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갈래의 길
-『가르멜의 산길』을 읽고 -
20109101 김용석(손자선토마스)
어느 나른한 주일 오후에 방청소를 하다가 문득 자유롭다가도 자유롭지 못한 내 자신에 관하여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몸과 마음과 정신도 이렇게 청소하듯이 정리 정돈이 되었으면 ∙∙∙∙.’ 그런데 『가르멜의 산길』을 읽고 나서 느끼게 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변변치 않은 재물은 별 어려움 없이 버릴 수 있는데 내 몸을 통해서 느껴지는 사소한 감정과 내 영혼을 침범하는 악령은 내 마음대로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러한 감각과 정신의 정화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영혼의 어둔밤에 이르는 길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했다.
올해 들어 축성된 봉헌생활을 10년째 보내고 있는 이즈음에 심도있게 생각해 볼 문제들 중에 하나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변변치 않은 재물과 내 영혼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소한 감정들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 모두를 유심히 살펴보고 재물을 내 자유의지대로 버릴 수 있듯이 내 영혼도 지금보다 더 정화되어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선 내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을 한 번 열거해본다면, 옷가지류, 이불류, 가방류, 도서류, 노트류, 악세사리류 ∙∙∙∙ 등이 있겠다. 이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없애 버릴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위에 열거한 모두를 버리면 곤란하게도 나보다 먼저 실천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알몸이 되기는 하겠지만 곧 그 몸을 새로 단장할 것이기에 어떤 형태의 것이라도 재물이 다시 축적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러한 시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된다. 한 여름에 불필요한 것을 챙기지 않고 가볍게 산을 오를 때 홀가분한 마음이 생기곤 하는데 그러한 마음상태가 곧 내 소유의 모든 재물을 버린 뒤에 오는 상태와 동일하다고 인정하고 싶기에 그러한 버림의 체험에 대신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내 의지로 영혼의 정화에 참여하고 싶지만 도무지 내 뜻대로 정화되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 사소한 감정과 정신은 무엇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싶다. 우선 내 머릿속에 암시된 기억들 중에서 내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웠던 순박하고 여린 감정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에 거침없이 들이닥친 격한 외부적 감정들에 의한 상흔이 내게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정을 강요받았던 일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실행하면서 몸과 마음과 영혼이 서로 대립되었음을 적지 않게 기억하고 있다. 크게 나누어 보자면 학교문제, 직장문제, 결혼문제, 신앙문제가 그것인데, 학교문제는 내 생애에 있어서 주거문제와 더불어 항상 골칫거리 중에 하나였음을 인정한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잦은 이사는 학교생활의 정신사에도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무엇인가 분주하게 일을 벌여 놓기는 하지만 왠지 결과는 잘 맞춰지지 않는 퍼즐과 같아서 그다지 균형감 있는 완성된 맞춤에서 멀어진 것 같았다. 시작은 하지만 무언가 완성되지 않고 다음 상황에 발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로인해서 지금은 수도원 공동체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도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 때에 받았던 경화된 스트레스가 아직도 내 한쪽 정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열심한 사람에게 지식을 통하여 찾아오는 기억은 들은 것, 본 것, 만진 것, 냄새 맡은 것, 맛을 본 것 등이 있고 이러한 것들에 애착을 가지면 고통, 두려움, 미움, 망상, 헛된 향락, 자만심 등이 생겨난다고 했다. 과연 나의 학창시절은 대부분 감각에 찌들었었고 그로 인해서 내게 찾아온 것은 고통과 두려움, 미움과 헛된 향락의 추구였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특히 보고 듣는 데에 있어서는 감각적 자극에 집중된 영상물의 접근은 나를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켜 놓았다. 그러한 것들은 인생의 목표를 흐리게 했고 사랑보다는 미움을, 평화보다는 두려움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이상화된 이성의 솟구침을 즐겨보고 거룩한 사랑을 꿈꾸지만 현실은 결핍된 애착의 비참한 영혼에 머물러 있었다. 결국에는 이래도 저래도 그만이니 될 대로 되라지라며 극단적인 자만심마저 느끼도록 스스로를 조장할 때도 있었다. 이러한 감정들이 나를 붙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직장문제와 결혼문제는 함께 연결되어지는데 6급 기능직에서부터 저 조직의 높은 위치까지 올려다보며 앞으로의 생애를 꿈꾸어야 할 즈음에 결혼이라는 거울이 곁에서 나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나르치스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를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모습으로 비춰주었고 혹독한 연금생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에로 나를 끌어다 놓는 것 같았다. 이러한 기억과 사색을 통해 내 영혼은 교만, 인색, 분노, 질투, 터무니없는 미움, 거짓사랑이 들어앉는 기회를 제공한 것 같다. 이러한 기억의 문을 닫아버리고 조금이라도 숭고한 나의 정화된 모습을 비추어 주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자유로이 결혼이라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감동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회를 잡지 못한 채 그 거울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비추곤 했는데 그것은 지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 갈 수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곧 내 허리를 묶는 사람이 나타나 내가 원치 않는 곳으로 나를 끌고 가리라는 비추임이었다. 이렇게 되자 내게는 직장문제와 결혼문제와 더불어 신앙문제가 덧붙어졌다.
신앙은 내게 있어서 어떤 고귀한 힘을 지닌다. 비록 유아세례를 받을 형편은 안 되었지만 아직 이성과 감정이 아물지 않았을 유년기 때 신앙은 순박하고 여린 영혼에 큰 힘과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무상성의 사랑에 머물기 보다는 윤리적 보화들 안에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나는 신앙 속에서 선행, 단식, 헌금, 고행, 기도 등에 가치를 부여해 보았다. 이런 것들의 양이나 질을 높이면 상흔의 자국이 메워 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고 또 지금도 계속해서 전례 중에 그 흐름을 놓아 버리지 않고 있어 완전히 그 맥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고 약간의 기대감 속에서 면밀히 지속되어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외적 훈련은 멈추지 않았지만 아직도 나를 악령의 지배하에 시달리게 하거나 전례주년 안에서 절제 없이 무익한 상상에 내팽개쳐진 내 영혼은 교만하고 잘 분노하며 질투에 쉽게 물들고 거짓사랑이 들어와서 분투하는 내 모습이 부각되어 괴로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내게는 오래전부터 결혼과 신앙 사이에 미묘한 갈등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발생된 가식적인 행위들은 순수한 어둔밤을 향한 영혼의 정화에 부정적인 측면으로 흡착되어 악으로 단련된 감정들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양상으로 관찰 되었다. 그러므로 사랑에 역행적인 감정에 충실하기보다 그런 것들 안에 담겨진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가치를 부여해야 함을 느낀다. 좋든 나쁘든 모든 것은 하느님을 향해 달려온 피조물의 작은 땀방울에 그 의미를 두고 싶다. 그러므로 즐거움이나 위로, 맛, 그리고 선행이나 수련들이 흔히 가져다주는 다른 흥밋거리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하며, 단순하고 순수한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기기 원하면서 단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에 빠져 들어가야 함을 느낀다. 하느님과 합일에 이르는 길에 오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를 청하기보다 오히려 한 가지를 여러번 반복해서 열정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청하고 싶다. 그리고 내 기억속의 골방을 더욱더 사랑스럽게 대해주고 그 작은 방의 기도처에서 어둔밤에 이르고 싶다. 더 나아간다면 아직까지는 해보지 못했지만 그분께서 하신 것처럼 고요한 광야로 나아가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더욱 깊어진 어둔밤의 시간에로 향하고 싶다.
나에게는 항상 두 갈래의 길이 존재해 왔다. 하나는 감각의 길로써 고통을 가져다주었고 다른 하나는 고통의 길로써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그 길 중에서 어느 길이 더 좋은 길인가를 고민하며 최선의 길을 선택했고 확고한 길을 잡아왔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길은 언제나 한 갈래 길뿐이었다. 내가 두 갈래로 갈 수 없는 유일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오직 한 갈래로만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가야할 길은 한 갈래 길만이 펼쳐질 뿐이다. 그 길은 반사되지 않은 순수한 태양빛이 내 온 존재를 밝혀서 순수한 영혼의 어둔밤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마련된 영혼의 결합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길은 고통이 따르는 길이지만 기쁨을 가져다주는 십자가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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