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연중제26주일 루카16,19-31 (광문성당)

jasunthoma 2019. 9. 24. 20:55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소리질러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심연, )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쪽으로 건너가려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해도 올 수 없다"

 

여기서 부자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에 잠시 머물러 보게됩니다.

왜냐하면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이야기에서 부자는 자비롭지 못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살아생전 자비를 베풀줄 모르던 부자가 죽어서는 어떻게 자비를 알게되었을까요????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을(하늘나라)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즉, 어떻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하는지 다시말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즉, 강도를 만난 순례자에게 사마리아인이 베풀었던 관심과 사랑이 곧 자비라는 것을 모를 것 같았던 부자가 죽어서는 어떻게 자비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했을까요???

이는 율법교사가 이미 이웃사랑을 알고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처럼

부자 또한 자기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살아있을 때에도 자비가 뭔지, 어떻게 하는 것이 자비를 베푸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가 잔치 손님을 맞이할 때에 대문 밖에서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누워있던 라자로를 못봤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부자가 베풀어달라고 청한 자비는 루카복음 10장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베풀었던 착한 사마리아인의 자비와 같은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부자가 베풀어달라고 간청했던 자비는 (compacion, compadecerse, misericordia, apiadarse lastima)

compasión불쌍히 여김, 동정 /

lástima슬픔, 애석, 유감 /

Misericordia자비, 자비하심, 측은지심, 용서, 관용

Compadecer동정하다, 불쌍히 여기다, 합치다, 뜻이맞다,

conmover마음을 동요시키다, 감격시키다, 감동시키다 등등의 서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compacion에서 com은 함께 pasión는 수난하다 다시말해 수난을 함께 당하다.

compadecer에서 com은 함께 padecer는 상처입다 다시말해 상처를 함께 입다는 의미가 자비라는 말속에 합성어로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아브라함 할아버지는 부자의 청을 단호이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심연, )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쪽으로 건너가려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해도 올 수 없다"

 

여기서 큰 구렁(심연,}이 생겼다는 단절된 삶을 살았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동시대에에 살았지만 함께 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살아서도 그랬고 죽어서도 부자와 라자로는 서로간에 조금이라도 함께 어울렸던 연결고리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장면을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부자도 죽어 묻혔다"

이 말은 라자로가 죽어서 묻히지 못했다는 말을 하고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자는 죽어서 묻혔지만 라자로는 묻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라지로는 묻히지 못했습니다.

무덤이 없는 겁니다.

묘를 쓸 재간이 없기도 하겠지만 묘를 쓰더라도 찾아주고 기억해 줄 만한 가족과 친척들, 이웃조차 없는 사람들을 대변하기라도하듯이...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불행애 보입니다.

그런처지에 있던 그를 성경 본문에서는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고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사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누구도 관심가져주지 않고 거들떠보지않았지만 그는 생명이신 하느님, 복되신 분 곁으로,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신 영예와 영원한 권능을 지니신 분(I 디모6,15-16) 곁으로 갔다고 오늘 제2독서는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북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의 삶이 현세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현세에서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든 비참하게 살든

움직일 힘조차 없이 대문 앞에 비참하게 누워있든 잔치 상에 품위있게 앉아있든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결코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의 고통이 고통 그대로 끝나버리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현세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즐겁게 살았더라도 그것을 나누지 않았다면 그 다음은 고통과 괴로움이 찾아온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라자로의 고통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당장 창피하고 힘들다고 두렵다고 내 고통을 멀리하고 알리지 않는다면 내세에서 아무것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통도 쉽없이 두드리고 청하라는 겁니다.

하느님은 벌은 벌대로 주시지만 상을 주실 때에는 그 보다 후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살아생전 베풀 수 있을 때에 자비을 베풀기를 바라십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내세에서 물 한 방울조차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단절이 우리를 그렇게 갈라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이번 한 주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안에서 우리의 마음이 더욱 자비로울 수 있도록 문을 두드리고 청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