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이라는 이 말씀은 자기 재산으로 예수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던 여인들 이야기(루카8,3)와 대조적입니다. 여인들은 자기 소유를 다하여 복음선포활동을 적극 후원했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가서야 베드로가 불평하듯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가진 것을 버리고. . .”(루카18,28)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태19,27; 마르10,28) 하지만 마태오복음에서 베드로는 “모든것을 버림”마저도 대가를 바라고 버렸음을 실토합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19,27)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만 말씀하실 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몸소 가르쳐주기 시작하십니다. 루카복음에서 모든 것을 버리라는 메시지는 몇차례 나오지만 오늘 복음을 제외하면 모두 간접적인 표현들 뿐입니다. 이 말씀은 그만큼 부담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갈릴레아에서 그물을 버릴 때(루카5,11)의 장면인데 이때는 버리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모든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첫 파견하는 장면인데, 당신의 제자들을 처음으로 파견하실 때 루카복음 9장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루카9,3)하고 당부하셨는데 이는 모든것을 버리고 길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또 이어지는 구절에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루카9,23)하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받게 되는 자기 자신의 영광스럽고 거룩한 모습마저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세번째로 자기 소유를 다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들을 자세히 보면 자기 소유를 버리게 되는 대상이 달라짐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 몇몇이 자기 소유를 모두 버리게 되지만 두번째는 열두 제자들과 그 주변 사람들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많은 군중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점차 확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갈릴레아 호수가에서 시작된 무소유의 바람이 예루살렘으로 번져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무소유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점차 일반화되고 보편화되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라”에서 자기 소유의 “소유”는 휘파르코쉰ὐπάρχουσιν인데 원형 휘파르코ὑπάρχω는 소유 또는 재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작하다, 착수하다, 개시하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형 휘파르코ὑπάρχω에서 접두사 휘포ὑπ를 제외한 어간 아르코ἄρχ 동사는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르코ἄρχω는 “자기 권한”으로 “자기 통치”로 “자기 왕권”으로 먼저하다 시작하다 착수하다 첫째가도록하다 명령하다 이끌다 지배하다 통치하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소유를 다 버리라는 말씀은 자기가 가진 재물만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권한과 자기 통치와 자기 왕권을 모두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착수하고 명령하고 이끌고 지배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자기 소유를 모두 버리라”고 하시면서 두가지 비유를 들어 주셨는데 '탑을 쌓을 때의 비유'와 '싸우러 나갈때의 비유'입니다. 도대체 이 비유들을 왜 들려주셨는가??? 이 비유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유를 들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기초만 놓고 마치지 못해서 비웃음만 당하거나 아니면 싸움에 져서 창피를 당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 비유의 말씀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기 전에 계산하고 헤아려볼 때에 꼭 필요한 지혜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휘파르코ὑπάρχω에서 보듯이 먼저 버리는 것과 먼저 비우는 것이 지혜로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소유한 것이 많을수록 위험하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함입니다. 소유한 것이 많으면 불안하고 걱정이 되기때문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성곽을 둘러치고 기둥을 세우고 망대를 올려 요세를 만들게 됩니다. 방어하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군사훈련을 합니다. 공격하기 위해서죠.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리 넉넉하고 충분하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재물 때문에 도망도 못가고 앉아서 당하게 됩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움직여야 할 살람이 꼼짝 못하는 것이죠. 살아있는 생명이 희생되는 겁니다. 재물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 얼마나 미련한 제자들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빼앗으러 오는 사람도 빼앗기 위해서 더 많이 준비해서 쳐들어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소유권을 내려놓고 서로 연대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평화도 누릴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스스로 탑을 세우거나 또한 2만명을 거느리고 오는 적을 무찌를 힘이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탑을 세우거나 적을 무찌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2만명이 아니라 아주 작은 유혹자 1명조차도 무찌를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스스로 탑을 세우겠다고 결의하지 말아야하고 또 아주 작은 유혹이라도 내 힘으로 물리치겠다고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저정도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내가 이래뵈도 신앙생활을 40년이나 했는데 말이야. 내가 이래뵈도 묵주기도를 하루에 50단씩 바치는데 말이야. 저정도 유혹쯤이야 아주 쉽게 무찌를 수 있지 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둑의 예를 들자면 바둑돌로 아무리 큰 땅을 차지하고 성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빈집이 한채 뿐이면 죽은 왕국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왕국이 살아있으려면 최소한 빈집 두 집이 필요합니다. 빈 곳이 많아야 사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도성이 살아 남기위해서는 다른 빈 곳이 필요합니다. 나혼자 비워내고 소유하지 않았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이라고 말할 때 “자기 소유”는 자기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만이 아니라 자기 명예와 이름과 족보와 가문까지 모두 버리고 비워라는 의미입니다. 왜 버리고 또 버리고 무엇때문에 비우고 또 비워야 합니까??? 우리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고집으로 자기 욕심으로 꽉 들어차 있으면 제아무리 큰 왕국이라 하더라도 죽은 왕국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왕국은 돌 하나만 굴러 들어가도 거들나고 맙니다. 이미 그 왕국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우리 창립자 복자 알베리오네가 알려주신 사도 바오로가 살았던 방식으로 살아야합니다. “나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9,22)이 되기 위하여 살아야하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갈라2,20)라고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지막피정”에서 소개된 하늘나라는 1,000점이라는 예화를 들 수 있습니다.
“아이고 주님! 이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당신이 저를 하늘나라에 집어넣어 주시지 않으면 제 힘만으로는 도저히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잖아요.”
나해 연중제31주간 수요일 루카14,25-33 (20241106 ---)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은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은 참으로 어려운 조건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자기 십자가까지 짊어져야 하니까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조차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십니다.
루카복음 14장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 부담스러워하는 다섯 부류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자기 밭을 계속 늘려가는 사람, 2.자기 겨릿소를 계속 사들이는 사람, 3.혼인을 통해서 자기 집안 사람들을 계속 늘이는 사람, 4.자기탑을 계속 쌓으려는 사람, 5.자기 군사를 계속 증대 시키려는 사람.
하늘나라가 몇개라고 생각하세요??? 하늘나라는 한나라일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자기 나라 자기 왕국 자기 제국을 세울 수 가 있지만 하늘나라에 가서는 다양했던 나라들이 합쳐지고 통합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시고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주러오셨다고 한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기 탑을 세우고 자기 군사를 훈련시켜서 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은 사양지심 사양이 아니라 양보해야 합니다. 사양이 포기에 가까운 덕목에 해당된다면 양보는 화합에 가까운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는데 경비가 충분치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포기를 해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양보를 해야 계획했던 탑을 완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할 때에 내 군사력이 충분치 않으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포기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양보해야 합니다. 양보는 갈라진 부모와 형제와 자녀가 서로 만나서 결합되는 십자가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로 일치되기 위해서는 양보해야 합니다.
교회의 쇄퇴가 아니라 교회의 통합입니다. 수도회의 쇄퇴가 아니라 수도회의 통합이라는 것이죠. 하늘나라는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양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선교적 열망을 지니는 것이다. 등경위의 등불은 애덕이다. 양보의 미덕은 느림과 지체를 잘 활용하는 것이다. - 소화데레사의 자서전: 한겨울에 문지기 일과 사무실 일 중에서 동료가 사무실에 선발되도록 느림과 지체를 활용해서 양보함. - 군생활시: 1급 자격 선발과정에서 느림과 치체를 활용해서 동료가 선발되도록 양보함.
나는 예수님의 모상을 그리기 위해 예수님께서 고르신 작은 붓입니다. 도화지위에 그려진 아름다운 모상은 도화지가 붓의 건드림을 잘 참아받아서 그려진 것이 아니라 화가의 손으로 그려지 작품입니다. 그 화가가 바로 하느님의 움직이심입니다.
- 가스벨브 off를 세게 둘려요; 세게 안눌러도 돼요; 세게 눌러도 돼요 – 기계를 누를 때 누가 기계를 움직이는가; 세게 눌러서 기계가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약하게 눌러서 기계가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세게 누른 사람은 누르는 사람의 허약함을 생각해서 세게 눌러라고 한 것이고 약하게 누른 사람은 누르는 사람의 건장함을 고려해서 기계가 상할까봐 염려해서 그리하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사람을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은 기계를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세게 누르든 약하게 누르든 그 밸브를 작동하는 일은 전기 모터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모터를 바로 하느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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