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밤
- 『어둔밤』을읽고 -
20109101 김용석(손자선토마스)
감각의 밤인 세상의 사물들에 대해 매력을 잃어버릴 때 영적인 힘을 얻게 되어 영혼의 정화는 시작된다(I, 8-3). 먼저 나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감각의 지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해 묻고 싶어진다. 지금까지 나는 돈의 지배, 여자의 지배, 편안함의 지배로 인하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회적이며 창조적 은총인 나의 시간을 쾌락의 밤(I, 1-3)으로부터 갈취 당해 왔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감각적인 기억들을 상기하면서 어둔밤의 정점체험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스승이시며 목자이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싶어서 수도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떤가’하고 묻고 싶어진다. 기도하고 묵상하고 세상의 괴로움을 모두 내 십자가 위에 얹어 놓고 무엇인가 세상의 삶의 방식과 좀 다른 삶을 살기를 원했던(I, 2-1) 나 자신을 향해 ‘너는 정작 무엇을 하고 있느냐’하고 묻는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가르멜의 산-그림,번역본)는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대로 나를 가장 괴롭히는 감각적인 욕구들을 살펴보고 그것들에 영혼의 힘(I, 9-3)을 더하여 모든 불완전한 영의 길을 알게 되기를 바라며 영혼의 어둔밤 속에서 머물러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게 되는 행복한 밤을 맞이하고자 한다.
먼저 세상의 감각적 사물 중에서 재물이 있는데 재물 중에서 돈은 자신의 초라함과 유치함(I, 12-2)을 깨닫게 하는 데 장애물이다. 그래서 돈을 다룬다는 것은 어둔밤으로 들어가기 위한 첫째 걸림돌인 것 같다. 수도원에 입회해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식사시간에 복음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고 돈 이야기가 신중하게 오고 가는 것에 다소 실망스러워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수도회이고 수도자들이 왜 이래’라는 의문이 든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잠깐 성소가 흔들렸었는데 ‘재산이 많은 청년이 슬퍼하며 떠나갔’듯이 형제들이 하나씩 수도원을 떠나는 이유를 애써 그가 돈에 유착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에 들어온 것이 맞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고 ‘맞겠지...’ 라며 ‘조금만 더 지내보자, 뭔가 하느님 사업을 하는 데에 이유가 있겠지’라며 굳이 마음을 달래며 기다렸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내가 수도자로 양성되는 것인지 아니면 장사꾼으로 전락하는 것인지에 관하여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기도와 묵상 중에 예수님은 점점 더 늦게 다가오시고, 생각하고 싶지 않고 가능하면 멀리하고 싶은 금전적인 관계가 재빠르게 침투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하루 일과 중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도직을 하는 것인가 장사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구분을 나는 아직까지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한 것 같다. 어떤 것이 벌어먹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이 빌어먹는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선을 구분 짓지 못하는 것 같다.
최근 들어 내가 느낀 바 있는 성경구절에 의하면 명백한 사실이자 진실이 있는데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비록 돈과 가까이 있더라도 그로인해 내가 초라해 지거나 유치해 져서 죽어 가면 그것은 사도직을 하면서 벌어먹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장사를 하면서 빌어먹는 것이 분명해진다. 내가 커지고 삶을 풍요롭게 누리려고 돈을 사용하는 영혼이 있다면 악마조차도 그러한 영혼은 그냥 내버려 둘 것이 명확하기 때문에 어둔밤의 영적 합일을 생각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영적 수련에서 멀어질 것이 확실해 진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의 요한은 ‘습관적이거나 본성적인 애착의 모든 것들로부터 단순해지고, 깨끗해지는 것’은 천상적 감미로움과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서 유익하다고 한 것이다. 정신을 어둡게 하는 것도, 정신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도 영적인 ‘행복한 밤’에 이르는 데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며 그렇지 않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영적인 맛들의 모든 풍요로움에서 만족을 맛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을 것’(II, 9-1)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나의 영성생활 속에서 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삶의 방식인 죽음, 즉 영혼의 어둔밤은 언제나 받아들여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어둔밤으로 들어가기 위한 걸림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여자생각이었다. 성당에서만 자매님들이 많은 줄 알았는데 수도원에 들어왔더니 수도자보다 직원으로 근무하는 자매님들이 더 많은 것에 놀랐다. 그리고 흔치는 않지만 서원기간 중에 자신의 성소가 결혼 성소로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러한 상황들을 목격한 나도 “영혼의 아랫부분인 감성”(I, 4-2)에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여자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일 외에 다른 일은 할 수 없었다. 때로는 이번 기도 시간만큼은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어느새 불안한 마음은 넘지 못할 선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었다. 왜 내 지성은 그런 쪽으로는 무한정 자유로운가에 대한 회의감마저 밀려들었다. 결국 수도자로서 이 많은 자매님들 속에서 어떻게 매끄럽고도 거룩한 영성생활이며 “자신의 모든 잡념과 충동을 하나씩 없애주는 어두운 밤의 자유를 누리며”(I, 4-3) 또한 거룩한 사도직을 할 수 있을까하는 막막함이 몰려들기도 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나의 음란에 대해서 잘 지적해 주고 있는데 이것은 축성봉헌생활을 하는 내게 큰 과제를 안겨준다. 요한은 말한다. “영적 음란함이란 음란함 자체가 영적이라기보다는 영적인 것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영성수련을 하는 동안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로써 수련자가 피할 틈도 없이 영혼의 감성적 부분에서 일어나고 외설적인 행동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잘못은 가끔 영혼이 깊은 기도에 빠져 있을 때, 혹은 고해성사를 받는 가운데, 그리고 성체를 모실 때에도 생긴다.”(I, 4-1)
이러한 영적 음란함을 죽기까지 풀어도 풀지 못할 문제일 수 있겠지만 한 가닥의 희망은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복자 알베리오네가 즐겨 사용하신 방식인 것 같은데 해골을 묵상하는 것이다. 알베리오네의 책상에는 항상 사람의 해골이 있었다. 그것에 연유하여 여자의 육체적 아름다움의 영성적 접근의 한 부분으로서 해골을 묵상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해본 바에 의하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적 음란함에서 탈출하기란 쉽지 않았음을 고백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 의한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해를 했던가. 작심삼일 이라는 말에 치를 떨며 항상 고백 성사를 본 다음 재범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죄를 또 저지르는 비참한 나를 바라보며 사흘 안에 다시 또 성사를 받아야 할 상황에 직면 할 때 삶이 얼마나 무서워지고 무거워지는지 절감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느님의 지속적인 창조적 표현인 젊음은 끊임없이 이어져 나를 유혹하고 지배하겠지만 나는 그 젊음 속에서 잠깐 머물다 간다는 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며 어쩌면 내 노력으로 인한 성취가 아닌 수동적 측면에서 그것을 한 가닥의 또 다른 희망으로 보고 싶어지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세 번째 어둔밤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것은 편안함인 것 같다. 하루를 성찰하며 몸과 마음이 함께 편해 본 적을 얼마나 있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내 기억으로는 도무지 떠오르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몸은 편한데 마음이 불편하거나 마음이 편한데 몸이 불편한 기억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의 일인데 한 여름에 더위를 피해 깊은 산이 많은 강원도로 피정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 몸은 편했으나 불편한 마음이 피정 끝날 까지 나를 지배했었다. 그것은 내가 수도원에 들어가서 지내는 동안 투병 중이신 홀어머니의 고통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 때의 거칠어진 마음(II, 2-2)을 다음과 같이 적어 둔 적이 있었다.
“얼마나 형식적인 기도를 해 왔는지 성찰해 본다. 영으로 새로 나야 한다고 했는데 마음은 벌써 편안한 피정장소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있구나, 피정도구를 정돈하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조용한 곳, 따뜻하거나 시원하게 잘 잘 수 있고 씻을 수 있는 곳, 좋은 물, 맑은 공기, 산새 소리 청정한 곳, 개울물 소리 경쾌한 물가, 은은한 묵상 음악이 흘러나오고, 감실 아래 조명이 차분하고, 촛불조차 숨죽이는 경당에서, 십자고상의 고통이 심금을 울리는 곳, 푹신한 방석에 가부좌 틀고 앉아서, 어렵게 기도하는 척 했다.”
그래서 내 마음 속의 갈망은 두 가지를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현실적인 관계성에 적응하기위해 몇 가지 고행을 미리하면서 그 때가 오기를 바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와 비현실적인 관계성 안에서 정신적 고통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바라는 것이다. 즉 육체적 편함을 얻기 위해서 몸을 고통 속으로 몰입시키기도 하고 마음의 평안을 성취하기 위해서 정신적 고통을 기꺼이 참아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는 다 옛 습관에서 일어난 감각적 활동일 뿐 수동적인 인도자의 도움을 받아 영혼의 어둔밤으로 가기위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그럼으로 지금까지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두가 어둔밤을 의식한 가식적인 표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제는 복된 밤(II, 25-4)을 향하여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육체를 다하여’(마르 12,30) 감각의 허울을 벗어버리고 영혼의 합일인 영적 혼인을 향하여 정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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