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띠로와 시돈지방으로 물러가셨습니다. 띠로와 시돈 지방은 그리스화된 이방인 지역으로서 우상을 숭배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으로 물러가셨을까요??? 오늘 복음 이전에 이방인 지역에 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열두제자들을 뽑으시고 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죠.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의 길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마태10,5-6) 그렇다면 그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라고 해놓고 정작 당신은 오늘 다른 민족들에게 가신 것일까요??? 또 이스라엘의 길잃은 양이 아니라 이방인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셨을까요??? 복음을 살펴보면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부터 오늘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실 때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병자를 고쳐주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오천명을 먹이시고/ 여러 가지 비유로, 가라지의 비유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하늘나라를 가르쳐주시고/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갈릴레아 호수를 떠나 이방인지역으로 가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아닐까???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마태오복음 한 가운데(14/28장)에 소개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태오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 전후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하늘나라 선포 활동이 요한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됩니다. 복음선포가 예수님의 시각으로 환기되는 특별한 지점, 터닝포인트가 요한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전해주는 오늘 복음 장면은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복음 선포방식이 갈릴레아에서 어디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이방인지역까지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하늘나라 선포가 세례를 받고 무작정 기다리는 개별 구원 방식이었다면 예수님의 복음 선포활동은 그보다 더 직접적이고 친교적인 공동협력 구원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세례자 요한이 죽자마자 가장 먼저 일으키신 기적,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통해서입니다. 빵을 많게 하는 기적입니다. 요한처럼 단식을 통해서 굶는 고행방식이 아니라, 먹고 마시면서 찬미하는 활동방식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궁궐속에서 벌어지는 흥청대는 죽음의 잔치가 아니라, 하느님이 직접 빚어 만드신 대자연의 기운으로 봉헌되는 생명의 빵을 먹고 마시는 천상잔치의 구원방식을 선포하시러 이방인 지역으로 물러가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 방식이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이방인 지역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구원방식은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구원방식은 수동적이지만 결국은 능동적인 구원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가나안 부인의 수동적인 청원이 어떻게 능동적으로 변화되는지를 보여주게 됩니다.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부탁드렸을 때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다가와서 말합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그러자 그제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은 그럴 수 없다고 부정하신 거죠.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요구했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라는 말은 이방인 지역에서 구원활동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주는 첫 단추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돌려보내다”는 말은 “아폴뤼오”인데 아폴뤼오는 돌려보내다/떠나보내다/작별하다/헤어지다는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용서하다/사면하다는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말하자면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말씀드렸던 것입니까??? “저 여자를 용서하시고, 사면하십시오.”라는 의미로 말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말은 그녀를 돌려보내시어 그녀가 요구하는 것을 허락하십시오.라는 대리 청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간 대리자가 개입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대리자들의 청탁을 들으시고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본분을 밝히십니다. 당신의 사명/소명/성소를 밝히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이 말씀을 들은 부인은 두 번째로 도와달라고 청하는데 이번에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을 하지않고 예수님께 직접 청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지만 이 두 번째 청원에도 예수님께서는 들어주시기보다 오히려 당신의 본분에 더 충실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자 부인이 어떻게 말합니까???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허락하십니까??? 아니죠. 끝까지 수동적인 청원을 허락하지 않으시죠.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러자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된겁니까???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대로 된 것이 아니라 부인이 바라는 대로 됩니다.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이것이 복음 선포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대로 복음이 선포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나에게 부여된 권한을 행사하며 복음을 선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한을 직접 행사하지 않고 부인에게 돌려주어 하느님과 직접 맺어주십니다. 능동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당신은 한발짝 뒤로 물러서계십니다. 그런데 약간 의아한 점은 제자들의 청탁이 있었을 때에 어떻게 그렇게 모질게도 안들어 주실수가 있을까???하는 의구심입니다. 대부분 여기서 모두 떨어져 나갑니다. 이렇게 공동으로 협력해서 애원하고 청원하는데 예수님은 눈도 꿈쩍하지 않으시는구나.하고 상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복음 선포방식이 아니고서는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방인지역에 살고있는 동족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이스라엘 땅에 살고있는 유다인일지라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직접 맺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님이시라도 허락하실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이방인 여인처럼 수동적인 청원이 능동적인 믿음으로 변화되어 하느님의 말씀인 생명의 빵으로 우리의 영혼과 육신이 늘 건강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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