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야기

무신론

jasunthoma 2008. 12. 9. 15:35

인간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세상의 존재원리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있는 것과 있게 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단지 있는 것만이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무신론을 정당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길바닥에 박혀있는 돌 하나라도 설명할 수 없기에 무신론은 개인주의적 산물이다. 영혼과 육체의 단일체인 인간은 영혼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정신과 육체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마음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쉽게 생각하여 육체의 핵심인 마음이 육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육체도 영적인 것이다. 정신뿐만 아니라 마음도 영혼의 일부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적인 존재다. 영적인 존재인 인간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무신론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힘든 부분은 삶과 죽음의 연결점의 미확인에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소멸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소멸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소멸될 것이면 아예 생성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성된다는 것은, 즉 태어난 다는 것은 영원에 속한다. 일부분이 없어졌다고 전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취지에서 오늘날의 무신론적 요소를 살펴보고 가능하다면 그들을 몰아세우기보다 이해하고 보듬어 안는 차원에서 제 문제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을 이 글을 통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무신론의 형태와 근원에 관한 사목헌장 19항을 펼쳐보면 무신론이란 말은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현상을 지칭한다. 즉 신을 부정하는가 하면, 신에 대해서 전혀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고, 또 신에 대한 문제자체가 전혀 무의미하다는 사람도 있다. 또한 만사는 과학적 이론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반대로 전혀 아무런 절대적 진리도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더 나아가 신부정보다 인간 예찬으로 인한 인간 긍정에 더 관심을 쏟는다. 그들은 정의롭지 못한 세상의 죄악에 대한 격심한 반발로 아예 신에 관한 문제 자체를 거부한다. 그러기에 종교에 대한 관심을 꺼려한다. 종교도 하나의 제각각의 신을 상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신론’ 이란 단어의 상대성을 유스티누스(Justin)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공인된 신들과의 관련에서 무신론자들이라는 것을 그러나 참된 하느님과의 관련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기꺼이 고백합니다.”(1. 호교론 1, 6)

 

도시화 ․ 세속화는 무신론을 해석하는 기반이다. 그리고 무신론의 물음은 신앙의 물음과 상통한다. 씨앗 속에 나무가 깃들어 있듯이 각 부분 안에 이미 전체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인식은 선취의 폭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고 라너는 말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피할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기에 궁극적으로는 엄밀한 의미에서 무신론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존재를 물음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뵐테에 의하면 인간이 질문을 함에 있어서 성찰의 대상은 모든 것은 ‘있다’는 사실 안에 포괄된다고 설명한다. 이 ‘있다’는 사실은 무제한적이며 영구한 것이어서 인간의 철학적 사색으로 상상할 수도 없고 계측해 낼 수도 없다. 이해력이 한계에 봉착하는 곳, 즉 언어마저도 쓸모없고 표현이 불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형언할 수 없고 파악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규정들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형태가 발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하에 무신론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믿든지 믿지 않든지 그 자유의 주체는 인간이다. 즉 무신론도 자유에 포함되는 것이다. 자유를 누리는 인간은 하느님의 백성이다. 누구든지 먼저는 하느님 백성이었으나 지금은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을 벗어날 수는 없다. ‘잃었던 아들’(루카 15, 24) 비유에서 아버지를 부정하고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은 세상 재물이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아버지를 잊을 수 있었으나 그 모든 재물이 없어지자 아버지를 찾게 된다. 반면 아버지는 재물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아들을 생각하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무신론자들이라고해서 배척해서는 안 된다. 그들도 얼마 남짓한 약속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아버지를 그리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에 의해서 불행한 일들이 자행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니 교회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관대한 방향으로 나아가겠지만 믿음의 좋은 본보기를 지속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무신론자로서 『이방인』에 나타난 뫼르소의 죽음관 ․ 인생관 ․ 결혼관을 잠깐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뫼르소는 죽음을 비관하거나 비극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아는 고독한 순례자와 같은 모습으로 살고자 했던 것이다. 진정한 순례자는 현실을 거부하지 않으며 또한 현실을 외곡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받아들일 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는 가식적인 울음과 흐느낌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는 것이 그였다. 그래서 지금 어머니의 장례식이 치러진다고 해서 평소와 다를게 없으며 평소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이제와 굴곡적으로 요동치지 않는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취한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혈연관계의 중요성을 상정한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장례식장은 울음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개별 자아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오늘 장례식이 있었는데 바로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그의 처사가 매우 못 마땅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 감정일 뿐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다. 세속화된 사회에서 개인적인 자유와 판단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타인의 죽음뿐만 아니라 자기의 자신의 죽음마저도 초연할 수 있고 또 그러한 무감각함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회 주변의 시선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인 감정의 직설적인 표현은 제약을 받기 어렵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임무의 완성이 윤리 도덕적 인격의 완성처럼 치부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의 외재적 은총이다. 반면 양심은 하느님의 내재적 은총이다. 양심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법이다. 세상의 법은 많은 부분 오류와 무지, 착오들로 인하여 정의로움을 상실하기 쉽다. 양심의 법은 아무런 티도, 흠도, 결함도 없는 완전함 법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은 신적인 영역이며 양심은 인간이 규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내재적 은총이기 때문이다.

 

뫼르소의 인생관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주변 친구들과 그다지 오래 사귀지 않았어도 절친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들의 만남은 무엇을 주고받은 후에 성립되는 손익계산의 관계가 아닌 한 인간대 한 인간으로서의 독립적인 자아 성취감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그들이 만나는데 주관하지 않았다. 그 어떤 신적인 우연의 만남이 아닌 것이다. 단지 그들만의 만남이며 인격대 인격으로서의 만남인 것이다. 그 만남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끊고 맺기 위해서 발생하는 지속적인 긴장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의 판단에 의했기에 가능하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과 그들을 위해서 양심적으로 소홀할 수 없는 처신을 하는 것은 그들만의 특징이다. 그는 신을 무시한 채 감정이입으로 인한 인생을 달관한 철학자적 사색으로 매일매일 풍요속의 빈곤을 달래며 살아간다.

 

뫼르소의 결혼관은 좀 특이할 만하다. 그는 결혼이란건 중대한 일이 아님을 확신하며 살았던 것 같다. 흔히 결혼을 인륜지대사라 하여 전통적으로 매우 중히 여겨왔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정식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는 그다지 볼품없는 겉치례에 불과하다. 결혼이라는 것도 한 순간 머물다 사라지는 뜬구름임을 호소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가 아닐까? 긴장과 흥분으로 요동치는 쾌락으로 세월을 보내고 싶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적인 허울일 뿐 실체는 아닌 것이다.

 

결혼은 인생 여정의 밀물이 밀려들 때 접촉되는 촉감과도 같은 것이며, 한 번 잠기면 깊이 가라앉아 감정의 숲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처사가 아닌가. 그 감각적 늪에 빠진 몸은 자꾸만 깊숙이 말려들어가고 이성의 마비로 인해 발생하는 오류가 지속적으로 침전되는 것이다. 즉 쾌락으로 가장한 기쁨, 행복이 결혼으로 주어지는 미화가 아닐까? 뫼르소는 꼭 서로가 동시에 사랑하지 않아도 결혼은 할 수 있음을 설득하려 한다.

 

그의 이러한 태도의 핵심은 이타적인 받아들임이라고 볼 수 있다. 상대방이 원하기에 ‘결혼해 준다’라는 정식은 어떤 면에서 결핍된 불완전한 사랑으로 인식되지만 이러한 분위기는 비단 오늘날만의 사례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서로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결혼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인정되어왔던 문화적 요소인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생명의 출산은 신적인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주도권이 격하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 현장으로써 무신론을 살펴본다면 신을 부정함으로써 인류에게 가져다준 부정적 요소보다 긍정적 요소가 더 두드러졌다고 볼 수 있다. “비록 2천년의 문명을 주도해오는 동안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고 오늘날에 와서는 인류의 일부만을 만족시킬 뿐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지만 철학자 야스퍼스의 말대로 온 세계와 정신을 통일하는데 성공한 가장 좋은 예는 그리스도교였다.” 이렇듯 인류는 늘 움직여왔으며 부딪혀 왔다.

 

무엇이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구원으로 들어갈 수 없다. 베짜타 못가에서 서른 여덟 해나 아파서 꼼짝할 수 없었던 병자는 자기가 움직일 수 없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연못의 물이 출렁이며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었고 또 그러한 물결 속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아무도 다가가서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묻는 이는 없었다. 그저 잠잠한 연꽃처럼 조용한 상태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에게 다가가신다. 그리고 연못의 물결이 움직여지기를 보고 있던 병자에게 연못물이 움직여지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신다.

 

아무에게도 38년간 관심을 받지 못한 채 그저 물결만을 바라보아야 했던 병자의 마음에 돌을 던지듯 말씀으로 다가간 예수님께서는 당장 병자를 건강한 삶에로 부르셨다. 물결이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또 그 물속으로 몸이 던져지지도 않았지만 병자는 자기 들것을 들고 일어나 걸어갔다. 살아서 움직여진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 밖에서 구원을 찾았으나 예수님을 만나고부터는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물결을 만났고 이미 그 출렁이는 물결이 내 안에서부터 있기 때문에 내가 물속으로 던져지지 않아도 구원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연못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연못이 내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말씀의 체험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부드러운 마음속에 말씀의 돌을 던지시는 분이시다. 그 돌이 내 속으로 들어오면 나는 출렁이게 되고 변화하게 된다. 기뻐서 환오를 지르기도 할 것이고 아파서 통곡을 쏟아내기도 할 것이다. 베짜타 못가의 병자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치유 받을 수는 없는 현실이지만 예수님은 살아계신 말씀으로서 지금도 세상에 충만해 있으니 그 말씀이 돌이 되어 내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이제는 내 마음의 물결이 출렁이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이 세상에 충만해 있는 말씀의 연못으로 돌이 되어 던져져 말씀의 물결이 출렁이며 살아서 움직이도록, 널리 확산되도록 투신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를 위한 가장 강한 변호는 그리스도교적으로 사는 그리스도교인이다.”

 

세상 만물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정식에 모든 인간은 동의한다. “포이에르바하는 신부정을 무신론(Atheismus)라고 할뿐 아니라 인간신론(Anthropotheismus)이라 불렀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익히 밝히고자 하는 데에 일치점을 찾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알아 모신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내가 하느님을 보는 바로 그 눈으로 하느님은 나를 보신다.” 때로는 자기중심에 치우쳐서 하느님은 피상의 세계에서 나와 직접 관여하지 않으니 별 관심 없다고 느끼기도 하며, 그럴 때는 절대적인 고독감에 휩싸인다. 왜 그럴까? 부모, 형제, 친지 친구, 이웃, 사랑하는 연인이 함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중심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분은 누구보다, 어떤 존재보다 더 나와 친밀하다. 그 분과 떨어져서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그 욕구를 채워줄 수 없다. 그저 겉으로만 위로 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위로를 받을 때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현세의 인생과 후세의 인생은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것은 시간의 여정 중에서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좁은 시야의 의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순전히 한 인간으로서 개별 존재자로서 인생을 바라본 협소한 소치라고 생각된다. 단순히 한 인간의 인생여정은 너무도 불완전해서 어떻게 보면 삶이라고 이야기할 것도 없다. 금방 피었다가 지는 꽃처럼, 아침에 맺혔다가 해가 뜨면 사라지는 이슬처럼, 혹은 바람처럼 허황한 것이 개별 존재자의 실재라고 본다면 인간의 삶을 진정한 의미에서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후세의 인생 , 아직 오지 않은 인생 그러나 지금도 누군가는 그 종착점에 도달하고 있고, 나 자신도 도달 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곳에로 넘어가는 한계점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며 현세의 인생을 마냥 보낼 수 없다. 넘어가는 시점은 더 이상 삶으로 점철되는 시간의 세계가 아닌 영원의 세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의 세계, 빛도, 어둠도, 낮도, 밤도 없는 무의세계 그러나 개별존재가 실존하는 세계가 있음을 믿지 않고서는 도달 할 수 없다. 부활의 세계, 새로 남의 세계 그 세계는 지금과 같은 육신의 틀을 필요치 않으며, 그 세계가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음으로 무신론을 극복하고 실천으로 무신론을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끝으로 죽음도 태어남도 없는 세계, 감각도 영혼도 필요치 않는 세계, 더 이상 굶주림이 없고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는 세계, 그런 세계에 도달하기위한 여정이 현세의 인생이이니 만큼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함께 살아가며 그들과 친교를 나누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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