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야기

거룩한독서를 읽고 - 정태현

jasunthoma 2008. 12. 9. 16:25

인류 원조의 역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한 성찰은 무지로부터의 탈출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아담과 이브의 무지에서부터 카인의 무지, 노아시대에 흥청대며 먹고 마시던 무리들의 무지, 함의 무지, 바빌론 사람들의 무지로 이어지는 인류의 원조적 역사는 자기 자신의 근본을 망각한 무지의 일면이다. 그리고 시대가 흐를수록 그 무지의 범위가 점차적으로 넓어지고 다양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무지의 근본을 찾아서 그 근본적인 무지로부터 해방되는 날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고 한 이사야예언자의 말이 실현될 것이라 생각한다.

 

믿는다는 것은 실현 가능한 것을 따른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실현 불가능한 것, 인간의 능력 밖의 일,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인간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것, 인간의 머리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을 할 때에 그것은 분명히 믿음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내게 이로운 말씀에만 믿음을 둘 것이 아니라 내게 득이 되지 않고 해가 되는 일에도 믿을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신 바오로 사도처럼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초월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갈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성실하시다. 성실한 사람은 게으른 사람을 미더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려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성실해야 할 것이다. 이사야가 믿음에 따른 축복을 성실한 사람 야곱에게 전해주었다. 자만하거나 거만한 사람 에사오에게는 약속된 은총과 축복이 상속되지 않았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실성은 많은 시련과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나에게 돌아올 몫이 있으니 세월을 보내면 주어지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약삭빠르고 성실한 사람에게 빼앗기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성실하게 십자가를 지고 여러번 넘어지면서 끝까지 골고타 산으로 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장작으로 쓸 땔감위에 앉아 있는 이사악을 둘러메고 제단으로 올라가는 아브라함과 사뭇 대조적이라고 생각된다. 때로는 주님의 은총이 하찮고 귀찮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내가 교회안에서 어느정도의 위치에 서있다고 생각할 때 그렇게 되지 않을까. 에사오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장자권을 하찮게 여기고 주님의 축복만을 받으려고 한다면 주님의 은총인 직분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에 축복마저 빼앗아 갈 것은 당연하리라고 생각해 본다.

 

하느님은 어느 일정한 곳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 어느 곳에서나 인간을 보살피시고 당신에게로 이끄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당신과 맺으신 약속을 이행하시되 당신이 원하시는 시기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끄신다. 때로는 형제들간의 시기와 질투를 통해서도 은총과 축복으로 나아가도록 이끄시는 분이시다. 불안정한 유목 생활이 아닌 편안한 정착 생활에서도 기근과 시련은 있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느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내가 잘못한 것이 있어도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이끌어 내시어 진리를 깨우쳐 주신다. 요셉이 낯선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면서도 후손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것처럼 내가 만약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한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떠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해방된다는 것, 풀려난다는 것,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와 누구를 위해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해방과 자유를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특별하고 독특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자유롭기를 바랄 것이다. 자기를 부리거나 지시하거나 혹은 소소한 부탁조차도 거부하며 평화롭게 간섭받지 않는 삶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그러한 자유가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해방도 자유로움도 무의미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원조 때에는 억압도 고통도 없었으니 해방도 자유로움도 없었다. 그러나 인류가 원죄로부터 이어오는 억압 앞에서 어떻게 나만을 위해서 자유로울 수 있겠으며 내 집안만을 위해서 자유로울 수 있겠으며 내 민족만을 위해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계명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을 지키고 그대로 살겠다는 약속이다. 먼저는 하느님과의 약속이고 다음으로 사람과의 약속이다.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흠숭하고 섬겨라’, ‘주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고 하는 세 가지의 계명 말고는 모두 인간 삶에 관련된 도덕적 윤리적 규범이다. 종교인,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네 번째 계명부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럼 종교인이 아니거나 신앙인이 아니거나 그리스도교가 아니면 위의 세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인간이라면 분명하게 인간적인 계율에 앞선 하느님과의 관계에 관한 계율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리하는 것은 인간의 근본을 멀리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계명을 멀리하고 인간의 계명을 잘 지킨다는 것은 알곡은 버리고 쭉정이만 모아들이는 허무한 노릇일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보시니 ‘허무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참 좋으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성소를 받기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분명 많은 점에 있어서 다른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몸에 배었던 문화적 종교적 체험들이 시나이 광야에서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새로운 계약을 받고 홍해를 건너 새 백성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전의 생활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는 것 같다. 모세가 없는 틈을 타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는 그들의 행위는 새 백성으로 불림을 받았더라도 몸에 베어있던 습관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모습도 흡사하다고 본다. 요즘은 의식주에 관련한 환경적 시련과 고통보다는 시각적 감각적 유혹이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하고 시련을 안겨주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바다의 물 한 방울만큼 미약한 존재이기에 그 감각적이고 시각적인 유혹에 빠져들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교회법에 의하면 “모든 신자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에 이른 뒤에는 매년 적어도 한 번 자기의 대죄를 성실히 고백할 의무가 있다.”고 전한다. 성실하게 자기의 대죄를 고백한다고 하는 것은 드러나는 죄와 드러나지 않는 죄를 깊이 있게 성찰해야 만이 가능할 것이다. 주일미사를 빠진 것만이 죄이고 주일에 미사드리러 가면서 차량 접촉사고로 심한 다툼을 한 것은 죄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매일 매 순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함을 의식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내가하는 모든 행동을 거룩하거나 거룩하지 않거나를 살펴서 따지기보다 만약 내가 저 사람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행동하는 것이 속죄의 삶을 사는 기본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이렇게 새로운 법전과 규범을 정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토대를 이룬 것은 마땅히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안식일과 안식년에 지켜야 할 규범들과 규정들이 시나이 계약에 참여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만 국한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때 규범을 정할 때는 그곳에 있지 않았으나 나중에 나타난 사람이라면 그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좋은 취지에서 규정되고 시행 되지만 결국에 가서는 인간의 삶을 옭아매고 생활을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그리하여 묶인 동족을 풀어주기는커녕 더욱 착취하는 수단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교회 안에서도 일찍 입교한 교우나 늦게 입교한 교우가 서로 도우면서 한 교회 안에 하느님의 한 백성으로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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