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의 몰락과 러시아 정교회의 부흥
콘스탄티노플의 몰락에 즈음하여 동 ․ 서방 교회의 신학 논쟁이 합의를 이룬 것은 교회의 일치 면에서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치는 쌍방이 동등한 상황에서 이끌어낸 합의로 보기엔 미흡하다. 그래서 한쪽의 일방적인 철회로 말미암아 파기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피렌체 공의회(1439)를 통하여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 달리 해석하던 신학적 입장을 철회하고 일치에 합의하였다. 오랜 논쟁 끝에 동방 신자들은 성령의 발출에 대하여 ‘통하여’(per)와 ‘부터’(ex)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두 교회는 근본적으로 같은 신앙을 가진다고 의견을 모았다. 드디어 1439년 일치 교령 “레텐투르 첼리”에 동방과 서방 양측이 서명함으로써 일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방의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은 그들이 신앙을 돈을 받고 팔았다고 비난했다.1) 그 이유는 시대적 상황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 임박해있었는데 비잔틴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1448-1453)는 서방 교회의 십자군의 도움을 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1453년 비잔틴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터키에 의해 함락 되었다. 이렇게 서방 교회에서 적극적인 지원 없이 동방 교회의 총대주교좌 콘스탄티노플이 이교도의 수중에 들어간 이상 동방 교회의 민심은 세계교회의 일치라는 거창한 허울보다는 그들 안에서 더욱 강력한 결속하에 민족교회로서 자립할 수밖에 없었다. 1459년 비잔틴 제국에서 러시아가 분리되었고 곧 모스크바는 세 번째 로마로 표현되었다.
모스크바의 대공들은 모스크바가 콘스탄티노플의 정당한 후계자이므로 모스크바의 차르가 비잔틴 황제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하느님이 러시아를 선택하여 콘스탄티노플의 몰락으로 쇠퇴한 동방 교회를 세우라는 임무를 떠맡기셨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는 믿음의 기원이 되었다.2)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1584-1598)는 러시아인들의 열망대로 모스크바 관구 대주교의 지위를 총대주교로 격상시켰다. 이에 그리스인들은 완강하게 자기들 교회의 우위성을 내세워 옛날부터 이어져 온 총대주교를 네 명으로 한정하는 제도가 신성불가침의 제도이기에 새로운 총대주교좌를 마련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589년 러시아에 총대주교좌를 창설하여 모스크바의 관구 대주교 욥(1589-1605)이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1593년에는 동방의 네 명의 총대주교(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스크바의 새로운 형제에게 서열상 다섯 번째의 총대주교좌를 부여함으로써 승인 절차를 마무리 지었다.3)
1) 참조: 황치헌, 세계교회사강의록, 2008, 2-3.
2) 참조: 장경선, 한국가톨릭대사전, 1996, 2095.
3) 참조: 장경선, 한국가톨릭대사전, 1996, 2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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