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사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과 중세 이단적 금욕 ․ 고행

jasunthoma 2009. 2. 28. 19:44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과 중세 이단적 금욕 ․ 고행

 

     11-12세기에 부유해진 중세 봉건적의 교회의 모습에 반대하여 원시교회의 사도적 청빈과 성경에 관심을 가지는 평신도가 많아졌다. 십자군 운동의 결과로 남자보다 여자가 수적으로 많아진 상황에서 경건한 삶을 살고자 했던 이들이 많아진 것은 자연스러운 시대적 흐름이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부류의 신심 단체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완전히 헌신하기도 하였으나 지도자에 따라서 급진적인 경향의 노선을 추종하기도 했다. 특히 카타리파는 성직자의 재산 소유에 반대하고, 성직자의 세속적인 생활을 반 그리스도교적으로 보면서 성직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가톨릭교회를 사탄의 회당으로 지칭하였다. 그들은 가톨릭적인 결혼, 성교, 육식을 거부, 인류전통을 거부하였다. 그들만의 금욕과 고행은 그리스도교적 교리와 상치되는 마니교적 이원론을 표양하기에 알맞도록 가르쳐졌다. 세상은 악마, 즉 구약의 악신에 의해 창조되고 또 그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데, 그때 인간의 순수한 영혼도 나쁜 물질 안으로 추방되었기에 이를 극복하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금욕과 더불어 세속을 완전히 단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사제들을 위선적인 죄인으로 낙인찍고, 성사들은 악마의 소산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한 그들의 모습이 복음적이고 가난한 교회를 꿈꾸던 많은 급진적인 개혁가들이 보기에 합당하게 보였기에 추종자들이 생겼고 그들 중에서 기사들, 귀족들, 영주들, 심지어 주교까지 추종자가 생겨나게 되었다.1)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게 살았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가톨릭적인 정통 신앙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삶으로써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중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이 아주 특별한 영성적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다. 당시 이단 추종자들의 모습도 그리스도교 정통 신앙 안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 프란치스코적인 고행은 이단적 금욕 ․ 고행과는 달랐다. 프란치스코의 고행은 그리스도의 상흔으로 드러났다. 그는 매일매일 갈바리아의 예수님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라 베르나 산 위에서 받은 그리스도의 상흔이었다. 그것은 산의 동굴 속에서 돌을 침상으로, 나무토막을 베개로 삼고 지낸 잠들지 못했던 밤들이 또렷한 정신으로 치러낸 신성한 것이라는 보증이기도 했다.2)

     그런 의미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삶은 중세의 혼란스러운 신앙생활에 있어서 복음적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영성신학』의 저자인 오먼은 진정한 복음적 삶은 사도 바오로가 제시한 성령의 열매와 같은 기준임을 제시한다. “누가 만일 하느님으로부터 오상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손과 발,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되 자기의 직분 수행에 덕행의 증거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사기나 망상의 희생물로 판단되기 마련이다.”3)


1) 참조: 황치헌, 세계교회사 강의록, 수원가톨릭대학교, 2008, 212-214.


2) 참조: 머레이 버도․ 홍윤숙, 프란치스꼬의 여행과 꿈, 성바오로출판사

, 19892, 194-195.


3) 참조: 박문수, 한국가톨릭대사전, 2002, 6447-6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