애틋한 고백, 측은한 손과 발, 낮추인 정신, 단정한 눈빛, 순수한 인사, 평안한 봉헌, 해 맑은 미소, 다정한 손길, 산뜻한 얼굴 등등. 즉 하늘나라를 미리 사는 것이다.
15. 전례의 영성을 승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성스러운 일이다. 그 일은 광야의 만나를 거둬들이는 거룩한 봉헌행위다.
16. 사제가 되어 간다는 것은 깨달은 만큼 그리스도의 신비와 구세사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17. 거룩한 전례의 정신은 내가 수태되던 순간부터 주어졌고, 아기일 때와 어린이, 청소년과 장년으로 성장하면서 더욱 절실히 느껴지며, 밝혀 그 속에서 머무르고 싶은 영혼이다.
18.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는 사제는 후하게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처럼 신자들에게 전례적 생활에서 오는 풍요로움을 골고루 나누어 준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일꾼들이다. 맨 처음 일터로 나갔던 사람이 맨 마지막에 와서 한 데나리온을 받자 자기는 더 주려니 하고 기대했으나 허사였다. 그래서 자기와 동등한 대접을 하는 주인이 못마땅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일꾼인 주인의 후한 처사에 못마땅해 하면서 자기의 품삵을 받았는지 받지 않고 투쟁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전례는 하느님의 신비를 나누어 주는 분배행위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가 먼저 왔고 누가 늦게 온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일꾼이 우리는 모두 한 데나리온의 품삯이 주어졌을 뿐이다. 주인이 더 준댜고 해도 우리 일꾼의 능력으로는 더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은 일생이고 한 획으로 이어지는 것과 관련되지 않을까?
21. 전례문과 의식의 표현은 쉽게 표현되어 참례하는 사람들이 완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편성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되새겨보면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전례 정신을 훼손시키지 않는 한 더 적합하게 변경하기를 권장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례의 개혁은 하느님의 신비를 더 잘 받아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3. 할 수만 있다면 전례 예식에 있어서 여러지역 사이에 의식의 차이가 현저한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24. 전례 개혁의 종착점은 각국어로 변역된 성경의 감도에 의거한 예수그리스도의 행적이다. 교회의 모든 기도와 강론과 성무일도의 간구와 찬미가 그리고 전례서의 모든 부분 부분을 서로 연결하고 형성시키는 것은 성경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5. 거룩한 겨레인 성교회는 전례 행위를 현양함에 있어 많은 다른 부분으로 관여한다. 전례 행위는 각 지체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요구된다. 위계와 직책으로 분할된 전례 행위는 각자의 자리에 충실히 머물며 역할을 다하고 또 위계와 직책으로부터 넘치도록 훙성한 은총을 전해준다.
27. 하나의 거룩한 의식으로 지향된 미사의 공동집전은 지극히 권장할 만하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보다 넓은 데로 나아가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힘을 실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개별적인 지향으로 홀로드리는 전례 행위는 그 정신에 있어서 사분오열되어 있는 것이다.
28. 각자의 도리를 넘어서지 않는 것은 전례의 미덕인것 같다.
29. 성당내의 모든 신심단체들 중에서도 전례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단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더욱 퐁성하게 베풀어야 할 것이다.
30. 절제된 음성, 소리, 계음들은 전례에 있어서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돕는다. 특히 계응으로 이루어지는 기도문과 화음은 신자들로 하여금 찬상적 소리를 체험하게 할 것이다.
32. 전례의 역할은 영성적 권위로서 드러난다. 그래서 어떤 국가 당국자나 권위자들일지라도 전례의 진행에 있어서 특별한 대우는 불가하다. 왜냐하면 전례적 행위는 먼저는 자기 안에서 우러나는 신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33. 전례 생활은 말 그대로 실천적이어야 한다. 생활한다는 것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도 전례정신을 잃지 않고 실 생활에 적용하는 살밍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전례 안에서 생활하는 신앙인은 세상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의 자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34. 불필요한 동작의 반복을 피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업적을 기억하고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잇다. 혼돈에서 질서정연에로 향한 것은 하느님의 업적이기 때문이다.
35. 여성 독서직에 관하여 바티칸 시노두스의 안건으로 상정된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신중히 고려해야 할것은 교회 내에 여성 신자가 많고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여성의 대외적 활동이 크게 팽창하고 있는 상태에서 교회가 이를 신중히 검토했는다는 점이다. 전례에 있어서 성경의 봉독이 갖는 의미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사제품의 절차로서 받게되는 품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해서 전례 중에 대부분의 여성 신자들이 성경봉독에 참여하고 있음을 가벼해 여기자는 말은 아니다. 단지 교회내에서 여성 성경 봉독자가 많으며 또한 그 역할이 크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그 역할을 공적으로 드러내어 그 역할을 명시함으로써 더 많은 신자들을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방안이 되기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여성 사제직과 관련이 있느냐 없느냐는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성경 봉독은 지금 전례 안에서 충실히 행해지고 있는 것익고 그 외의 전례 행위에 있어서는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 될 부분임을 분명히 햐야 할 것이다.
37. 참된 전례 정신에 입각한 민족의 훌륭한 정신적 유산은 신법인 하늘법을 의미할 것이다. 하느님은 어느 종족이나 종교나 상관치 않으시고 모두에게 동일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전례 행위에 있어서 조금 다른 양식을 사용하더라도 그 정신에 있어서 고유한 신적 십계명에 부합한 다면 이를 보호하고 장려함은 당연한 것이다.
41. 주교를 중심으로하는 교구의 전례생활이 장려된다고 하지만 각 교구와의 전례 생활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여진다. 특히 한국 교회의 각 교구는 교구별로 무슨 특성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일관적인 것 같다. 물론 우리 민족성이 단일하여 어떤 지방의 특성을 능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더라도 한국교회는 너무 고전적인 로마 라틴 교회의 모습을 추종하는 것 같다. 분명히 각 교구마다 지방색이 있기 마련인데 그 특성을 살려 전례에 도입했으면 세계 교회에서도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43. 거룩한 열성은 생활 안에서 전례 정신을 싹트게 한다. 그리고 그 열성은 전례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된다.
44. 사목사업에 조예가 깊은 전문인단을 구성하는 것은 현대 교회의 방향이자 추세다. 인간 사회는 많은 분야를 개발하여 전문화 하였고 그로인한 종교도 특정한 부분으로 내몰리게 된 분위기에 섰다. 이제는 어느누구 하나도 불필요한 사람이란 없게 되었다. '아무나 데려오너라'라고 말씀하신 하느님과의 잔치집의 주인은 이러한 시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47. 최후의 만찬은 그 명칭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치러져야할 필요가 있다. 내가 사회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내몰리게 될 때, 그때가 가장 화려하고 호화로울 수 있음을 먼저 주님께서 보여주셨다. 죽음은 절망이지만 또한 만찬이 되어야함을 상기시키며 살아간다면 희망이 될 것이다.
48. 매일 기도를 드리는 것은 기도 일수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기도하는 습관을 길들임으로써 나를 돌아보고 너를 이해하며 공동체를 바라보기 위함이다. 나를 돌아본다는 것은 신앙의 신비에 가깝다. 새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에서 귀하지 않은 것이 없게된다. 그 습관을 기도안에서 발견해야 할 것이다.
49. 예절은 몸으로 올리는 기도로 보여진다. 불필요한 행동을 삼가한다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복음적 행위다. 꼭 필요한 행위를 하고 필요치 않은 행위는 절제해야 분심이 안 생기는 것 같다. 어떤 일정한 동적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할 수 있다면 그 행위는 몸으로 올리는 기도일 것이다.
51. 삼년에 걸쳐 성경의 모든 부분의 말씀을 음미하는 것은 어떤 신적 주기를 형성한다는 차원에서 길고도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
53. 어떤 면에서는 개인기도가 자신만을 위한 지향을 넘어서듯이 공동기도의 지향에 있어서도 특정한 개별 존재에 관해 언급되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모든 기도는 우주적차원에 우선적으로 지향되어야 할 것이다.
55. 주님의 만찬에서 영하는 몸과 피는 매일의 삶에 활력을 준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세례때 영했던 주님의 몸과피다. 하얀 밀떡은 민밋하여 내 입에서 녹았으며 붉은 주님의 성형은 내 입을 찌르는 듯하게 내 몸을 파고 스며들었다. 하얀 밀떡의 그 순수함은 내 몸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내 안에서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안ㄹ지 못하게 내 체질과 일치했다. 형상이 있고 그 형상이 질료가 되어 내 안에들어 왔으나, 분명히 보고, 만지고, 먹어씅나 알아채지 못하는 주님의 모인 것이다.
57. 사제들이 한데 모여 주님의 거룩한 미사를 함께 거행한다는 것은 그곳에 참례한 신자들에게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싸리가지를 한가닥을 꺽기는 쉽지만 여러개를 한데 꺽기는 쉽지 않듯이 사제들이 공동으로 모인 곳에서는 주님의 힘이 더해짐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원한는 성찬의 전례때의 기운은 극에 달한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신비를 보고, 듣고, 통교를 체험하는 것이다. 사제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성변화를 목걱하는 것이다. 그 함께하는 힘을 느끼는 것이다.
59. 신앙은 성사를 통해 다둑거려진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굳은 신앙응로 확고한 신앙으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고백성사를 보기위해서 몇날 며칠을 고심하고 성찰하고 반성하고 후회한다. 그러면 사형장에 끌려가는사람처럼 초췌한 분위기가 압도한다.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나만은 억장이 무너진 것이다. 폐허가 된 마음인 것이다. 아침의 태양이 아무리 찬란하게, 장엄하게 떠오르지만 내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간단한 것 같지만 톡톡 털고 쉽게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지만 성사를 통하지 않고는 쉽게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무엇때문일까? 그것은 성사의 거룩함에 의한 영향이 아닐까? 고해소를 들어가서 나오는 그 순간까지의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고해소를 들어가기까지가 천년의 세월같았다면 고해소를 나올때는 솜털처럼 가볍게 발걸음을 느끼게 된다.
62. 그러므로 성사의 효력은 세상의 어떤 쾌락을 누리면서 얻어지는 불안감과는 전혀 다르다. 운동경기장에 운집한 관중들이 외쳐대는 함성에서 느껴지는 군중심의 희열과도 다르고 남녀가 만나서 애정을 표현한다고해도 그에 비길 수 없이 다르다. 성사의 효력은 오래오래 지속되며 그 여운이 매우 길다. 그리고 하느님이 변하지 않듯이 성사의 효력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사가 성령의 감도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64. 어른이 된다음 세례를 받는 것은 또다른 은총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온전히 자기 의지로 자유로이 결정하고 이를 실천하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억압이나 폭력을 겪더라도 이에 굴복하지 않는 투지와 용기가 솟아난다. 또한 어린이 때나 유아기 때의 세례도 보록 온전히 자기의 의지대로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수호천사가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기 때문에 그에 못지 않게 풍성한 은총을 받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내 자신이 아니듯이 그렇게 세례를 받는 이유도 내 의지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면서 내 모습을 찾아 가듯이 유아 세례도 이미 거룩해진 나를 점차 성장하면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68. 얼굴에 물이 닿는 경우는 매일 아침 세면할 때와 샤워를 하거나 비오는 날 우산없이 비를 맞을 때 그러할 것이다.그런데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막 태어났을 때 어머니께서 나를 씻으셨다. 그리고 세례때에 내 이마에 물이 부어졌다.
69. 전례를 비롯하여 모든 성사와 준성사는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세례는 받았으나 법적 나이가 차지 않아 그 효력이 쌍방 계약의 유효 상태에 있지 않기에 그 확정을 받는 것은 적절한 절차로 여겨진다.
71. 세례와 견진은 사목적 이유로 따로 받을 수 있고 유아 세례와 어른 세례가 분리되지만 어느 시기에 이르면 유아가 성장을 하기에 어른이 되는 것과 같이 세례 후에는 곧바로 견진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어 합당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모두가 세례자와 견진자의 영적 성장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73.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있는 곳에는 늘 성사로 채워지고 준비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임박한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목적도 있겠지만 죽음이라는 형이상학적 삶으로 새로이 넘어가기 위한 확고한 믿음을 유지시키기에 무엇보다도 성사가 최우선 되어야 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도유화 영성체는 최고의 치유이며 회복이다.
75. 기름을 바른 다는 것은 치유를 받고있다는 희망을 준다. 그러므로 도유는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하고 온갖 사욕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보호막을 형성하기에 충분한 성사로 볼 수 있다.
77. 개인적으로 성당에서 혼례를 할 때 웨딩드레스보다 한복을 입은 신랑 신부가 더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전례에서 만큼은 예식서와 서약분을 쓰는 경우에 전통적인 예식 절차보다 혼배미사 예절이 더 장엄하고 품위가 있다고 느껴진다. 혼인 예식이 단순히 기념비적인 개념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서약에 있어서 어떠한 확답보다 확인된싸인, 서명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마음에 세겨진 신뢰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돌판에 세겨진 계명은 돌이 깨지고 나면 파기될 수 있어도 마음에 세겨진 믿음은 훼손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혼인 당사자들 간에 신뢰가 싹트도록 격려해 주는 배려가 전체적인 혼인 예식 분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인하여 예식을 짧게 하고자 하는 혼인 당사자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그들의 상황을 극히 존중해서 그들에게도 주님의 자녀들이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복을 빌어 주어야 할 것이다.
82. 입청원, 입수련, 첫서원,갱신서원, 종신서원, 부제수품, 사제수품은 일생에 있어서 일회에 제한 됨으로 그 가치가 존재론적이다. 살아있다는 것, 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서원을 발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공적으로 서약한다는 의미다. 아침에 누능ㄹ 뜨면 세면을 하듯이 매일 미사를 드리는 것은 평범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날들없이 존재하지 않고 거룩한 예식이 성대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원식을 특정한 장소, 시간을 정해서 하지 않고 매일 미사와 같이 평범한 평일 아침에 집전하는 경우도 있다. 혼일을 서약할 신랑신부가 이벤트성 잔치에 관심옶이 조용하고 경건한 의식이 되도록 원한다면 그 부모가 이를 허용하듯이 수도서원을 발할 때에도 많은 참여를 유도하지 않는 평일 아침 조용한 시간에 평소와 별반 다름이 없는 일상 안에서 장엄서원을 발하는 것도 멋있는 일일 것이다.
83. 찬미가는 독서기도를 올릴 때부터 아침, 점심, 저녁, 끝기도를 올리기까지 성무일도의 서막을 알리는 축포다. 아침일찍 찬미가를 노래한다는 것은 저녁, 끝찬미가를 올리는 것과는 다른 분위기다. 왜냐하면 아침에는 목이 컬컬해서 맑지 않은 소리로 인해 영혼으로부터 고취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미가 귀절과 질제로 일치되는 느낌이 들때에는 잠긴 목소리와는 무관하게 대자연의 진동하는 메아리로 충분히 감격될 수 있다.
84. 찬미의 노래는 신랑과 신부가 속삭이는 사람의 고백과 같다.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품위있는 자세로 가장 아름답게 목청 돋우어 올리는 고백의 노래가 바로 성무일도의 찬미가, 시편, 찬가 등이 될 것이다.
85. 임무의 대리자로서 교회에 속해서 교회의 기도를 완성하는 차원으로 드리는 성무일도는 가계화된 대자연에 공적인 해방을 알리는 선언문과 같다.
86. 시간견 찬미를 드린다는 것은 기도가 끊기지 않고 연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제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구는 둥그니까 세계 각처에서 서로 다른 시간대에 올리는 시간참미를 모두 연결시켜본다면 결국은 끊임없이 찬미의 노래가 올려지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개별적인 나의 경우만을 놓고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만을 위한 시간 찬미에 있어서 찬미와 찬미 사이의 공백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전체 교회의 범주에서 본다면 아무문제가 없지만 나 개인 만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나의 찬미가 교회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중요하므로 기도를 엄추고 있는사이 시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만을 드릴 수도 없으니 말이다. 좋은 방법이 있다. 기도가 끝나더라도 끊임없이 그 여운을 느낌녀서 그 감흥을 흥얼거리면 어떨까? 노랫가사 중간에 허밍을 넣어서 노래의 여운을 남기듯이말이다.
89.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는 일과중에 가장 중요한 시간대에 편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침시간 6시부터 7시 30분까지 약 한시간 반 정도의 시간은 하루 일과 중에 가장 유익한 시간임을 날마다 느낄 수 있다.그런연유로 인해서 좀 더 들여다 보는 데 막상 아침기도를 빼먹으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그리고 늦잠을 자고 싶지만 아침 기도시간이 되면 나도모르게 눈이 떠지고 일어나게 되는 연유는 무엇일까? 그 시간을 잘 지키면 아주 뿌듯한데 그것은 기도를 빼먹었을 때 알 수 있게 된다. 이제는 겨울로 접어들고 아침기도와 미사성제 그리고 묵상까지 끝나더라도 동녘이 밝지 않다. 겨울은 그런 의미에서 기도의 계절이자 묵상의 계절인 것 같다. 동이 틀무렵이 기도시간과 일치 되기 때눔에 기도 시간이 신비롭다. 그리고 청아하다.
90, 기도에 몸이 벤 수도자와 몸에 기도가 밴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기도에 몸이벤 수도자는 의식적으로 마지못해서 의무감으로 명예심으로 그렇게 기도하지만 몸에 기도가 벤 사람은 주위를 온통 기도하는 분위기로 만든다. 몸에 기도가 베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기도하는 분위기 속에 있는 것이다. 시장통을 가더라도 시끌벅적한 수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더라도 그곳은 기도하는 곳이요 모두는 기도하는 데 유익한 사람이 된다. 몸에 기도가 벤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기도가 발출되는 것이다.
92. 시편과 독서는 단순히 성경을 읽고 노래하는데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시편 한편을 읽고 묵상하기위해서는 사실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평소에 기도를 드리다보면 짧은 시간에 많은 시편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날에는 아주 집중해서 기도에 몰입한다고 생각하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을 보면 시편기도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내 생활과 너무 막연히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추상이나 관념의 유희로 머물다가 사라질 뿐인 것이다. 그러니 시편을 길게 늘여 기간을 정하고 한 소절씩 오랜 시간동안 묵상한다면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94. 기도시간을 놓치게 되면 그 기도를 늦었더라도 드려야 하는가? 꼭 그러지는 않아도 되지만 오히려 시간을 내서 더 오래동안 머물고 싶을 때가 많다. 꼭 하지 않아도 될 일들에 쫒기면서 기도를 소홀히할 수는 없다. 오히려 단호한 자세로 기도에 임할 필요가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지않고서는 결코 제 시간에 기도를 드릴 수 없을 것이다.
96. 공동으로 성무일도를 바칠경우는 노래로 하지만 개인적으로 성무일도를 바칠경우에는 혼자 읊어야 하는데 그럴경우 의외로 홀로 노래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당에 홀로 앉아 성무일도를 노래로 바치려면 대담한 마음과 인내와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숨도차고, 목이 잠기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간혹 혼자서 기도할 기회가 온다면 꼭 노래로 바치고자 한다. 지금까지 기회가 맍지 않다 몇 번 밖에 노래로 드려보지 못했지만 이제부터라도 목청높여 부르고 싶다.
99. 성무일도를 노래로 바치는 것은 전통적으로 인간적 행위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홀로, 혼자서 바치는 것보다는 둘 이상이 서로 계응으로 나누어 성무일도를 바침으로써 주님께 올리는 찬미의 노래가 성전에 울려퍼저 영혼의 찬양으로 봉헌될 것이다. 그리하여 성무일도 뿐만 아니라 전례의 모든 부분, 그리고 일상 생활에까지 그 영향이 뻗어갈 것이다.
100. 영혼의 목자인 주교들과 사목자들이 시간경을 공동으로 성당에 모여 바칠 수 있어야 하지만 현 실정으로는 너무나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자들의 업무는 각 개인별로 시간차이가 있을 것이다. 사목상 처리해야하는 성무는 사목자들을 한데 모으는데 걸림돌이 될수 있다. 그래서 특별한 날, 사목자들이 한데 모이는 날의 지정이 권장되어야 할 것이며 그러한 특별한 날을 정기적으로 배치해 스케줄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다면 자신의 영혼 만이 아니라 교회 구성원의 거룩한 영혼, 신자들의 모든 영혼들을 위한 기도가 되어 봉헌 될 것이다.
102. 전례 주년 안에 잘 짜여져 있는 기념일들을 잘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기념일들은 그리스도를드러내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삶을 묵상하는 것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다양한 모습 안에서 으느 기념일 만의 특수한 의미를 발견하여 부분적인 영적 소산에 만족하지말고, 이를 확인시키고 그 안에서 전체에로 확산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103. 전례 주년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캐내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로 전례주년의 다양함과 같이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고 간단한 묵상으로 그 신비에 모두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비로부터 인간의 구세사에까지 연결하기 위한 다리로서 성모 마리아의 역할이 전례주년의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에로 이르는 열쇠를 발견하고 그 열쇠로 그리스도와의 친밀, 하느님과의 친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도구가 되는 것이 전례주년의 다양한 기념제인 것이다.
106. 전례주년의 최고봉으로써 매 주일을 배정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일곱째날 쉬셨고 그 날은 인간 구원의 날, 해방의 날, 파스카의 기념일로 봉헌되기 때문이다. 그 날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법과 정의를 공평하게 받는 쉼의 날이요 펴오하의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적 심판의 날로 상기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롭게 공평하게 더욱 특별하게 아껴주고 위로해주는 의미로서 상급을 내리기 위해 판단하시기 위한 날이기 때문이다. 때가 이른 날이 바로 주님의 날이다. 때가 이르렀으므로 소출을 거두어들여야하고 거두어들인 소출을 정산해야 하며 그 노고에 맞게 배당을 받아야 하는 희망으로 가득찬 날이 바로 주일인 것이다.
108. 성인들의 축일과 고유축일들의 지향과 더불어 개인적인 지향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와 지향으로 같아야한다. 개인의 지향은 성인들의 지향 안에서 보충되고 성인들의 지향은 성모님의 지향안에서 보충되며 성모님의 지향은 교회의 배필이신 그리스도께로 정향되고 경축되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의 신비의 완전한 전례 주기가 완성될 것이다.
110. 사순절에 실시하는 보속행위로서의 절제는 나 개인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많은 이들을 기억함으로서 그 위미는 더해진다고 생각된다. 금식중에 어렵고 힘든 이들을 기억하고 생활중에 꼭 필요한 것 외에는사거나 취하지 않음으로써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품위 있기 때문이다. 그 품위는 권력과 사치, 사욕으로 말미암은 도도하고 고상한 모습이 아니다. 그 품위는 사람의 외모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발산하기에 사람과 사람이 눈빛과 눈빛이 마주치지 않으면 깨닫기 힘든 고결한 품위다. 그리고 그러한 애절한 대화의 통교를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품위다. 마지막으로 함께 살아보고 함께 일을 해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품위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112. 언어와 결부된 거룩한 노래는 인간의 영혼을 지도한다고 생각된다. 내가 즐겨부르는 노래는 시편 23편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는 아무것도 아쉽지 않네 푸른 풀밭 시냇가에 쉬게하사 나의 심신을 새롭게 하네라는 시편이다. 특히 전례 중에 다 함께 시편성가를 노래로 합창할 때 그 음율의 높고 낮음으로인해 감동은 더해진다. 교중미사는 그런 맥락에서 주님의 몸과 피로 이루어진 거룩한 진치지만 그 잔치를 더욱 성대하게 시작하고 마무리 짓게 하는 거룩한 노래가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115. 신학교에서의 교회음악 수업은 음악적 재능을 연마하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음악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들을 바탕으로 오늘에 이르러 불려지고 있는 성음악의 연관성을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전통 안에 머무르지 못한체 단순한 음악적 기교만을 부린다면 신자석에서 듣는 사람은 덜 하겠지만 실제로 노래하는 사람들은 그 깊은 심오함으로 젖어 들 수 없다. 그러면 노래를 하는 것이 힘든 노동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며 아무런 변화도 업이 민밋한 전례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성음악을 모든 신자들이 배워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개인적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성가대에 드는 것도 그런의미에서 본다면 더 넓은 의미에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더 넓은 곳을 향하여 더 높은 곳을 항하여 더 깊은 곳을 향하여 더 거룩한 곳을 향하여 노래를 해야할 것이다.
120. 파이프 오른간은 그 중우한 음율만으로 전례 참례자들을 정신적인 충만상태에 놓이게 한다. 다른 여느 가벼운 악기들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밤을 꼬박 세워서 보초를 섰던 파수병이 기상 나팔을 들고 새벽의 통틀녁을 기다리는 장엄한 심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파이프 오르간의 중후함일 것이다. 그리고 초병은 이어서 동 틀 때를 맞추어 감미롭게 기상나팔을 불면 잠들었던 이들이 만ㄺ은 소리에 눈이 뜨이듯이 파이크 오른간도 마찬가징로 침울한 영혼, 상처로 피폐해진 영혼, 잠든 영혼을 불러 일으키며 죽음에서 생명에로 활기를 불어 넣어주며 영혼의 해방감을 가져다주는 음율로 들려오기까지 한다.
122. 아침에 눈을 뜨면 맑게 울리는 새 소리도 좋지만 찬란한 태양이 어두움을 헤치고 황금빛 보다 더 아름다운 빗살들을 뿌려놓는데 그 광경을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산과 바다를 찾는다. 그와 같이 성음악과 더불어 미술도 창조주의 아름다움을 함께 누리기 위한 인간의 부단한 노력의 결실일 것이다. 그림은 삶과도 같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듯이 그림 또한 즉 미술 또한 예술적 인간의 삶의 모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은 삶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미술을 하든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고 볼 수 있지만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누쌀을 찌뿌리는 그림만은 제고 되어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123. 미술 양식이 어떻든간에 중요한 것은 보이는이로 하여금 하느님의 거룩한 업적을 상기시키는지에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크 양식이라는 화려한 성미술도 어떤 면에서는 핍박받은 잉카족과 마야족의 피의 댓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보석이 일그러진 예술로 어떻게 하느님의 거룩하신 업적을 펼쳐 설명해 보여야 할지 걱정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나만의 것, 그들만의 것은 없는것 같다.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가가자의 하느늼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또 다시 자기 안에 갇히고 고립되고 단절되고 서로 이질적인 미술이 되어 서로의 전혀 다른 모습을 마주대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과 실망을 동시에 자아낼 수 있도록 말이다.
124. 짚으로 영대 삼아 걸치고 맨발로 서서 대나무를 짚고 서서 거룩한 성채를 지키는 수문장으로 봉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을 실제로 살아보고 싶은 유혹도 있기 만련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검소함과 외적인 화려함을 서로 불가분의 관계처럼 여기고 혼합시키려는 시도를 가끔은 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외적인 기풍과 아름다움이 없이는 하느님의 품위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다는 것이다. 만일 있더라도 볼 수 없을 뿐더러 느낄 수 없을 것이다.그러니 보이지 않는 종교적 감정을 속으로 삭히고만 있을 것인지의 의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질제로 생활속에 참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성당의 모든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의 합일에서 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몸중에 피부가 모두 상해버리면 몸이 겉에서 안으로 썩어 들어가듯이 성당도 외관만을 너무 치장하거나 무시해 버린다면 신앙심에 상처를 주어 종교심성에 악영향을 줄 것이다.
127. 예술가들과 특히 미술가들은 요즈음 기계 모조품들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이 한획 한획에 정성을 들이고 칠하고 덧칠해서 완성한 아름다운 미술품이 그대로 복제되기까지 단 몇 초밖에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좋은 예술품들을 창조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노고에 더 각별히 협조해 주어야 할 것이다.
128.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인간사의 모든 분야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건물 덩어리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잇다. 제대모양, 감실의 고귀함, 성세장소, 건축물의 균형미, 미술품, 조각품, 유리공예, 벽화 종탑, 성당지붕모양, 외벽, 마당, 조경의 푸르름드로 인해 교회가 되고 그 교회는 완전히 살아서 숨쉬며 느끼며 성장하는 것이다.
129. 성미술과 성미술품 안에서 철학적, 신학적 의미를 발견해야할 의무가 모든 보는 이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사목자들은 각별한 교육과 설명으로 신앙인글에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성미술의 역사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역사와 같을 것이다. 예수님은 아무 그림도 남겨놓지 않으셨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ㅇㅖ수님을 그림으로 보고 있고, 그 형상을 통해 고통스러움을 직접 보고 함께할 수 있는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그림이라면 분명히 깊은 철학적 배경과 신학적 관점의 신앙심이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역사이며 곧 삶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삶이자 곧 우리의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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