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세차례에 걸쳐서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두번은 주간 첫날에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을 때에, 그리고 한번은 여드레 뒤에 토마스가 있을 때에 평화를 빌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시며, 평화를 강조하셨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생전에 살아계실 때에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라고 불릴 것이다며 사랑을 강조하셨는데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나타나셔서는 사랑이 아니라 평화를 강조하시는 모습입니다. 왜그러셨을까요??? 사실 공생활 중에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을 가장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후에는 믿음과 평화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서로 사랑하는게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승이 계시는 한에는 제자들은 모두 평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끼리 서로 누가 높고 누가 낮은지에 관해서 논란이 일더라도 그들 곁에 스승이 있는한 서로 불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상황이 달라진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바뀝니다. "우리는 스승님을 뵈었소" 이 말은 그러니 우리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오 라는 바람이 전제된 암묵적인 표현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랬더니 못 본이가 이렇게 맞섭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당신들이 본 스승님은 실체가 없는 유령에 불과한 것이오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누군가 스승님의 역할을 해야만 하는 문제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나게 되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스승이 안계신데도 불구하고 서로가 평등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방법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모두가 스승처럼 높아지든지 아니면 모두가 제자처럼 낮아지든지입니다. 그런데 제가보기에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스승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살아생전에는 서로 낮아져라고 말씀하셨지만 부활하신 뒤에는 '서로 스승이 되도록 노력하여라' 하시면서 높아지기를 바라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 하시며 모두에게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없던 이들을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지않고 믿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여기서의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은 불완전한 인간의 시선을 완전한 하느님의 시선으로 변화시켜 주는 평등한 믿음인 것 같습니다. 즉 믿음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나라는 어디일까요??? (볼리비아까지 비행거리가 2만1천Km) 지구 한바퀴 거리는 적도 기준으로 4만75Km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나라는 2만Km 하고 37,5Km 가 떨어진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멀리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가장 먼 나라를 지나서 계속 직진하면 어떻게 됩니까???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워져 버립니다. 즉 인간의 세상은 곡선으로 굴절되어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즉 이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인간의 눈으로는 직선을 볼 수 없다는 말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굴절이 되면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생각,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눈이 아니고서는 휘어진 세상에서 직선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직선은 수직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원을 상징하는 수직선은 하느님을 상징하고 평등과 평화를 상징하는 직선은 인간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영역인 평화를 주시기위해서 스승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믿음이라성령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신 이유는 유한한 세상에서 영원을 노래하고, 죽더라도 살아나고, 첫째가 꼴지되고, 꼴지가 첫째되는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그러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성무일도 4주간 월요일 저녁기도 때에 시편136편을 노래하는데 거기에서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고 매 구절마다 노래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성경에서는 자애는 영원하시다로 번역하였고 공동번역에서는 사랑은 영원하시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자비든 자애든 사랑이든 모두 믿음에 기초할 때에 영원하다고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러한 믿음을 고백했던 사도 토마스처럼 예수님 안에서 주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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