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모후 신심에 관하여
사도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역동성 (마리아나 역동성 DINAMICA MARIANA)은 다음과 같이 세가지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1. 마리아는 모든 시대의 사도들이 함께 완수하고 있는 것을 완수한다
2. 마리아에 의해서 세상이 그리스도화 되어야 한다
3. 마리아는 내면적/ 기도/ 표양/ 고통/ 말/ 활동의 특별사도직을 수행한다
그렇습니다. 성모님은 모든 시대의 사도들이 함께 완수하고 있는 것을 완수하시는 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모님은 천상에서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도 우리 곁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천상의 사도들의 모후이시면서 평범한 사도이시자 평범한 모후 마리아시기 때문입니다. 즉 로마의 황제라고 하면 로마라는 도시의 시민들이 특별하고 대단하기 때문에 황제가 명성이 있는 것처럼 사도의 모후라고 할 때에도 사도들의 대열이 특별하고 대단하기 때문에 그들의 모후도 명성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지만 사도가 평범한 사도이면 모후도 평범한 모후가 됩니다. 따라서 먼저 사도라는 말이 특별하기만 한지 아니면 평범하기도 한지를 알아보고 사도가 평범하기도 하다면 모후이신 성모님도 특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평범하시기 때문에 지상의 삶을 잘 이해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시는 적임자가 되실 자격이 있게 됩니다. 먼저 복음에서 알려주는 사도의 의미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도(아포스톨로스ἀποστολος)라는 명사는 아포스텔로ἀποστελλω(보내다,파견하다)라는 동사에서 그 어원(語源)이 유래되었습니다. 희랍의 문학 작가들은 이 명사를 그들의 저서에서 사용하였는데 오늘날의 온전한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아니었지만 그리스도교적 ‘사도’의 의미도 다소 있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례는 구약성경의 유대인 관습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LXX)에서 아포스텔로ἀποστελλω 동사는 히브리어 쉘라שלח의 번역어로 700회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이 ἀποστελλω/שלח는 대개 메시지나 임무의 위임에 관련되었고, 특별히 사자(使者)를 보내는 것을 지칭하였습니다. 이때 강조점은 파견한 사람에게 있습니다(1사무6,8). 파견받은 사람은 그가 어떠한 사람이든 간에 파견한 사람의 뜻과 그를 대리할 때만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이 “파견받은 이” 아포스텔로ἀποστελλω는 주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약 135회 사용되었습니다.(대부분 사도행전에서 사용됨) 이 단어의 의미는 일상적인 의미보다 오로지 문맥 안에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의 권위를 대리하고, 당신을 섬기도록 파견자를 보내는 것을 나타내는 신학적인 단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아포스톨로스ἀποστολος라는 용어는 이차적 자료 외에 신약성서에서 79회 사용되었는데 사도 바오로와 루카 계열에서 전체의 80%정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도라는 개념은 사도 바오로와 루카에서 찾을 수 있는 표현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을 사도라 칭하였기 때문입니다. 우선 루카의 저술에서 ‘열둘’이라는 명사는 사도라는 말과 동일시되는데 루카는 사도의 개념을 항상 도데카δοδεκα라는 ‘열두 제자단’에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열둘이라는 명사는 예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후 ‘그들을 사도라 부르셨다’(루카6,13)에서 언급된 것처럼 곧바로 사도(ἀποστολος)라 불려졌습니다. 반면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지칭할 때 사도로 표현하며, 자신의 사도직을 두 가지 요소로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았다는 것’(1코린9,1)과 그 주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고 파견되었다’(로마1,1;갈라1,1)는 사실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파견된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마태28,19;마르16,16;루카24,47;요한20,23) - 게르하르트 킷털외, 『신약성서 신학사전』, 86-87참조; X.레옹뒤푸르, 「사도」, 『신학전망』46 (1979/9), 광주가톨릭대학교출판부, 115-116 참조 -
따라서 사도라는 의미는 예수님으로부터 지명되고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특별하고 특출한 선별과정을 통하여 불리움 받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평범하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까지로 넓혀집니다. 다만 사목자라는 명칭에서 오는 사도의 뉘앙스와 사도라는 명칭에서 오는 목자의 뉘앙스와 또한 목자라는 명칭에서 오는 목동의 뉘앙스를 서로 대립시키지 않고 서로 받아들인다면 더불어 양을 치듯이 신자들을 영적으로 인도하고 양육하는 모습을 띤 교회의 사목자라는 의미가 오히려 평범한 모습을 지닌 사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의 평범한 모습은 루카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뵙는 장면을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자] 루카2,15+ 천사들이 하늘로 떠나가자 목자/포이메네스ποιμένες들은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포이메네스ποιμένες들은 아기를 보고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목자/포이메네스ποιμένες 원형 포이멘ποιμήν은 목동 목자 양치기 선생 스승 교사 등을 의미합니다.
*[제자] 루카5,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마테타스μαθητάς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제자/마테타스μαθητάς 원형 마태토스μαθητός는 배우는 사람 즉 수련자를 의미합니다.
*[제자/열두제자/사도] 루카6,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마테타스μαθητάς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도데카δώδεκα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아포스톨로우스ἀποστόλους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주신 시몬...
*사도/아포스톨로우스ἀποστόλους 어원 아포스텔로ἀποστελλω는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사절 대사 심부름꾼 사도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후로 열두제자라고 부르는 복음 본문은 제자라는 명칭은 빠지고 단지 열둘/도데카δώδεκα라고만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복음사가 루카의 집필의도로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 제자들은 그들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일컬어서 성전(요한2,19)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열둘/도데카δώδεκα 도-데카δώ2+δεκα10=12
*[일흔두제자/철부지] 루카10,21+ 파견된 일흔 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온 뒤에 -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네피오이스νηπίοις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철부지/네피오이스νηπίοις 원형 네피오스νήπιος는 어린 젊은 신선한 유치한 어린애 멍청한 무식한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스승님/스승] 요한3,1+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라비ῥαββί,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3,10+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디다스칼로스διδάσκαλος이면서 그런것도 모르느냐?
*스승님/라비ῥαββί은 마에스트로maestro 선생, 교사, 완전한, 뛰어난 등을 의미하고, 스승/디다스칼로스διδάσκαλος는 주인 선생 교사 교리교사 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직접 뽑으신 열두 제자들을 의미하는 목자/ 제자/ 사도/ 열둘/ 일흔둘(철부지) 등은 오히려 전문성이 없는 목동 양치기 견습생 수련자 사절 심부름꾼 철부지 등의 평범하고도 포괄적인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목자/ 제자/ 사도/ 열두제자/ 일흔두제자는 아주 평범하고 친근감 넘치는 직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승님/ 스승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일컬어서 스승님/라비ῥαββί으로 그리고 예수님은 니코데모를 스승/디다스칼로스διδάσκαλος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예수님은 평범하게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목을 하는 사목자가 아니라 연구를 하는 학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제자 열둘을 뽑아 세우시는 장면을 소개해주지 않지만 니코데모와 같은 유형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제자단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너는 그런것도 모르느냐?하고 화를 내듯이 그를 깍아내린 것은 당신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키리에/아도나이이라고 흔히 불렀지만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단지 랍비/교사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교사에게 묻듯이 질문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도들의 포괄적이고도 평범한 사목직을 위시하여 “사도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역동성, 즉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마리아나 역동성(DINAMICA MARIANA)에 관하여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1. 마리아는 모든 시대의 사도들이 함께 완수하고 있는 것을 완수한다. 다만 평범하게.
2. 마리아에 의해서 세상이 그리스도화 되어야 한다. 다만 평범하게.
3. 마리아는 내면적/ 기도/ 표양/ 고통/ 말/ 활동의 특별사도직을 수행한다. 다만 평범하게.
따라서 성모님은 모든 시대의 사도들이 함께 완수하고 있는 것을 완수하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평범한 사도이시자 평범한 모후 마리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안토니오 벨로/최경선의 “성모님과 함께 하는 31일 기도”, 바오로딸 2005를 토대로 성모님의 평범한 사도의 모후성에 머물러 보면서 숙고의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이 책은 31가지 소 주제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짧게 소 제목만을 언급하자면 이렇습니다. “평범/ 과묵/ 기다림/ 사랑/ 잉태/ 맏아들임/ 첫걸음/ 선교/ 명분/ 양식/ 이주/ 용감/ 활동/ 휴식/ 새포도주/ 침묵/ 순종/ 시중/ 참됨/ 대중/ 춤/ 성토요일/ 사흗날/ 축제/ 다락방/ 아름다움/ 우아함/ 새시대/ 임종/ 동반자 마리아”입니다. 이들 31가지 주제 중에서 오늘은 성모영보와 관련된 몇 가지만 간추려서 살펴보겠습니다. 그 주제 안에서 활동하신 사도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평범한 역동성에 우리도 함께 머물러 본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평범한 여인 마리아 - 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제4항은 “성모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가정을 돌보며 일에 파묻혀 지내셨다”고 말한다... 그렇다 마리아는 높은 하늘에 사신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사셨다... 마리아는 구체적인 일상 가운데 활동하셨다... 마리아는 어렵고 곤란한 상황에서도 인내롭게 가정을 꾸려간 평범한 여인이었다... 마리아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까운 이웃과 똑같이 생활하셨다... 어느날 누군가 “마리아, 흰머리가 늘어가네요”하고 말하기도 했다... 마리아 역시 건강, 경제, 인간관계, 변화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매일의 일상에서 우리는 마리아처럼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 두통 걱정 눈물 슬픔 실망감 위기감 외로움 괴로움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지에 머물러 보면 좋겠습니다.
기다림의 여인 마리아 – 3일
정말 슬픈 일은 기다려주는 사람 없는 캄캄한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때가 아니라 아무 희망이 없는 때다. 가장 외롭고 울적한 때는 벽난로 불이 꺼져갈 때가 아니라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데 불을 지필 수 없을 때다... 아무도 우리집 문을 두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슬퍼진다... 그러나 기다린다는 것은 삶의 멋을 느끼는 것이다. 매일 마리아는 약혼자 요셉을 기다렸다. 순례중에는 아들 예수를 잃어버리고도 사흘을 기다리다 찾으러 나섰다. 십자가 밑에서 아들 예수가 숨을 거둘 때까지 기다렸다. 무덤 앞에서 홀로 사흗날이 되기를 기다렸다. 최후의 만찬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기도에 매진하며 성령을 기다렸다. 기다린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매일 우리는 누구를 또는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는가? 천상적인 것을 기다리며 살아가는가? 지상의 것을 기다리며 살아가는가? 천상에 가서 지상의 삶을 살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가? 지상에서 천상의 삶을 누릴 수 있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가?
사랑에 빠진 여인 마리아 – 4일
당신을 사랑합니다! 티 볼리오 베네 Ti voglio bene, 즈 템므 Je t’aime, 떼 끼에로 Te quiero, 이히 리베 디히 Ich liebe dich, 아이 러브 유 I love you. 요셉이 “마리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고백했다. 마리아는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응답했다. 마리아는 요셉에게서 하느님께 대한 황홀한 느낌과 피조물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이는 시편을 통해서 느껴지는 벅찬 감정이다.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시편63,2) 또한 아가서를 통해서 피조물에 대한 황홀한 느낌과 하느님에 대한 신성한 사랑을 느꼈다. “나의 연인은 만인 중에 뛰어난 사람이랍니다. 그이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고, 그이의 모습은 레바논 같고 향나무처럼 빼어나답니다”(아가5,10.12.15)
*매일 우리는 일상에서 누구를 사랑하고 무엇 때문에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는가?
잉태한 여인 마리아 – 5일, 6일
엘리사벳이 잉태한지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일어나 길을 떠났다.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에 그의 태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마리아의 노래]” “마리아는 석 달 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1,26-56) 마리아는 엘리사벳 곁에서 잉태 초반기를 보냈다. 이 기간 3월 25일부터 6월 24일-요한탄생일 까지는 전례력 상으로 석달 남짓 91일간이다.
*매일 일상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잉태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전하며 살고 있는가? 모든 피조물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일어나 선교하는 여인 마리아 – 7일, 8일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1,39) 그리스어 본문에는 “마리아는 일어나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고 되어있다. ‘마리아’라는 말 다음에 ‘일어나/아나스타시아’라는 분사형이 뒤따라 나온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길을 떠나”가 그리스어 원문에는 “마리아는 일어나 길을 떠나”로 되어있습니다. 이 "길을 떠나" 또는 "일어나"에 해당하는 단어는 “아나스타사ἀνάστᾱσα”인데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의 어원 “아니스테미ἀνίστημι”는 “일으키다 세우다 깨어나다 부활시키다 되살리다 회복시키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아나스타스는 모두 열세번 이상 사용되었는데 그중 많이 사용된 곳을 보면 요한복음에서 네차례 그리고 루카복음에서 네차례 사도행전에서 다섯차례입니다. 요한11,23.24.25; 루카1,39; 4,38; 17,19; 23,5; 사도5,17; 9,11; 10,13; 11,7; 22,10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본문 내용을 보자면 이런 내용입니다. 라자로를 살리실 때에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아나스타시스)이다’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아나스타시스)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아나스타시스)을 알고 있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아나스타시스)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길을 떠났다는 말은 마리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다시 살아나서 일어났으니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죠. 다시말하자면 죽었던 마리아가 다시 살아나서 길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길을 떠나 유다 산악지방으로 가는 장면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레아로 가는 장면, 겹쳐지는 이 장면들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 두 분이 어떻게 겹쳐집니까??? 먼저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과 그리고 약혼한 요셉 사이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양쪽에 다른 두 사람이 매달린 십자가 사이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갈릴레아에서 부활하여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아인 카렌(Ain karen)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에게 당신의 부활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대 유능한 두 바리사이 니코데모와 요셉, 즉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리트라 쯤 가져왔던 니코데모와 당신을 자기 소유의 무덤에 모신 아리마태아 요셉 사이에서 부활하시어 갈릴레아로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부활한 성모님과 부활한 예수님이 교차하고 이스라엘과 유다가 교차하고 두 죄수와 두 바리사이 제자가 교차합니다. 그리고 성모님이 당신의 부활을 선포하러 유다 산악지방으로 가실 때 당신의 아들 예수님은 유다에서 갈릴레아로 가시면서 부활을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일어나 유다 산악지방으로 갈 때에 마리아는 앞으로 펼쳐질 당신 아들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목격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레아로 되돌아가실 때에 당신의 모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던 모습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알려준 주님탄생 예고(성모영보)는 마리아의 사형선고이면서 동시에 주님이 부활하리라는 주님 부활 예고입니다. 그리고 천사가 알려준 주님탄생예고(성모영보)가 마리아에게는 죽음예고였다면 마리아의 노래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는 마리아의 부활찬송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찬송은 “용약하라 하늘나라 천사들 무리...”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로 부활을 떠올리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는 죽기전에 이미 부활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통해서 그리고 부활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련의 과정, 예루살렘에서 갈릴레아로 돌아가는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부활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활 시키시는 분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스스로 죽었더라도 살아날 때에는 스스로 살아나지 못합니다. 반드시 나를 일으켜 세우실 분이 죽은 내 육신을 다시 부활 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자 삼위로 일치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일어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던 것입니다. 즉 일상을 벗어난 부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가 서둘러 떠난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하겠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순례가 아니라 일상에서 반복되는 방문이었습니다.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며 그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던 성전, 즉 몸의 성전이며 마음의 성전이며 정신의 성전인 우리의 가정이자 소속된 공동체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성전인 우리가정을, 이 공동체를 방문하신 모든 분들에게 성모님께서 당신의 은총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매일의 일상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뭐가 가장 걱정거리입니까??? 집이 부실하다면 좋은 집한채 있었으면 하고 부모형제가 부실하다면 부모형제가 건강했으면 하고 또한 가족 중에 임종이 가까운 분이 계시면 장례를 잘 치렀으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걱정에 대한 해결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걱정거리에 대한 답변을 주셨습니까??? 안주셨습니까??? 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서 답변해주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해결책을 찾을 수는 있습니다. 평범하게 살아가신 우리 주님과 사도의 모후이신 우리 성모님의 삶을 통해서 그 답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집은 형태가 아닌 천국이고 우리의 부모형제는 혈육이 아닌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죽을 때에는 죽음까지도 사랑하신 성모님께서 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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