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 “나를 따라라” 여기서 “따라라”는 말씀은 아콜루테이ἀκολούθει인데 원형 아콜루테오ἀκολουθέω는 따라가다 따르다 뒤따르다 잇따르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콜루테오에서 접두사 아ἀ와 끝에 붙은 테오θέω를 제외한 어간에 해당하는 콜루오κολούω는 잘라버리다 덜어내다 끊어버리다 중단시키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마태오에게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실 때에 아콜루테오ἀκολουθέω는 네가 하는 일을 끊어버리고 잘라버리고 덜어버리고 중단시키고 나를 따라라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즉시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따라라”는 의미의 아콜루테오ἀκολουθέω는 열두차례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공관복음에서 여덟차례 요한복음에서 세차례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한차례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먼저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를 부르시는 장면 이야기는 공관복음에 모두 나오는 이야기인데 마태오복음 9,9; 마르코 2,14; 루카복음 5,27에 걸쳐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장사를 지내려는 제자 이야기에서도 나를 따라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 장면은 마태오복음8,22과 루카복음9,59에서만 전해줍니다. 어떤 제자가 아버지 장사를 지내려고 집에 돌아가려 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나를 따라라”, 그리고 공관복음에서 모두 나오는 부자청년 이야기가 있는데 마태오복음19,21; 마르코복음10,21; 루카18,22입니다. 여기서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합니까?”하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계명들을 지켜라고 말씀하시자 부자청년이 그런 계명들은 다 지켜왔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무엇이 더 부족한지 재차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까지가 공관복음에서 여덟차례 소개하고있는 따라라 라는 아콜루테오ἀκολουθέω입니다. 공관복음 이외에 요한복음에서도 세차례 나온다고 했는데 요한1,44에서 예수님께서 필립보를 만나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장면에서도 나오는데 요한21,19 전문을 직접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한복음 22절에서 베드로가 당신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는 장면 요한21,22에서 “너는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도행전에서 한 번 나오는데 베드로가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나는 장면에서 천사가 베드로에게 “겉옷을 입고 나를 따라라”에서 한 번 나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실 때에만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부출신 네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는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그 때는 좀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에도 분명히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어부 네사람을 제자로 부르실때에 그때에 “나를 따라 오너라”에서 “따라라”는 데우떼δεῡτε입니다. 마태오를 부르실 때에 말씀하신 아콜루테오ἀκολουθέω와 다르게 부르신 것입니다. 어부출신 네 제자를 부르실 때에 “나를 따라 오너라”에서 “따라라”는 데우떼δεῡτε라고 말씀드렸는데, 데우떼는 “이리로” “이쪽으로” “여기로” “이곳으로” 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네 명의 어부를 부르실 때에 말씀하신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말씀은 “나를 따라라”는 의미라기보다 “이리 오너라” 혹은 “여기로 오너라”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따라라”가 아니라 나에게 “오너라”에 가까운 따름의 의미입니다. 이렇듯이 친근하게 예수님께서 어부 네 사람을 부르실 때에 가까운 집안 사람을 부르듯이 이리 오너라 라는 의미로 데우떼δεῡτε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참고로 예수님께서는 요한21,12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고 말씀하신 장면에서도 데우떼δεῡτε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에서 제자들이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라고 할 때에 따름은 아콜루테오ἀκολουθέω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를 부르실 때에는 왜 어부 네사람을 부르실 때와 다르게 불렀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생각해보면 마태오의 이름은 알페오의 아들 레위였는데 예수님께서 마태오로 부르셨습니다. 마태오라는 이름을 사전에 찾아보면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나오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하느님의 선물이라기 보다 “하느님의 수고” “하느님의 고통” “하느님의 보속”이라고 해야 마태오라는 이름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마태오는 세리였는데 세리라는 일은 백성들에게 공적인 의무를 부여하고 그에 합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직업입니다. 무슨일이든지 공적인 일은 사적인 일보다 훨씬 더 수고롭고 고통스럽고 껄끄러운 일들입니다. 그러니까 공적인 권력에 몸담고 앉아서 수고롭고 고통스럽고 껄끄러운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리로 오너라” “이쪽으로 오너라” 밑도 끝도 없이 “여기로 오너라” “이곳으로 오너라”라고 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태오에게 말씀하신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은 공무수행중인 사람에게 필요한 절차를 밟는 과정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게서는 어부 네사람을 부르실 때와는 다르게 마태오를 부르실 때에는 네가 하고있는 일을 끊어버리고 잘라버리고 덜어버리고 중단시키고 나를 따라라 라는 의미로 아콜루테오ἀκολουθέω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즉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공개적으로 부과된 그의 수고롭고 고통스럽고 껄끄러운 죄를 끊는 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일을 끊고 그 당시 동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던 일을 청산하는 일이 그에게 먼저 필요했던 것입니다. 마태오는 그일을 그렇게 끊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직업을 바꾸는 일이 어디 쉽습니까??? 예전에 한가지 일을 하는 사람은 열 가족을 부양하고 열가지 일하는 사람은 자기 목구멍에 풀칠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직업을 바꾸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직업을 바꾸는 일입니다. 그래서 좋은 직업을 가지려고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고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마태오가 예수님을 따르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누려야할 자유로운 직업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직업들 중에 가장 훌륭한 직업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라고 오늘 마태오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봉사하는 일이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라면 그 일은 분명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치롭고 자유롭고 행복한 우리의 직업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오로가 로마14,8에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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