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사

대륙으로 향한 앵글로 색슨의 선교

jasunthoma 2009. 2. 28. 19:40

대륙으로 향한 앵글로 색슨의 선교

 

     고대 영국은 세교회, 즉 브리튼 교회, 아일렌드-스코틀렌드 교회, 앵글로-섹슨 교회가 존재했다. 브리튼 교회는 5세기 중엽에 앵글족과 색슨족이 브리튼 섬에 들어와 점유함으로써 사라지고 후기의 고대 브리튼 교회는 수도원 체제의 교회였고, 대륙 선교에 큰 역할을 하기에는 시기적으로 이른감이 없지 않았다. 아일렌드-스코틀렌드지역은 로마인들이 43년부터 85년까지 영국제도를 점령할 때 브리튼지역은 점령하였으나 스코틀렌드와 아일렌드지역은 정복하지 못했다. 그 후에 게르만(앵글로-섹슨)의 이동이 있었으나 그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 못했다. 이지역의 선교사들은 목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수도자들이었고 뿐만 아니라 그들은 두드러진 개인주의자들이어서 보통 단독으로 일하기를 좋아했다. 또 외국에서도 그들의 고유한 관습을 고집하였고 교회조직과 교계제도 규정에 있어서는 아주 이해심이 없었다.1)

     앵글로 색슨 교회는 아일렌드 교회의 선교사들이 지니지 못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즉 인내심, 조직력, 적응력, 그리스도교 일치의 중심인 교황과의 결속 등이다. 앵글로 색슨 선교사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인 보니파시우스는 앵글로-색슨 교회의 대륙 선교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2)

     독일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된 보니파시우스는 673년경에 남서영국의 웨섹스 왕국에 속하는 드본 주의 크레시온 근체에서 출생하여 엑시터와 노슬링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노슬링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였고, 문학서도 저술하였다. 후에 그는 원장직을 사양하고 유럽대륙의 게르만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2세에게 719년 5월 15일에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인들에게 대한 이교도 선교사로써 인준을 받았다.3)

    보니파시우스의 중요성은 독일 선교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개혁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에 있다. “독일의 사도”란 존칭은 16세기에 비로소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침체되어 있던 프랑크족의 영방교회를 보편교회적인 사고로 돌아오게 하고, 그것을 고립화에서 해방시키고 보편교회의 중심점인 로마와 결합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그는 프랑크 왕국과 교황직 사이의 동맹을 준비하고 카를 대제에 의하여 지속되어 800년의 황제 대관과 962년 오토 대제에 의한 서방 황제권의 재건에서 정점에 이른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가 없었다면 중세의 보편적 제국사상은 생각될 수 없었을 것이다.5)

    무엇보다도 보니파시우스는 “제1차 게르만 민족종교 회의”를 위시한 두 차례의 전 프랑크 회의를 주도함으로써 독일지역 부족의 통일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여 서양 그리스도교 문화를 독일 지역에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의의라 할 수 있다.


1) 황치헌, 세계교회사 강의록, 수원카톨릭대학교, 2008,130.


2) 같은 글, 137.


3) 4) Karl Bihlmeyer⋅Hermann Tëchle, 교회의 역사, 대건신학대학 교회사연구회, 1984,292-293.


5) A. 프란츤, 최석우, 세계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