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연중제27주간 월요일 루카10,25-37 (스승예수/협력자미아리)

jasunthoma 2019. 10. 7. 03:45

오늘 복음에서 주인공은 방인의 이웃이 되어 준 이방인 사마리아인입니다.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뫼르소라는 주인공은 이웃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무는데 자기 자신조차 자기 육신의 영혼에 대한 이방인으로 인정하는데 동의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자아 존재를 자기 자신조차 이방인 이라는 명제 속에서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따라서 대자연 안에 초라한 인간의 세상에 대한 이방인, 사회에 대한 이방인, 가족에 대한 이방인, 애인에 대한 이방인, 친구에 대한 이방인, 부부에 대한 이방인, 그리고 자기 육신의 영혼에 대한 이방인은 이 소설에서 끊임없이 제기하고자 하는 화두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다양한 인생관들 중에서 좀 더 특이할 만한 것을 한 가지 꼽는다면 주인공 뫼르소의 결혼관이다. 그는 결혼이란건 중대한 일이 아님을 확신하며 살았던 것 같다. 흔히 결혼을 인륜지대사라 하여 전통적으로 매우 중히 여겨왔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정식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뫼르소에게는 그다지 볼품없는 겉치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결혼이란 것도 한 순간 머물다 사라지는 뜬구름임을 호소하려는 것이 뫼르소의 의도가 아닐까? 긴장과 흥분으로 요동치며 쾌락으로 세월을 보내고 싶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울일뿐 실체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인생 여정의 밀물이 몰려들어 감정의 숲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처사가 아닌가? 늪에 빠진 몸이 자꾸만 깊숙이 들어가듯이 이성의 마비로인해 발생하는 지속적인 오류로 보여진다. 즉 쾌락으로 가장한 기쁨과 행복이 결혼으로 주어지는 미화가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인간의 감정과 쾌락도 하느님이 주관하심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보다 더 고귀한 무엇인가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빼먹을 수없는 가치를 안고 있으며 그것을 생각해보고 그대로 실천해 보지 않고는 결코 그것만의 고귀함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누구나 그 선상에 머무를 수 없는 아쉬움이 존재한다. 적적한 때를 알고 그 시기에 맞춰 순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본다면 뫼르소는 인간의 생체리듬의 때를 거슬러 살지는 않았지만 그 적절한 때를 맞춰 사회제도화하여 이를 어기거나 소홀히 하지 못하게 하는 올무를 뒤집어쓰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개별 감정에 순종했으며 그 감정은 분명 절제된 이성의 선택으로 조절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성을 통해서 감정을 받아들임이 자칫하면 무분별한 사람이나 책임회피자 혹은 현실도피자쯤으로 인식될 수 있겠으나 이는 명확히 하자면 잘못된 추론이다. 뫼르소가 결혼을 애써하려하지 않는 것은 결혼 제도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그는 단지 결혼의 불필요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뫼르소의 입장은 정제된 종교 규율에 닫혀진 혼인의 불가해소성 이전의 자유로움에 그 근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오히려 인류의 근원인 아담과 하와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더 진실된 진술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아무도 아담과 하와가 결혼했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보다 오히려 주님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느끼는 사랑이 더 크고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부부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최상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만을 생각하며 그분과 일치됨이 절대적 행복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백골이 진퇴되도록 사무치는 육신의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과 인간이 한 방향으로 일치를 이루며 유희하는 것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어진다.

 

유희하는 이방인의 영혼은 완전한 사랑이라는 도식이 이 소설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영혼의 유희다!’는 것입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상념속에서 영혼의 숨결을 느끼며 그 영혼의 움직임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맡기는 유희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즐거운 영혼을 지니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이 바로 유희하는 영혼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되 묻자 그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으며... 결국 그러한 그의 대답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율법교사가 이렇게 말했지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한다"

여기서 네가지 단어가 열거되는데요... 마음 목숨 힘 정신입니다.

이 네가지는 보이는 육신에 생명을 주는 보이지 않는 인간 존재 전체를 가리킵니다.

특히 이 네가지 중에 목숨이라고 번역되어있는 말은 대부분 스페인어권에서는 alma라는 단어로 번역해 놓았는데 이는 영혼, 넋 또는 우리가 흔히 "애간장"이라고 애기할 때에 심장과 간장을 지칭하는데 corazón이 심장이고 더불어 alma는 간장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영혼으로 번역해야 마음과 영혼, 즉 애간장이 되는데 우리나라 새성경에서는 육신에 생명을 불어넣어줄 때에 좀 더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호흡인 숨, 즉 목숨에 더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따라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 사랑과고 이웃 사랑을 실천했던 영혼은 바로 사마리아인, 즉 이방인의 영혼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사도직하러 나갈 때에 죽으러 가듯 비장한 각오로 나가기보다 여행가듯이 기쁘고 즐거운 영혼으로 사도직장으로 나설 수 있는 하루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