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녀 마리아막달레나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십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만이 예수님 부활의 유일한 첫 증언자요 목격자로 등장합니다.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빈무덤만 보고 돌아갔을 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처음에는 빈무덤만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두 제자에게는 보이지 않던 천사가 마리아에게는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간데 없고 마리아만이 홀로 열린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하고 부르십니다. 이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어 "라뿌니!"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못 알아봤습니다. 예수님을 보고도 정원지기로 생각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동산지기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신 줄을 모르고 정원지기/ 동산지기로 보았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밖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무덤 밖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됩니다. 즉 빈무덤 속을 보고 믿었던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아니라 무덤 바깥에 계신 예수님을 뵈옵고 대화를 나눈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알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마리아도 라뿌니 하고 예수님을 부르며 서로의 신원을 확인한 것입니다. 여기서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을 떠올려줍니다. 태초에 아담은 동산지기였습니다.
창세기2장을 보면 아담에 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 . 그리고 그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
이렇게 동산지기와 이야기를 나눈 마리아가 그분을 부활하신 새 아담 예수님으로 알아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불렀듯이요. 그렇다면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하고 당신을 찾고 있는 이들을 부르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이름을 직접 부르신 경우는 베드로와 라자로/마르타를 제외하고 마리아뿐입니다.(필립보를 부르시기는 하나 그것은 나타나엘과 이야기하면서 간접적으로 언급함) 베드로와 라자로의 경우를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이름을 부르시는 경우는 매우 중대한 일이 있을 때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무슨 중대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당신은 부활하셨으며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나 곧 '너희의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분께 올라간다'는 것을 전하라는 분부를 마리아에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대한 일은 다름아닌 마리아의 선포적 역동성입니다. 본래 마리아가 원했던 것은 단지 죽으신 예수님을 뵙고 모셔가는 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분을 뵙고 나니 그와 더불어 마음이 충만해졌습니다. 그 충만함으로 이제는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알리는 것에 머물지 않고 마리아는 세상 끝까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언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리아가 오늘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은 예수님의 시신을 뵙고 다른 곳을 모셔가기 위함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장소는 어디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묻히신 곳은 처음부터 계획된 곳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제자인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소유한 새무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그곳에 모신 이유는 그곳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에 가까이 있는 정원(동산)이었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안식일 준비일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모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제가 모셔가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는 것은 이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준비하였다는 애기기가 됩니다. 그 준비된 장소가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지만 이렇듯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서도 돌아가신 뒤에도 헌신적이었던 이는 마리아였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이름을 예수님이 부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예수님을 모실 곳이 우리에게도 마련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을 만난다면 어디에 모셔야 할까요? 나는 마리아처럼 “제가 모셔가겠습니다”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한 마음속에 머물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의 맑은 정신 속에 머물 수 있도록 예수님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마음속에 마리아가 선포한 두가지 사랑의 기쁜소식이 울려퍼질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아멘. 알렐루야!”
마리아 막달레나를 읽고
제니퍼 리스틴/ 이창훈, 성바오로출판사 2024
이 책은 모두 4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고대 막달라에서 얻은 통찰이라는 부제가 붙은 만큼 제1장에서는 고고학, 역사, 지리학에서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제2장은 성경에서, 제3장은 외경에서, 그리고 마지막 장은 현재 막달라 경당의 모자이크에서 얻은 통찰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듯 고고학, 역사학, 지리학을 비롯하여 성경과 외경에서 그리고 현대 성미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이고 광범위한 자료를 토대로 마리아 막달레나를 소개하는데 이 4가지 통찰을 관통하는 주제는 “만남”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만난 여인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태초에 아담을 최초로 만난 여인이 하와였듯이...
제1장 막달라에서 얻은 고고학적인 만남은 공생활중인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찰하도록 이끌어준다. 갈릴레아 호숫가, 목욕탕, 회당, 별장, 시장, 어항, 건어물, 항구 등.
마르8,10 사천명을 먹이신 후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는 대목에서 달마누타는 막달라 또는 막달라 북쪽 지역으로 추측되는 곳이다. 이 지명은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막달라 해변에서 오고 갔을 장소를 상상하게 해 준다.
예루살렘으로 무거운 세금을 전달하던 막달라의 파괴(카불-아코 남동쪽 -> 시훈-세포리 근처 -> 막달라)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서기70년)되기 3년전 67년에 일어났다. 잔혹한 막달라의 파괴를 내다본 그녀는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예수님은 승리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그곳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부활의 첫 번째 증인으로서 빈 무덤 앞에 서있었던 이유는 “죽음이 끝이 아니다”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제2장 성경에서 얻은 통찰은 마리아의 7가지 이름과 호칭을 통한 만남이다. 1. 막달레나라는 이름(루카8,2)/ 2. 일곱마귀를 쪼아내 준 마리아 막달레나(마르16,9; 루카8,2)/ 3. 예수님과 함께하며 시중든 여인(마르15,4; 루카8,1-3)/ 4. 십자가 아래 있었던 증인(마태27,56; 마르15,40; 루카23,49; 요한19,25)/ 5. 예수님 장례의 증인(마태27,61; 마르15,47; 루카23,55)/ 6. 빈무덤의 증인(마태28,1; 마르16,1-2; 루카24,1-3; 요한20,1-2.11.16)/ 7.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고 알린 선포자(마태28,8-10; 마르16,10; 루카24,9-11; 요한20,18)
그리하여 히폴리투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일컬어 “사도들의 사도”라고 호칭하였다.
제3장에서 얻은 통찰은 영지주의 외경 복음서에 나타난 통합적 마리아 영성을 통한 만남이다. 1. 필립보 복음서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두 번 언급하는데 그녀를 예수님의 “동지”라고 지칭한다. 여기서 동지는 콥트어인데 이 말은 그리스어인 “코이노노스”에서 차용한 것으로 때때로 “배우자”로 해석될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동지”의 뜻을 지니고 있다. 2. 토마스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남자로 만들겠다고 하는데 여기서 남성/남자는 기념/기억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남자/남성’이라는 의미가 참으로 기억해야할 대상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를 가리킨다면 마태26,13의 향유를 받고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 기름을 부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기억(남자/남성)의 대상 또는 증인이 된다. 3. 마리아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사도들을 하느님의 숨겨진 비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4. 교부 히폴리투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구약성경의 아가서와 결부시켜서 예수님의 신부이자 배우자라고 말한다. 5.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기쁜소식을 믿은 믿음의 모델이라고 말한다. 6. 성예로니모는 덕행의 모델로 칭한다. 7. 시리아의 에프렘은 여성의 중요한 역할과 영적 모성으로서 동정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을 태중에 모셨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빈무덤의 증인이므로 이 두 마리아는 구원의 시작과 끝을 한께한 분이시다. 8. 대 그레고리오는 자비로운 사랑의 수혜자이자 인내의 모델이라고 한다.
제4장에서 고대 막달라에 대한 오늘날 21세기의 통찰을 마리아 막달레나 경당 모자이크를 통해서 만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이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그들을 꾸짖어달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죽은 돌들이 우리에게 살아 있는 과거를 일깨운다면,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언과 화해의 복음을 선포하며 희망을 간직해 온 것은 살아 있는 돌, 곧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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