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종교적 행위에 투신한다는 말일 것이다.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에 전적으로 예속된 봉헌생활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교회에 기꺼이 내어주신 은혜입니다.” 내가 수도원에 들어오기까지 나를 태초부터 점지해 주시고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주님의 업적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감추어 둔 보물처럼 한 편의 다큐멘터리같이 펼쳐지는 삶의 파노라마가 전제되어 있었기에 온전한 투신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고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향해 달려온 선지자들의 거룩한 삶이다.
먼저 필자는 수도생활이 나를 둘러싼 현실적인 갈등과의 단절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자립하여 인정받는 사회인으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을 때 불현듯 찾아오신 예수님. 외할머니께서 그토록 묵주기도와 성경봉독으로 내 귀를 두드렸으나 그 시절에는 몸과 마음이 잃어버린 은전에 고착되어 옆을 살필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살았었다. 그 삶은 은전을 얻으려고 짐을 지어 날라야하는 우매한 당나귀의 삶에 불과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으나 나는 옆을 볼 수 없었기에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다. 무거운 짐에 힘이 부쳐 발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에도 예수님은 내 멍에를 대신 짊어지고 나를 이끌어 주셨다. 나는 내가 잘 참고 견뎌서 그 힘든 길을 통과한 줄로 알았다. 내가 스스로 인내력이 강한 성격을 지닌 대단한 인물로 착각했다. 이렇게 집착과 고립을 종결짓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집을 나선 것은 어머니의 기도 덕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세속의 삶과 수도생활의 연결고리는 기도였다. 외할머니에서 어머니로 이어져온 기도의 고즈넉한 울림은 냉담하던 나를 성당으로 이끌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성경을 펼쳐 주었다.
기도의 교회법적인 근원은 지극히 풍부한 샘이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있다. 나는 하느님이 기도의 근원이시라는 것을 아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아들 예수님이 하느님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기란 쉽지 않았다. 온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의 규율과 관습의 지배를 받으신다는 것은 사뭇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인간의 법률들을 존중해 주셨다. 비록 당신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결정된 사형집행이었지만 오히려 그 잘못된 판단을 번복하시지 않으시고 승화시켜 더 좋은 계명으로 변화시키기까지 인간을 위로해 주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수도생활을 하면서 찾아야 할 교회법의 의미가 진정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교회법은 사랑에 바탕을 두고 끊임없이 부활하는 살아있는 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 바로 교회법이다. 이러한 생동감 넘치는 교회법이 제시하는 수도생활의 덕목을 내 삶 안에서 살펴본다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다. 특히 교의헌장 제 6장에 나타난 수도자의 정체성은 수덕이나 신비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삶이 구체화 되는 세상 안에서 성사적 성격을 드러내는데 있다고 언명한다. 그러므로 가난, 정결, 순명을 통한 수도생활이 교회 안에 감추어진 보물이 되고, 온전히 봉헌된 거룩한 생활은 성사적임을 내 삶을 비추어 묵상해보고자 한다.
부유하면서도 우리 때문에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한 청빈의 복음적 권고는 영적으로나 실제로나 가난하고 절제 중에 근면하며 세속적 재물에서 떠난 삶을 사는 것 외에도, 재산의 사용과 처리에 있어서 각회의 고유법의 규범에 따른 종속과 제한을 수반한다.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서약한사람은 세상의 재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는 장차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상급을 생각하며 흐뭇해하기 때문에 희망으로 벅차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루카 16, 9)’고 말씀하신다. 즉 내가 가진 세속적인 재물의 모든 것은 복음적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의미다. 나의 명예나 나의 위신,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그 재물을 사용하다보면 하늘나라는 그만큼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재물이 모인 곳에 사람의 마음도 머물러 있듯이 이 세상에 하늘나라가 건설 될 수 있도록 사회에 참여하고, 문화에 관여하고, 과학에 귀기울이고, 타종교를 위로하여 그들 모두를 친구를 대하듯 의로써 사귀어야 할 것이다. 재물을 나를 위하여 쓰지 않고 세상을 위하여 다 써버려 가난하게 된 사람은 진정으로 복음적인 가난을 실천한 사람이다.
하늘 나라를 위하여 받아들인 정결의 복음적 권고는, 내세의 표지이고, 나뉘지 아니한 마음 안에 더욱 풍성한 풍요의 샘이며 독신 생활의 완전한 정절의 의무를 수반한다.
홀로 산다는 것은 고독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이웃에게 비참한 인상을 던져주기도 한다. 그런데 거룩한 독신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증거 하는 징표가 된다. 특히 세속에 관여치 않으면서 세상에 속한 수도자는 인간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서로 헐뜯고 할퀴는 세상에서 어떻게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인간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동정생활의 극치를 가르쳐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에서 찾을 수 있다.
남녀가 만나 혼인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믿음을 전제로 하기에 가능할 것이다. 하늘나라를 위한 동정생활도 믿음을 전제로 한다. 부부가 서로에 대한 확신을 갖기에 서로 남임에도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며 돌보고 살아가며 행복해 할 수 있듯이, 수도생활도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살아가기에 그분의 사랑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동정생활은 세속적 독신생활과 같지 않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라는 하느님의 말씀 속에는 사변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홀로 계신 하느님이시나 홀로 계시는 것이 좋지 않음을 익히 아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리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으로 당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신 것이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음을 보시고 하와를 지어 만드시고 그들을 위로해 주셨다. 그러니 사람은 둘이 한 몸이 되어 자녀를 낳고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성가정이 그 자체로서 삼위일체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생활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부부의 사랑의 관계에서 자녀가 태어나듯이 수도 공동체의 형제들이 오순도순 사는 모습을 보고 성소자가 생겨나는 것이다. 형제들의 사랑의 관계에서 생겨난 성소자들은 공동체에 입회하여 독립된 개체로서 성장하며 형제들과 더불어 홀로 동정임을 서원하고 수도회의 공동 설립자가 된다. 이들이 자라서 수도회를 꾸려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동정과 동정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성스러운 신비 공동체다.
죽기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신앙과 사랑의 정신으로 받아들인 순명의 복음적 권고는 합법적 장상들이 고유한 회헌에 따라 하느님의 대행자들로서 명령할 때 의지의 복종을 의무 지운다.
‘예, 주님 여기 있습니다’라는 마리아의 응답처럼 온전히 내 자신을 봉헌하고자 하는 원의를 가지고 순명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지키기 쉬우면서도 가장 지켜지지 않는 덕목이 순명인 것 같다. 순명은 성실함을 필요로 한다. 포도밭으로 가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거침없이 예라고 대답한 작은 아들은 결국 가지 않았다. 그 어떤 피치 못할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다. 나의 원의는 아무런 장애를 가지지 않으나 행동을 실천으로 옮김에 있어서는 많은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그 상황에서 두 가지 모두를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처럼 하늘나라를 위한 순명은 큰 아들처럼 갈 수 없다고 거부해놓고도 결국은 포도밭으로 나가는 성실함을 필요로 한다.
또한 그와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하늘나라를 위한 순명에 있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기에 갈 수 없다는 장황한 설명은 불필요하다. 지금 상황에서는 내가 순명하고 곧바로 실행하느냐 불순명으로 다른 곳으로 가느냐라는 결정을 내릴 뿐이다. 하늘나라를 향한 순명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기에 그것을 ‘끝내고 따르겠습니다’라는 변명을 필요치 않는다. 하늘나라의 확장은 멈추지 않는다. 시작할 때 하늘나라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가 회심하고 돌아오면 그 때 그 자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반대방향으로 나아간 만큼 벌써 하늘나라로 전진하였기에 그때 그곳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 부르시지 두 번, 세 번 부르시지 않으신다. 그래서 어떤 부르심이든 행동에 옮기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야한다. 그리고 대답하고 그 대답에 맞게 즉시 실천해야 한다.
나는 수도 선서로써 지켜야 할 세 가지 복음적 권고를 공적서원으로 받아들이고 교회의 교역을 통하여 하느님께 축성되며 그 회에 합체되어 법으로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지킬 것이다. 그리고 전생애를 통하여 영적, 학문적, 실제적 양성을 성실히 수행하겠다.
봉헌생활을 하는 동안은 복음 성경에 제의되고 소속 회의 회헌에 명시된 그리스도의 추종을 생활의 최고 법칙으로 삼겠다. 또한 하느님의 사정에 대한 명상과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줄기찬 일치가 모든 수도자들의 첫째로 주요한 본분이기에 날마다 성의껏 성찬 제헌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시며 이 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경배하겠다. 나는 성서 봉독과 묵상 기도에 정진하고 고유법의 규정에 따라 일과전례 기도를 합당하게 거행하며 그 밖의 신심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겠다. 무엇보다 먼저 모든 축성 생활의 모범이요 보호자이신 천주의 모친 동정 마리아께 특별한 공경을 묵주 기도로도 바치기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봉헌생활은 나의 안위를 위한 생활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하고 날마다 양심성찰을 하며 하느님께 마음을 전향하도록 꾸준히 묵상할 것이다. 비록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고 확신할만 용기가 없지만 성실한 농부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선한 일들을 많이 배우게 되면 결국은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므로 내게 남은 시간은 나만을 위한 절대적인 시간이 아님을 안다. 이 시간은 세상의 시간이며 나에게 있어서는 변화의 시간이다. 이제는 매 순간 순간을 성실히 선한 얼굴로 사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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