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회문헌묵상

계시헌장(Dei Verbum)묵상

jasunthoma 2008. 11. 9. 22:47

계시헌장(Dei Verbum)

 

1. 카톨릭 교회는 계시종교다. “본래 성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이 생명”이라는 본문의 말씀은 보이지 않는 생명 그 자체이신 성부 하느님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온전히 인간에게 드러나신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보려고 하지 않거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물론 그들이 찾고 있는 그 분이 바로 성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생명이신 하느님이시라고 나는 고백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눈으로 사랑하고 싶다.

 

2.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사랑으로써 당신의 피조물을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 내게 다가 오셨음을 믿는다. 그리하여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업적과 말씀은 그 효력으로 인해서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다. 그저 친구와 같이 자유롭게, 평화롭게 우리에게 주어졌다. 내 앞에 있거나 내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닌 내 옆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와 같이 친밀한 말씀이자 행적으로 다가오기에 편안하다.

 

3.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때부터 말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 처음에 세상을 창조할실 때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인간인 나와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말씀이라는 중개자다. 말씀이라는 중개자는 하느님과 인간을 통하게하는 관계성이다.

 

4.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이 말씀과 다른 인간의 말은 영원한 생명의 효력이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참 말씀이시며 영원한 진리다. 왜냐하면 그 말씀에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형태로 시초부터 끝까지 세상에 존재하시는 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뿐이심을 믿는다.

 

5. 신앙의 복종은 주님께서 내게 주신 거룩한 지성을 온전히 당신 하느님께 내어 맡기고 이성 없는 의탁으로 귀의 할 때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6. 만물의 근원이신 하느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 인식은 당신이 만드신 모든 창조물을 통하여 자연적 빛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7. 구약에서부터 이어져오는 구원의 영속성은 신약을 통하여 완성되었고 지금 내 삶에 펼쳐져 있다. 이것은 분명한 하느님의 선물이며 당신이 계획하셨던 바이다. 내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삶으로써 증거하게 되면 이미 펼쳐진 예수님의 잔치 집에서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8.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 번 전해진 신앙을 포가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자애를 바라는 미약한 인간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전생애는  하느님을 향하여 개방되어 있기에 그분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9. 성경과 성전은 말씀과 말씀으 l말(언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구원경륜 속에서 한 번 인간으로 오셨고 이제는 그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알뿐 주님이 다시 내림(재림)하실 때까지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전은 말씀이 생동감있게 살아나도록 나를 일깨워주는 살아움직이는 말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 힘이 없이는 말씀은 그저 글로써 문자로써 적혀있을 뿐 아무런 감흥을 불러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내 안에 주님의 말씀이 되살아나서 나의 삶이 그리스도화 되기 위해서는 성경과 성전이 함께 필요함을 느낄 수 있다.

 

10. 성경과 성전은 교회에 위탁된 하느님의 말씀의 단일 위탁물이라는 데에는 아무런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정작 성경을 모르고 성전을 모름에 있어서는 깊이 반성할 일이다. 매일 말씀을 듣고 읽고 생각하지만 다음날 새로운 말씀이 읽혀질 때쯤이면 그전에 말씀이 잊혀지고 만다. 성전도 마찬가지로 전례에 참여하고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통찰을 하며 고백성사를 보지만 언제 전례의 감동과 성사의 깨우침이 나에게서 멀어져 있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님을 안타까워 한다. 그러는 나는 콩나물과 같은 존재인가? 하느님의 생명의 빗줄기를 끊임없이 받지만 이내 흘러버리고 남은 생명의 물은 극히 조금밖에 섭취하지 못하는 콩나물이 바로 “나”가 아닐까? 빛이 비쳐도 안되고 바람이 불어도 안되며 거름끼 많은 풍부한 영양을 먹어도 안되는 존재가 바로 “나”자신이 아닌가?

 

11.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죄스러운 인간이 들을 수 있으며, 읽을 수 있으며, 마음 속에 간직하여 그 속에서 살아서 움직일 수 잇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어떠한 방법, 혹은 절차를 통해서 가능할까? 아니면 아무런 노력없이 순간적으로 주어지기도 하는가? 사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달을 수도, 살아낼 수도 없는 아주 비천한 인간이 바로 나였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런데도 그 허물을 완전히 벗지 못하고서도 듣고 있으며 읽고 있으며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어떤 특혜인가?

 

12. 인간적인 방법으로 기록된 말씀이 성경에 쓰여진 문자다. 지금 내가 보고있는 문자는 어떻게 하여 변천되어 왔는가? 선포와 선교라는 활동을 통하여 성경의 의미를, 말씀의 의미를 전달하기는 그 한계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히브리어, 아람어, 희랍어, 라틴어, 유럽 각국의 언어들, 영어, 한문, 한글로 이어지는 기나긴 문자열의 여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어지는 말씀의 전파! 거기에 덧붙여지는 주석과 해석! 가장 좋은 것을 봉헌하는 마음으로 화려한 문체와 힘있는 문장과 탄탄한 구성으로 생명의 말씀을 기록하는것 은 인간적인 방법 중에서도 최고 귀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이루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앞선 교부들의 희생을 잊지 말고 그 희생적 노력이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힘써야겠다.

 

13. “말씀”과 “말”에 있어서 말씀은 인간의 목표가 되어야 하고 말은 삶의 근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목표는 말씀 자체이신 주님의 세계를 바라고 노력하는 사람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세계는 곧 말씀의 완성이다. 이 말씀의 완성을 향한 여정이 곧 우리 본성이다.

 

15. 구약의 계획은 신약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알았다. 근동지역에서 기록된 신앙고백이 온 유럽으로 확산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유럽에서도 구약의 계획을 받아들일 만큼 그들의 이전의 삶은 그 힘이 다했고 새로운 계획이 움틀 수 있는 기반이 무르익어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 것의 공유감의 형성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인지할 수 있다. 하느님의 계획이 펼쳐지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없다. 그 물이 흘러들면 짠물도 단물로 변해 온갖 생명체가 우글거리게 되게 해 주시는 능력이 하느님께 있기 때문이다.

 

17. 말씀은 사람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말씀은 사람이 되셨다와 우리 가운데 사셨다로 구분하여 본다면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고 나중은 우리 인간을 애기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와 나로부터 예수님에로 소급되는가?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와 나에게로 소급되는가? 아니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이라는 속성 속으로 몰입하여 예수님도, 우리도, 나도 한 날, 한시에 살았고, 살고, 살아갈 것이라는 것인가? 그 때에도 함께 있었고, 지금도 함께 있으며, 후에도 함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의 뜻으로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진다.

 

21. ‘성령의 말소리’를 반영시키는 성경은 주님의 성체와 함께 교회안에서 살아 있다. 성령의 소리는 심오하다. 그 소리는 어느 한 개인이 타인을 부르는 단순한 호명이 아니다.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들려오는 빛의 소리다. 내가 나를 부르는 소리는 전해지지 않고 새겨진다.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의 감도를 받아 내 마음에 새긴다면 내가 나를 부를 때 주님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형제가 나를 부를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23. ‘내 마음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라는 고백은 이웃에 대한 봉사적 사랑에서 바쳐질 수 있을 것이다.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단순히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하는 사람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것만이 아니다. 형제를 바보라고 격하하는 마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봉사적 권위와는 다르다.

 

25.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는 의미는 단지 성경만으로 그리스도를 알수 잇다는 편협한 범위의 국한된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말씀으로 충만한 전례를 통해서 그리스돌를 더 잘 알 수 있고 거룩한 독서나 명석한 강의를 통해서 더 깊이 알고 체험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수 있으나 그리스도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라야 오직 성경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는 이들에게 좋은 본보기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한 모임이라면 사도행전에서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성경을 홀로 읽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즉 가르침을 받는데 그 내용이 설경에서 말하고자 하느님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습에 가깝지 못하는 데로 이끄는 가르침이라면 오히려 오직 홀로라도 성경만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해 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