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회문헌묵상

사목헌장(Gaudium et spes)묵상

jasunthoma 2008. 11. 11. 08:01

사목헌장(Gaudium et spes)묵상


1.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동 안에서 완전해 질 수 있으며 내 안에 그 말씀이 새겨져 있으면 살아서 움직이며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은 돌판에 새겨졌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부드러운 마음에 새겨지기 때문에 살아있으며 움직이는 것이다. 무엇이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구원으로 들어갈 수 없다. 베짜타 못가에서 서른 여덟해나 아파서 꼼짝할 수 없었던 병자는 자기가 움직일 수 없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연못의 물이 출렁이며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었고 또 그러한 물결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아무도 다가가서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묻는 이는 없었다. 그저 잠잠한 연꽃처럼 조용한 상태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병자에게 다가가신다. 그리고 연못의 물결이 움직여지기를 보고있던 병자에게 연못 물이 움직여지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신다. 아무에게도 38년간 관심을 받지 못한 채 그저 물결만을 바라보아야 했던 병자의 마음에 돌을 던지듯 말씀으로 다가간 예수님께서는 당장 병자를 건강한 삶에로 부르셨다. 물결이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또 그 물속으로 던져지지도 않았지만 병자는 자기 들것을 들고 일어나 걸어갔다. 살아서 움직여진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 밖에서 구원을 찾았으나 예수님을 만나고부터는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물결을 만났고 이미 그 출렁이는 물결이 내 안에서부터 있기 때문에 내가 물속으로 던져지지 않아도 구원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연못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연못이 내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말씀의 체험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부드러운 마음속에 말Tam의 돌을 던지시는 분이시다. 그 돌이 내 속으로 들어오면 나는 출렁이게되고 변화하게 된다. 기뻐서 환오를 지르기도 할것이고 아파서 통곡을 쏟아내기도 할 것이다. 베짜타 못가의 병자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치유 받을 수는 없는 현실이지만 예수님은 살아계신 말씀으로서 지금도 세상에 충만해 있으니 이제는 그 말씀이 돌이 되어 내 속으로 던져져 내 마음의 물결이 출렁이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이 세상에 충만해 있는 말씀의 연못으로 돌이되어 던져져 말씀의 물결이 출렁이며 살아서 움직이도록 널리 확산되도록 투신해야 할 것이다.


4. 현세의 인생과 후세의 인생은 어느것이 중요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것은 시간의 여정 중에서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좁은 시야의 의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순전히 한 인간으로서 개별 존재자로서 인생을  바라본 협소한 소치라고 생각된다. 단순히 한 인간의 인생여정은 너무도 불완전해서 어떻게 보면 삶이라고 이야기할 것도 없다. 금방 피었다가 지는 꽃처럼, 아침에 맺혔다가 해가뜨면 사라지는 이슬처럼, 바람처럼 허한것이 개별 존재자의 실재라고 본다면 인간의 삶을 진정한 의미에서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후세의 인생 , 아직 오지 않은 인생 그러나 누군가는 그 종착점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곳에로 넘어가는 한계점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며 현세의 인생을 지낼 수 없다. 넘어가는 시점은 더 이상 삶으로 점철되는 시간의 세계가 아닌 영원의 세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않는 영원의 세계, 빛도, 어둠도, 낮도, 밤도 없는 무의세계 그러나 개별존재가 실존하는 세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활의 세계, 새로남의 세계 그 세계는 지금과 같은 육신의 틀을 필요치 않는 세계가 온다는 것을 알 수 잇다. 죽음도 태어남도 없는 세계 감각도 영혼도 필요치 않는 세계 더 이상 굶주림이 없고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는 세계, 그런 세계에 도달하기위한 여정이 현세의 인생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5. 과학의 발전으로 기술의 개발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인간의 편의를 도모하고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인간의 힘으로 육체적 힘으로 불가능한 일들을 기계화와 전산화를 통해서 이루어 나가는 인류는 급기야는 기계에 의존해버리고 말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한낱 사고하는데에 그 목적을 둘 뿐이지 삶에 전반적인 노고가 온전히 기계에 움직임으로 전개되어 나갈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무능한 인간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인간이 기계조작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익히는데 많ㅇ느 시간과 노고를 투자해야 할 것이다. 기계를 손쉽게 조작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업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기계의 힘과 능력이 자기 것인양 여길 것이며 그러인한 자가당착과 자기 기만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인류는 수렵생활에서 농업으로, 그런다음 공업으로 그리고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기계적 생명을 개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회를 살고 있다. 신적인 영역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이러한 지향이 전혀 필요치 않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러한 능력에까지 이르기위한 인간의 노력이 시대에 뒤처지는 사람을 죽음에로 내몰 수 있는 위험성을 전혀 개의치 않고 있음은 큰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하느님의 산물인 자연 속에서 인간도 하느님의 산물임을 부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7. 사고방식의 변화는 인간이 세속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혼란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인간적으로 사람이라면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세속에 몸붙여 살아가는 동안 정말로 소중하고 가치있는 생각들이 실제로 드러나는 결과에 대한 만족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정의롭지 못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선한 일을 한다면서 희생봉사적 마음으로 모두를 희사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빚더미와 원망의 소리뿐일 것이다. 마음만 뿌듯한 것으로는 그 뒤에 닥치게 될 지상생활의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려움에 처하기 이전에도 한 사람은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였고 상황이 나빠진 후에도 소중한 사람임을 떨쳐버리기 쉽지않은 것이다. 이렇게 생명을 부지하듯이 사람의 상황도 좋으면 좋은 그대로를 유지하고 싶을 것이다. 모두를 내어주는 희생적인 봉사를 실천하는 것은 특권인것 같다. 봉사적 특권, 희생의 특권은 사고방식의 변화와 거리감이 드는 것 같다. 처음의 마음이 변화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모두가 선하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기에 충분할 것이다.


10. 인류의 불균형은 그다지 인간의 불완전함만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정해진 궤도 안에서 시간과 공간의 불안정이 인간의 삶에 직접적으로 제제를 가하고 있고 이어서 인류전체에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우주적 창조 원리안에서 세계의 창조와 인간의 객체안에서 실재적 존재는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 세계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듯이 인간은 이성과 감각의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감각의 요구를 조절할 수 있는 이성과 이성의 나래를 펼치도록 무한히 개방되어 있는 감각적 자유는 서로 존재적인 것을 존재답게 발전시키는 동력인인 것이다. 비록 불완전한 감각적 사유지만 또한 감각적 자유지만 이 모두는 불균형을 형성하기위한 동기가 아님은 확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완전으로 향한 근원임을 알 수 있다.


11. 참된 표지는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리 중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리움 받은 사람들과 그와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심하게 대두될 수 있는 물음이 아닐 수 없다. 즉 하느님 백성으로 불리움 받은 사람보다 하느님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속에서 알차게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비교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무의미하다고 생각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혹은 이 우주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어느누구도 하느님의 은총안에서 제외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건 믿지 않건 제외되지 않는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하늘나라로 가고 믿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는 지옥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12. 세상 만물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정식에 모든 인간은 동의한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익히 밝히고자하는데에 일치점을 찾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알아 모신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때로는 자기 중심에 치우쳐서 하느님은 피상의 세계에서 나와 직접관여하지 않으니 별 관심 없다고 느끼기도 하며, 그럴때는 절대적인 고독감에 휩싸인다. 왜 그럴까? 부모, 형제, 친지, 친구, 이웃, 사랑하는 연인이 함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중심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분은 누구보다, 어떤 존재보다 더 친밀하다. 그분과 떨어져서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그 외로움을 채워줄 수 없다. 그러 겉으로만 위로를 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위로를 받을 때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13. 죄를 가리켜 갈라놓는 모든 것으로 규정한다면 너무 협소한 표현일까? 모든 것을 갈라놓는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갈라놓아서 나쁘지 않은 것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느님의 창조사업은 가르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심지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가르셨다. 그러니 이렇나 모든 것을 죄로 볼 수야 없지 않을까?


14. 영혼과 육체의 단일체인 인간은 영혼의 핵심이라고할 수 있는 정신과 육체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쉽게 생각하여 육체의 핵심인 마음이 육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육체도 영적인 것이다. 정신뿐만 아니라 마음도 영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적인 존재다.


15. 인간의 지성은 판단함으로써 죄의 상태에 매이게 된다. 판단은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지혜를 입은 사람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대답할 뿐이다. 누군가에 의하여 판단받고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하느님으로부터 오늘 빛에 의해 환히 드러나는 것이지 그 판단하는 사람의 지성을 통해 옳고 그름이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지성의 본질은 은통의 빛이기 때문이다.


16. 양심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법이다. 세상의 법은 많은 부분 오류와 무지, 착오들로 인하여 정의로움을 추구하고 있으나 완전히 정의롭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있지만 양심의 법은 아무런 티도, 흠도, 결함도 없는 완전한 법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은 신적인 영역이며 양심은 인간이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규정된다면 불완전한 어떤것을 대상화시켜서 유비적인 것으로써 양심을 바라볼 뿐이다. 양심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17.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의 외재적 은총이다. 반면 양심은 하느님의 내재적 은총이다.


18. 죽음을 소멸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소멸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소멸될 것이면 아예 생성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성된다는 것은, 그리고 태어난다는 것은 영원에 속한다. 일부분이 없어졌다고 전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19. 무신론은 억견이다. 하느님이없을 수 없는 절대적인 상황에서 그럴듯한 예를 들어 설명을 가하지만 철없는 논리다. 만약 무신론을 주장하려들면 먼저 무인론(無人論)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20. 인간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말은 있는 것과 있게 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있는 것 만이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무신론을 정당화 할 수 잇을 것이다. 그러나 길바닥에 박혀있는 돌 하나라도 설명할 수 없기에 무신론은 개인주의적 산물이다.


21. 믿든지 믿지 않든지 그 자유의 주체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누리는 인간은 하느님의 백성이다. 누구든지 먼저는 하느님 백성이었으나 지금은 믿지 않는다고해서 하느님을 벗어날 수 는 없다. ‘잃었던 아들’ 비유에서 아버지를 부정하고 집을 떠난 둘째 아들ㅇ느 세상 재물이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아버지를 잊을 수 없었으나 그 모든 재물이 없어지자 아버지를 찾게 된다. 반면 아버지는 아무런 재물과는 상과 없이 아들을 생각하며 돌아올 때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무신론자들이라고해서 배척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그들에의해서 불행한 일들이 자행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니 교회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관대한 방향으로 나아가겠지만 믿음의 좋은 본보기를 지속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22.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상이다. 그 분은 죄 없이 나셨지만 죄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죄와 함께 죄속에서,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을 치듯이 계셨다.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죄를 사하기 위하여 자신을 재물로 바치셨다. 순수한 결정체인 소금이 물속에서 녹지 않고 있으면 그 물을 변화시킬 수 없다. 부폐하지 않게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려 자신을 녹이듯 소금처럼 희생하시어 이 세상이 변화된 것이다.


23. 인간관계 중에서 보이는 관계와 보이지 않는 관계가 있을 것이다. 모든 보이는 관계는 보이지 않는 관계를 표상하고 잇다. 그저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호관계를 보더라도 그 내면에는 보이지 않는 관계가 숨어있다. 보이지 않는 관계의 의도는 인간의 욕망일 수 있다. 또한 사랑일 수도 있다.


24. 인간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공동체성을 의미하고 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서로 의지하고 주기도하고 받기도하며 뺏기기도 하고 빼앗기도하며 살아간다. 공동체가 어디로 가는지는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많을 때, 뺏기는 사람보다 빼앗는 사람이 많을 때 공동체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5. 인간이 모이는 장소는 모두 사회성을 띤다. 해야할 일이 정해지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정해진다. 누가 먼저 말할 것도 없이 자연적으로 지킬것과 지키지 않을 것들이 설정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선을 지향하고 악을 지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 있어서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공동체 보다는 전 인류를 염두에 두는 선으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26. 공동선이라고 하는데에서 그 범위를정할 수 잇을까? 공동선의 최대 범위는어디까지 일까? 전 인류보다 더 큰 공동선은 무엇일까? 대 자연보다 더 큰 공동선은 무엇일까? 변화와 발전의 주체를 인간이 아닌 하느님께로 돌릴 때 최대의 공동선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27. 인간의 생애를 배재한 현직에 관한 존경은 넓은 의미의 인간 존경이라고 할 수 없다. 갓난아기와 노인에 이르기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과정에 던져진 인간이기에 인간은 인간에게 최선을 다해 존경해야 마땅할 것이다. 다만 그의 행동은 본받음의 대상이기에 존경과는 거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28. 인간의 반대는 무엇인가? 짐승, 동물, 사물, 생물, 식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나 것들은 인간의 반대가 아니라 인간의 동반자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인간의 반대는 똑같은 인간이다. 그렇다 인간은 바로보나 옆으로보나 뉘어서보나 거꾸로보나 같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반대자도 인간이기에 그 인간에 대한 존경은 당연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을 진정 사랑할 때 그 반대자는 반대를 버리고 나와 같이 하는 동료가 될 것이다.


29. 평등과 정의는 하느님도 해결할 수 없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정말 그럴까? 그것은 과장된 인간의 욕심에서 나오는 엄살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편이 낫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울로 측정하듯이 인간의 모든 상황을 배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만족할 수 있는 배분이 이루어 진다면 정의와 평등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배분을 담당한 사람이 공평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고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만족하면 될 것이다.


30. ‘나만 잘하면 그만이다’라는 말과 ‘나만 좋으면 그만이다’라는 말에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발상이 내포되어 있다. 내 배가 고프다고 남의 빵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훔치거나 바쁘다는 이유로 교통 신호를 어기는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행위이며 이는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극복하는데 있어서 그 사람의 개인적인 상황을 어느정도 연대책임에 입각하여 참작해야 할것이다. 만약 그런 잘못된 행위에 책임을 물어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면 그러한 일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사회적인 연대성 안에서 그들이 보호 받고 있다는 신뢰를 그들에게 심어주는것은 무엇보다도 필요할 것이다. 그럴 때 개인주의적 윤리관에서 공동체적 윤리관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31. 내가 교육받고 수덕을 쌓고 있는 것은 산속에 뭍혀 살며 현실 도피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양을 갖추고 덕을 쌓은 만큼 사회에 환원해서 좋은 귀감이 되어야 할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이세상에 오셔서 보여주신 모범들이 그러 예수님의 문제로만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교에서 받은 교육과 영성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에 드러내어 보일 때 교육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현세에 참여한느 것이 될 것이다.


32. ‘말씀’으로 창조된 하느님은 인류 사회 어디에서나 다른 문화 속에서 같은 의미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모두들 표현 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지향된 의미는 ‘말씀’ 그 자체이며 하느님의 의도된 사랑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문화, 다른 종교심성, 다른 가치관, 다른 지역사회, 다른 정치적 상황에서 당신의 ‘말씀’으로 그들에 맞는 방법으로 가까이 가실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거나 척결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범으로 이를 수용해야 할것이다.


33. 인간은 활동하는, 행위하는 존재다.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움직이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부동자세로 않아 있다 손 치더라도 인간은 변화하며 움직이고 있음은 기정사실이다. 그런데 발전,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실행되는 인간의 노력은 어떤 문제점들을 일으켜 왔으면 또한 어떤 도움들을 제공해 주었는가? 분명한 것은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문제점을 일으키기 위한행위가 아니라 인류의 선익, 편익, 실용, 경제성의 극북을 위한 행위 였다는데 그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34. 그러한 인간의 노력이 우주적 세계 안에서 인류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가? 단순히 물질의 변형으로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바벨탑을 더 높이 쌓기 위한 더 큰 희생이 그 저변에 드러나지 않게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에 와서는자원이 고갈되고 있음을 크게 우려하며 손쉽게 자원을 구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하여 우주에로 눈길을 돌리고 있음을 일부에서나마 볼 수 있다. 그러나 도대체 없어진 자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류가 개발과 발전을 목적으로 써버린 에너지 자원이 어떻게 생겨난 것이며 인간의 사용으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바벨탑을 쌓기 위한노력으로 사용되어 버린 자원이 고갈 되면 더 이상 인류의 활동은 없어지고 정지 할 수 밖에 없을까? 무엇보다도 확실해 지는 것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잇는 환경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과 더불어 자원 또한 고갈되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인간의 손에 좌우 될 수  없는 까닭이다. 하느님께서 거두어 가실 것이기에 그 전까지는 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35. 그러므로 인간 활동의 향상은 물질개발, 과학 발전에 있지 않고, 인간 내면의 개발과 자유의지의 충만에 있다. 외적인 성장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인 자아 완성에로의 성장이다. 그러나 사회는 이미 인간을 내적인 완성에로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인간의 완성에로 향하기에 배우고 숙달해야 할 기계적 행위들이 너무 지배적이다. 어느하나를 택하고 하나를 버려야만이 인간의 내적, 외적인 꼴을 갖추고 나름의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36.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들의 비밀을 알아내어 인류 사회에 선익을 줄수 있다는 것에 대한 희망은 기쁘기보다는 오히려 우려되며 걱정과 공포감마저 감도는 듯하다. 그렇다고 인간의 자율성을 침해하면서까지 규제를 가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자본의 배후에 있는 인류의 모든 노력이 선한 일이 되려면 자본을 형성하고있는 그룹들이 그리스도교적인 양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할 것들이 금융자본가들의 그리스도교화 일것이다.


37. 인간 활동이 간편해진 만큼 인간 활동의 윤리적 타락도 간편해 졌다. 이웃에게 도움을 간편하게 줄 수 있지만 또한 이웃에게 간편하게 해를 끼칠 수도 있게 되었다. 손가락하나로 가볍게 터치하는 극히 미미한 행위가 튼 도움을 주거나, 반대로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올바른 정신을 함양한 자아의 형성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시대에 있는 것 같다.


38. 인간의 개별 행동은 어떤 극단적인 단절을 경험하게 될 때 타락한행동을 서슴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알게 해주고 믿지 않고 있는 것을 믿도록 해 주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특히 인간의 고립과 단절감은 인간이 죽음으로 향해 멈추지 않고 가고 있다는 극한 상활을 인식하면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님의 파스카 신비를 그들에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파스카마저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더라도 그들 안에 죽음으로부터의 공포를 오히려 충만한 기쁨으로 바꾸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39. 새로운 땅과 새로운 하늘이 그저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그날과 그 세상이 꼭 오리라는 확신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 없어서는 안 될 믿음이다.


40. 이 세상이 온통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넘쳐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난다면 교회와 세계는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한 유기체로서의 면모를 한 층 더 보여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에 앞서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제자로서, 세상 곳곳에 그 사랑을 물들이기를 쉼없이 해야 할 것이다.


41. 개별 교회와 보편교회는 인류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밝혀준다. 특히 각자가 온전히 귀한 모퉁이 돌로써 그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자각하도록 도움을 받는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견고한 조직 사회처럼 보이며 여느 사회집단모임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 교회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면 곧 봉사적 권위로써 굳건히 서 있는 교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 사람이 아무리 보잘것 없어도 그가 봉사로서 권위를 행사한다면 어느 유식하고 지배권 있는 사람에 앞서 세상을 통치할 수 있을 것이다. 봉사적 권위로 세상을 통치한다고 함은 분명 현세 종말론적인 면이 보인다고 비하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넘어설 수 없는 현실도피로서 봉사적 권위가 아닌 외적, 내적 충만함으로의 봉사적 권위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42.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하느님의 법이자 하느님의 질서다. 인류사회는 인과응보적 방식으로 사람들을 규제해 왔다. 남의 눈에 티는 보여도 제 눈의 들보는 못보는 것이 사회적 제도다. 물에 빠진 사람이 계속해서 강물을 타고 떠내려 오는데 그 사람을 건져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사회제도의 면모라고 보여진다. 그 근원으로 올라가 더 이상 사람이 물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 사회제도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모범적인 입장에 서있다. 교회는 어떤 일이든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소급해 올라간다음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제도는 교회를 본받을 만하며 교회를 신뢰하고 따를 수 있을 것이다.


43. 그렇다고 현세 도피적인 발상으로 자기 임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현세의 직무는 천상국가를 기다리는 자에게 등한시 될 수 없는 복음적 행위다. 그러니만큰 현세의 직무를 이행함에있어서 복음적이지 못한 사람은 현세의 직무를 잘 수행한다고 자부하더라도 결국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일을 위한 일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먼저 그리스도의 마음가짐을 기억해야 한다. 그 간단한 기억을 빼고서는 어떠한 큰 일을 이루었다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세의 성과는 그 이루어짐도, 사그라듬도 신적 규정에의해서만 그 정점에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세우지 않으시면 어느것 하나 그대로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지성을 받은 인간은 누구나 알 것이기 때문이다.


44. 진리를 드러냄에 있어서 종교적인 행위와 문화적 행위는 상호 보완적인 위치에서 함께 완성되어 간다. 한쪽은 관습적 행위를 통해서 전달되는 확실한 방법인 반면에 다른쪽은 체계적 문자화를 통해 전달하는 다소 불완전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진리의 개념을 설명함에 있어서 의례 행위는 확실하고 직접적인 반면에 오히려 문자화시켜서 설명함에 있어서는 그 의미가 잘못해석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회적 통용가능한 개념을 무시한 채 독자적 방법의 개념만을 사용한다면 사회와는 동떨어진 진리로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진리는 사회로부터 통용되는 개념을 지원받았으며 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모든 사람들이 진리에로 모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5. 지상에서 통용되는 어떠한 선도 또다른 새로움이 될 수 없으며 만약 새로움이 있담녀 그것은 그리스도적인 새로움일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선의 시작이요 마침으로 세상에서 현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46. 구체적이고 특별한 것은 지극히 현실 직면적이다. 당면의 사태를 저버리고 그 어떤 성장도 할 수 없다. 교육의 확산과 의사 통용의 자율화, 세계화로 예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현실적인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해결책은 멀리 있지 않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내 안에 있고 너 안에 있고 우리 사이에 그 답이 있을 것이다.


47. 혼인에 대한 의식이 많은 부분 바뀌었다고 할지라도 인간 삶의 근본이 될 수 있는 혼인은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만큼 인류가 많이 불어나 다양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정식은 그대로 존속될 것이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그러한 정식에서 제외되었거나 스스로 포기한 이들에 대한 이해가 문제시 될 수 있다. 성가정을 이루며 인류를 존속시키는 역할을 계속적으로 수행햐야 하지만 일부 교양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편의를 위해서 산아제한을 서슴치 않는 것은 차후에 큰 문제로 다가올 수 있다. 인구 증가로 인한, 혹은 인구 감소로 인한 문제를 다루게 될 날이 온다면 교회는 직접적인 문제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소외된 이들이 소외된 채로 방치되어 살아가지 않고 사회적 분위기를일깨워서 결혼의 중요성을 부각시킬 필요가 절실히 요구된다고 생각된다.


48. 남녀가 만나 혼인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믿음을 전제로 하기에 가능할 것이다 서로에 대한 확신을 갖기에 서로 남임에도 모든겅을 맡기고 돌보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럴수 있는 요인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기인할 것이다. ‘아담이 혼자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라는 하느님의 관점에는 사변적인 의미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홀로 계신 하느님이시나 홀로 계시는 것이 좋지 않음을 익히 아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리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으로 당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신 것이 아닐까? 아담에게도 혼자있는 것이 좋지 않음을 보고 아시고 하와를 지어 만드시고 성가정을 이루게 해주셨다. 그러니 사람은 둘이 한 몸이 되어 자녀를 낳고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성가정은 그 자체로서 삼위일체적이라고 할 만하다. 부부의 사랑의 관계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독립된 개체로써 존엄하며 부부와 더불어 함께 성가정의 공동 설립자가 된다. 이들이 자라서 또 다른 성가정을 꾸려날갈 것이다. 그러므로 혼인과 성가정은 인류의 성스러운 신비 공동체다.


49. 부부가 서로 사랑함에 있어서는 각자의 자유를 인정하는 배려가 적극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ㅇ느 하느님 안에서 서로 자유로운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결혼이 구속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향이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성가정의 결합에 있지 않고 개별 목적을 향한 숨은 지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일 수 도 있겠으나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속박하여 결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서로에게 구속력이 가해져 자유로운 애정이 아닌 부자연스러운 애정, 피하고 싶은 애정, 고단한 애정이 되는 것이 아닐까? 결혼이 어떤 사회적 신분 변화의 목적으로 만이 아니라 그 내적 의미에 중점을 둘 때야만이 부부애는 더 거룩해지고 사랑스러워지지 않을까?


50. 사랑의 결실로 맺어진 새로운 구성원인 자녀들은 그들이 스스로 독립적인 위치에 서기까지 부모의 관심과 배려를받는다. 그러한 관심과 배려는 자녀가 부모를 향해서도 자연 생기게 된다. 부모에게 소중한 존재인 만큼 자녀들도 부모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은 분명하다.


51. 가정 형편을 고려하여 수태된 아기를 떼어버리는 행위야말로 지극히 하느님의 영역에 침범하는 죄악이 아닐 수 없다. 키울 수가 없어서 라는 미명하에 낙태를 하는 것은 스스로의 몸을 상해하는 것도 있지만 새생명을 돌과 맞바꾸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 생명은 결코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부부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고 그 댓가로 새생명을 받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약속을 그 계약을 스스로 맺고, 풀수 있는 자유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거북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낳는 것은 아버지가 하고 기르는 것은 어머니가 할 것이며 자라게 하는 것은 하느님이 할 것이기 때문에 자녀 출산의 부차적 걱정을 심화시켜 해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52. 행복은 대상에 있지 않다. 결혼하기 전에는 내가 결혼만하면 행복해질텐데라고 말하고, 결혼하고나면 내가 아들만 낳으면 행복해질텐데라고 하고, 아이를 낳고 나면 이 아이가 좋은 학교나와 좋은 직장, 혹은 유명한 인사가 되어야 할텐데하고 바램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다 이루어 놓았다고 자부하게 될 때 행복한가라고 묻는다면 아직 행복하지는 못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허다할 것이다. 왜 그런가? 행복은 이루어놓음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루어가는 과정안에 있다고 보는 것도 어느정도 근접하기는 하나 미약하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가정의 행복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의 신비를 깨닫는데 있을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는 신비, 내가 곧 죽겠지만 내 자녀의 생명이 내 죽음을 끊지 않고 연결해 준다는 것을 깨들을 때 비록 눈으로 볼 수 없는 다른 차원에서는 아니지만 육안으로 확인되고 감각으로 만져지는 차원에서의 행복에는 도달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53. 문화는 표현의 산물이다. 좋은 표현은 하느님을 향하고 좋지 못한 표현은 죽음으로 향하는 것 같다. 잔치집에서 잘 먹고 배부르게 되면 으레 두가지 유형의 상황이 연출됨을 볼 수 있다. 한 가지는 서로 환담을 나누면서 서로를 칭찬하고 그사람이 지금까지 걸어온 경륜을 축하하며 좋은 기억을 되살려주는 즐거움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서로 험담을 하며 옛날이야기를 꺼내어 그 사람의 잘못을 들추어내며 시비를 걸고 극막에 가서는 상을 뒤엎고 욕을 하며 멱살을 잡고 난리를 피워 잔치집을 전쟁터로 만들어 놓는 상황이 있다. 결국은 욕을 하기보다는 칭찬을 해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은 좋은 표현들로 드러나고 그렇게 되면 좋은 문화가 생겨날 것이다.


54. 과학의 발전으로 기계문명이이 지배하며 인류 생활의 곳곳에 그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문화란 전혀 새로운 생활형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간단한 조작으로 무대가 형성되고 연출이 시작되며 온갖 종류의 장면이 촘촘히 연결되어 움직일 때 그것을 관람하기만 할 뿐 그곳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문화의 장벽이 아닐 수 없다. 그와는 반대로 인류문명의 때를 덜 받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전기불도 없는 곳에서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이들을 과연 문화에 뒤쳐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55. 문화가 도구화, 기계회 되어가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그 말은 곧 물질화되어 간다는 말이다. 다양한 부분이 있겠으나 민감한 부분으로 볼수 있는 것은 언어의 문자화이며 문자의 복제를 짚어 볼 수 있겠다. 대량으로 찍어내는 출판에 대하여 과연 문화라 할 수 있는가? 대형서점에 쌓여 있는 무수한 책들이 한권씩이 아닌 수백권, 수천권씩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들을 제대로 접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과연 서점을 배회하는 행위가 문화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56. 물질의 풍족이 가져다준 문화보다 참으로 창작활동이 선행되는 문화가 활력을 얻어야 할 것이다. 뼈를 깍는 인고의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사회적 보장장치는 이러한 문화를 살리는데 필요할 것이다.


57. 신앙적인 문화, 그리스도교적인 문화가 널리 확산되기를 바란다. 어릴 때, 성당에서 성모의 밤 행사를 했는데 도로 행렬을 겸한 행사였다. 모든 신자들이 촛불을 들고 행렬을 하며 성가를 부르며 로사리오 기도를 바쳤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시기에 부처님 오신날 기념 행사를 도로행렬을 겸비하여 하는 것을 보았다. 불교행사와 성당행사가 다른점이 있다면 성모의 밤 행사는 밤에 하는 것이고, 부처님 오신날 행사는 한 낮에 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색적일 수 있으나 그 광경을 보는 각 신자들은 각자의 문화 안에서 사뭇 뿌듯했으리라 여겨진다.


58. 서양문화를 동양에 전파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 핵심에 있어서는 모두 동양 사상에 기인한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없다. 단지 입은 옷이 다를 뿐 같은 하느님 안엣 한 자녀라고 볼 수 있다. 한국문화는 특히 불교적 색채가 두드러진 것 같다. 그리스도교 문화가 들어온지 220여년에 지나지 않은 것이 그 요인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근본은 한국인의 심성에 있는 것 같다. 같은 땅에서 함께 살아온 백성들의 심성이 다르지 않은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도 그리스도교 문화가 어깨를 나란힌 할 수 있는 것은 큰 성과라고 생각된다. 문화적으로 이질감을 내세우기보다 조화를 이루기를 바라는 것도 우리민족의 심성이 아닐까?


59. 여러 문화 형태의 조화로 말미암아 인간을 살리는 문화로 거듭나기를바란다. 한 지구에서 살면서 다양한 문화를 일구어 왔다고 하지만 결국은 껍질의 다양화가 아닐까? 그 겉모양을 보고 문화를 판단하여 서로다르다며 배척하는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류가 성장해 오는 동안 여러 가지 혜택으로 지성과 영성의 수준이 높아졌음을 인정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인류는 아직 사리를 판단하기에 이른 미성년의 시기에 있었다면 지금부터의 인류는 서로의 통교를 통해 성장한 성년에 이르렀다고 볼 것이다. 높은 수준의 눈으로 본다면 더 이상 겉 포장지에 치중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60. 인류가 무지에서 깨어나서 어느정도 성인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이제 어느나라든지 지구촌이라는 울타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접하며,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며 그 소식을 국민에게 알려 공유항다고 보기 때문이다. 서로 협력관계에로의 변환은 국제사회에서 필수조건이 되었다. 더 이상의 지배는 없어져야 하면 하늘나라를 향한 사랑의 지배가 확산되어 인류의 행복이 증진될 수 있기를 바란다.


61. 인간 영성의 발전을 위한 노동의 단축은 필요하겠으나 대부분의 인간이 그저 시간을 즐기는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많은 부분의 노동력을 기계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에서 심신의 단련 목적을 가진 레저활동이 대세를 이루고 있으나 그 육체적 여가 활동속에도 영성이 침투할 수 있기를 바란다.


62. 신학자들의 다양한 요구와 연구를 따르는 것은 문화적으로 그리스도교가 확산되는 기준이 되어야 할것이다. 특히 신학자들은 여러문화 단체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참여를 통해 이들 문화가 시들지 않게 해주는 샘물을 길어 놀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문화의 주체인 구성원들이 그리스도교에서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인 창작활동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63. 지역경제에 있어서 어느 한쪽에로의 편중되는 현상은 그리스도교적 문화발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진다. 어느 한 지역에로의 금융자본의 집중은 그렇지 못한 지역에서보다 수월하고 원할한 생활형태가 조성될 것이다. 그러면 교회의 대형화로 사목자의 배려가 고르게 전달되지 못한채 소외감을 느끼는 계층이 형성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경제 발전은 여러지역에서 고르게 이루어져야 그에따른 종교적 문화적 이질감이 크게 대두되지 않을 것이다. 도시의 주거 환경개선으로 말미암아 여러 공장들이 농촌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은 소외감을 조장할 수 있다. 결국 도시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들은 금융권, 법조권, 관리들의 입지로 좁아져 버린 것이다. 도시의 대형교회에서는 인재가 넘쳐나서 그들 중에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시골벽지에서는 연로한 할머니, 할아버지들만이 모여서 소외감을 느끼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데 경제의 편중이 제도적으로 만들어놓은 산물이라고 생각된다.


64. 경제력은 우수한 인재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재화의 축적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만큼 재화를 벌어들이는 것 못지 않게 잘 활용하여 인류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사회 기반이 되는 곳에 투자를 하고 인류 증진을 위한 교육에 투자를 하는 행위야말로 경제가 인류에게 봉사하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65. 고른 경제발전은 인류의 숙원이다. 자기 지역에만 편중하여 발전하는 것을 부추기는 것도 지양해야 하겠지만 오히려 반대로 그 어떤 원조나 투자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곳에서도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사상적 단절로 인한 일부지역에서 해외 원조를 거부하는 행위는 지구촌의 고른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공동자원화 되어가는 지구촌의 자원이 경제의 고른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됨으로서 차후에 더 큰 노력을 감수해야 할 부담을 떠않게 되는 것이다.


66. 모든 경제사회의 차별을 부추기는 것은 금융자본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의 원리가 그리스도교적이지 않는 한 공정한 배분이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복잡한 규정과 계약관계에서 오는 수익창출은 인류경제를 좌우 할 정도록 막대하다고 할 만하다. 그들의 불로소득을 부분적으로 환우너시키는 장치야말로 그리스도교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더가진 사람도 없고, 덜가진 사람도 없는 공평한 배분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67. 일의 진행순서를 거슬러 시행하거나 뛰어 넘어 시행할 경우 많은 경제적 이들은 생길 수 있으나 결국에가서는 불안한 생활을 조장한다고 생각된다. 일의 흐름은 다년의 경험에 의해 꼭필요한 것으로 결정되었기에 그 순서에 입각해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속옷을 입고 겉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신발을 신는 형식의 흐름 순서를 말한다. 그런데 모자를 쓰고 옷을 입기위해 속옷이나 겉 옷의 통을 확대하거나, 신발을 벗지않고 혹은 신발을 신은 다음 바지를 입기 위해 바지통을 터무니없이 넓게 만들어 놓는 경우다. 이런 경우 자유자제로 생각없이 입을 수 잇어서 시간을 절약할 수 도 있겠으나 잘못하면 넓은 바지통이 어느 모서리에 결려 사람이 넘어져 다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않될 것이다. 노동을 함에 있어서도 작업 공정을 빼먹고 새행할 경우 올바른 노동의 결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68. 교회의 공동체가 어느 일정한 직분의 사용자만의 결정으로 움직이지 않고 서로 긴민한 관계에서 오는 대화를 통한 졀정으로 움직여지는 것 같이 사회 기업도 이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결정권자가 현장의 일은 하지 않더라도 시시각각으로 형장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를 전체 모임에서 뿐만 아니라 개별 면담을 즐겨 사용해서 정확한 진단이 올바른 결정에 최선의 도구로 작용하는 것처럼 이를 적극 대화의 촉매제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69. 현세의 재화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에 사용되어야 한다. 물론 현재를 위해서 지금 써야 함은 당연한 소치다. 지금 정해진 시간에 다 쓸 수 없을 만한 재화라면 나누어서 골고루 혜택을 받도록 씌여져야 한다. 내일의 재화는 내일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70. 성경에 ‘열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열달란트를 모두 활용하여 열달크를 더 벌었으나 한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땅속에 묻어 두어 그대로 간잭했다’라고 했다. 재화는 부풀리기 위해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위해 활용해야 한느 것이 재화다. 활용하지 않는, 통용되지 않는 재화는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할 수 없고,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없다. 부자들ㅇ느 재화를 만지지 않고 보지도 않고 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폐는 통용되어야하고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될 수 있는 한 많이 유통되어야 한다.


71. 사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자유롭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내것을 내것이라 하지 않고 공동의 것으로 보는 것은 전혀다르다. 사유권은 내것이라는 고립화시키기위한 주장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관리자의 역할로 주로 융통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먹기위해 사는 것과 살기위해 먹는 것은 그 차원이 다르다. 우선되고 선행되는 것이 지상적인지 천상적인지에 따라 질적 차이가 확연히 다르게 드러날 것이다. 살기 위해 먹는다면 세상의 사유재산이 비록 내 손아귀에 있다고 치더라도 많은 부분을 희사하고도 남을만한 영성적 뒷받침이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72. 겨자씨 한 알의 위력을 알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씨앗이 자라면 새들이 깃들이게 될 만큼 커짐을 알고 있다. 세상의 재화에 관한 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재화의 획득 가능성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재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의미함에 있다고 여겨진다.


73. 다윗이 아들 압살롭에게 쫓기다가 그 난관을 극복하고 예루살렘 도성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들 압살롭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다윗은 여러 장수들과 신하들 앞에서 베옷을 걸치고 식음을 전폐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이를 지켜보던 장수들과 신하들은 분노하기에 이른다. 아버지를 죽이려고 날뛰며 온 나라를 뒤집어 놓던 그 아들이 죽었다고 그토록 슬피울며 초상집 분위기로 나날을 보내며 백성들의 사기를 저하시켰기 때문이다. 압살롬으로부터 공격을 당해 죽을 위험에서 살아나기를 여러차례 겪은 그들은 다윗의 이런 행동을 이해못하고 참지 못했다. 그런데 다윗은 지혜로운 정치가라고 생각된다. 자기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충신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가볍게 처신했더라면 나머지 장수들과 신하들이 죽음을 당했을 때 어떤 생각들을 가질 것인가? 공동생활은 단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개인적이며 독자적이다. 순수 개별자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지 않을 때 공동체는 와해될 것이다.


74. 정치 공동체는 칼에 있어서 날 부분에 해당되며 화살에 있어서 화살촉에 해당된다. 그 공동체는 다양한 의견에 힘입어 전진할 때 추진력을 얻어 목적을 꿰뚫고 목표를 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정책적으로 공약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전방에서 직접적인 활동을 펴치는 것이 정치 공동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자신의 입신양명이 목적이 아니라 종들을 위한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75. 만인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정치적 중책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리스도교적이라고 할 수 잇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위와 같은 봉사직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며 사회 정치세력에서도 이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76. 교회는 정치의 영적 아버지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부폐하면 교회가 이를 정화 할 수 있으나 교회가 부폐하면 정치는 교회를 정화시킬 수 없다. 정치가 교회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으며, 깨끗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너무 정치에 유착된 모습은 우선적으로 고쳐야 할 것이다. 정치에 유착해서 교회가 성장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피로써 교회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치와의 단절 또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77. 전쟁은 많은 인명을 살상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이다. 전쟁이 없는 차원에 므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생각에서부터 오는 욕망조차 사랑과 평화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78. 전쟁없는 상태가 평화가 아니라는 말은 실감난다. 우리는 전쟁 없는 세상을 원하는 것이 아닌 정의로운 세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 정의는 그리스도의 아가페적 정의와 평화의 상태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것을 떠어주는 것은 정의로운 행위의 극치다.


79. 전쟁이 왜 일어나고 있는가?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정치적인 부조화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정치인들이 자기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국민감정을 자극시켜 전쟁의 정당성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자국민의 동의를 얻어 전쟁의 당위성을 형성시켜 자신들의 정권 연장을 꾀하려는 의도로 보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아무리 국민의 감정과 자국의 이익을 가져다 준다 하더라도 그 부다 더 나은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상대국의 많은 피해를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의 피해도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80. 전쟁의 야만성은 전쟁에 참여한 사람만이 아닌 민간인 대다수가 전쟁으로부터 불가불 피해의 대상으로 노출되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고 하겠다. 특히 어린이 노약자 여성등 국민의 대다수가 희생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 전면전의 야만성을 띠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은 중대하게 대두된다. 이러한 것을 알고 있는 한 전쟁을 막아야 하며 과학무기의 개발도 반길 일이 아닌 것이다.


81. 예방차원에서 접종하는 예방주사는 면역성을 키워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면역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해져서 나중에는 예방주사의 접종횟수를 늘리든지 약을 더욱 독하게 처방해야 소정의 목적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군비 경쟁도 마찬가지일 것�. 예방차원에서 군무기를 들여놓지만 끊임없이 신식무기가 개발되고 있는 한 군비축적을 멈출수가 없는 상황을 만든다. 이러한 군비경쟁은 전쟁을 도발시킬 내성만을 강화시킬 뿐이다. 언제든지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활에서의 유일한 방법은 인간 살상무기가 인간을 살리는 도구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82. 국제적 협력기구만으로 전쟁의 도발성을 잠재울 수는 없지만 그러한 협력기구의 역할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각 나라는 열린 마음으로 참여하여 자국의 애로사항을 회의석상에서 토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군비 축소에로 의견이 모아지고, 이를 실행하여 평화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83. 불화와 불의의 근본적 원인은 남보다 더 우월하고픈 욕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먼저 하기도다 남을 지배하여 일을 시키려는 지배욕은 전쟁척결의 우선대상에 속한다.


84. 서로의 의존관계가 강화되기 위해서는 나라별 교류관계가 활발히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을 수 는 없으며 만약 그러한 나라가 나온다면 그 나라는 곧 시대에 뒤처진 후 국제 사회에서 그 종적을 감출 것이다. 또한 일부 몇나라끼리만 관계를 맺는 것도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을 역사안에서 살펴 숙고해야 할 것이다.


85. 차관을 빌려쓰고 채무를 부담하는 등의 국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는 우호증진에 매우 적합할 것이다. 되받을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주지 않고 빌려주는 교훈은 민감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국제 관계에서 특히 모범적인 사례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86. 자국의 자원을 세상에 널리 유익하게 쓸수 있는 관용적 태도는 먼저 잘사는 나라에서 솔선수범을 해야 할 것이다. 자하자원만이 아니더라도 자국에서 인류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분야는 다방면에 걸쳐서 적소에 있을 수 있다. 특히 기술의 이전과 특허권의 사용에 있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87. 도시형 국가에서는 인구증가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농촌형 국가에서는 오히려 인구증가에 무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기계설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는 농촌형 국가라면 그들은 인구 증가를 장려해서라도 그 부족한 노동력을 해결 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공장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필요치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 인구가 감소함에 있어서 사람이 할 수 있는일이 줄어든것은 그 요인이 된다. 손수 일을 해서 벌어먹고 살고 싶어도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또한 현 시대의 분위기다. 그렇다고 산아 제한을 그 대책으로 상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갈수록 인간의 수명은 길어져가고, 여러 가지 요인으로 볼 때 그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는 안타까운 현신실이다. 당면한 문제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88. 자연재해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나라가 발생한다면 범 인류차원에서 모금활동이 적극 권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나 국제 도움 기구에 참여함으로써 지구는 하나라는 모토가 확산되어 실생활에 적용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즉 생각의 지평을 넓혀서 나와 모두를 위한 사업에 가담하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89. 이세상에서 교회가 없는 나라는 없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교회가 있으면 교회 정신이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그 교회는 범 인류적 활동에 한해서는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작은 일에 목메이지 말고 크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로 전향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90. 그리스도 정신으로 세상에 파견됨을 자부하는 것은 국제사회에 큰 신뢰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단체의 사람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카톨릭의 선명한 조직력에 근간을 두고 있는 신앙인들의 활동 또한 단연 돋보일 수 있는 것이다. 공정하고 공평한 활동은 그리스도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91.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교회의 성장이 절실히 필요하다. 교회의 숫적 성장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정신의 확산은 밝은 세상 행복한 세상을 건설하는 기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92. 신자든 비 그리스도인이든 무신론자든 모두가 한 형제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 형제, 한 식구, 한 통속, 한 국가, 한 지구촌이라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모두가 하늘나라 사업에 동반한 동료임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93. 하늘나라는 내가 밟고 있는 이 지구의 전체보다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내가 밟고 서있을 수 있는 그 조그마한 발자국 만큼의 땅이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말은 우리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잊지말아야 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상에다가 천상의 세계를 세우자는 말이 아닐 것이다. 지상의 필요성을 망각하지 말고 그 다음 목표인 천산을 바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상이 최고의 목표가 되어 상술한 문제들이 재삼 열거될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 힘을 얻어 순례길에 오른 사람은 복되어라. <시편 84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