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연중제22주간 화요일 루카4,31-37 놀라운 힘(대전협력)

jasunthoma 2015. 9. 3. 05:03

갓난 아기가 태어나면 곧 눈을 뜨는가요???

곧 눈을 뜬다면 그러면 볼 수 있는가요???

그렇다면 왜 눈을 뜨고도 볼 수가 없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 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면 언제나 회당에 가시어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몇가지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어떻게 가르치셨길래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몸시 놀랐을까?? 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분의 권위있는 말씀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이어지는 바로 전 복음 내용과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실 때의 장면속에서 이미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말씀의 권위가 잘 설명 되어 있습니다.

그분 가르침의 내용과 그분 말씀의 권위에 해당하는 모습이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실 때의 권위있는 가르침의 모습을 통해 비춰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실 때의 장면을 잠시 살펴보는 것도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한가지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셨을 때에도 오늘 복음에서 처럼 늘 하신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하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찌하여 예수님께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건네주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때 당시 성경이 어떤 형태로 회당에서 봉독되었는지에 관해서 제가 직접 본적은 없습니다만

본문을 통해 본다면 성경이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것까지는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중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전해졌다고 하는 것으로 본다면 성경의 다른 부분들도 두루마리 형태로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토라에 해당되는 (모세오경:이스라엘의 탈출)을 묶은 두루마리도 있었을 것이고, 여호수아나 사무엘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묶은 두루마리도 있었을 것이고, 욥이나 시편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의 지혜)를 묶은 두루마리도 있었을 것이고, 오늘 복음에서 건네진 이사야나 예레미아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의 예언)을 묶은 두루마리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 두루마리들 중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건네졌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들은 예수님께 그러한 여러가지 두루마리 중에서 하필이면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건넸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토라도 있고, 역사서도 있고, 지혜서 두루마리도 있었을 터인데 어째서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건넸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 해방자, 구원자, 그것도 아니면 참 예언자만으로라도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가 아니라 모세오경(토라) 두루마리를 건넸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오경은 이스라엘의 해방의 역사와 율법이 기록된 책인데 그 중심에는 출애굽에서 하느님이 펼쳐 보이신 해방활동, 즉 이스라엘 백성을 일으켜 세우시는 가장 기초적인 구원활동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오경의 탈출기가 아니라 예언서의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건넸던 것입니다.

뭐 그때 전례에 따라 이사야 예언서를 봉독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들에게는 다른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러한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리시고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가'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즉 그들이 예수님을 무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무시했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기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이 무슨 일이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루카복음사가는 카파르나움에서의 행하신 예수님의 행적으로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장면 외에도 백인대장의 종을 살려주시는 장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이방인의 종의 구원과 관련된 기적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그러한 기적을 행하신 카파르나움으로 가실 때에 물위를 걸어가시는 장면을 전해줍니다.

이 장면은 바다를 건너가신 탈출과 관련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의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전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곧바로 광야로 들어가시어 40일에 걸쳐 단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레아로 돌아가시어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복음 선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렇듯 루카복음과 요한복음을 서로 비추어보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인들의 중심적인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출애굽이라는 하느님의 해방활동이 자연스럽게 겹쳐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주어진 이사야 예언서를 펼치시어 그들의 중심 전통인 해방을 알리는 구절을 찾아서 봉독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같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61,1-2)

 

그런데 이 구절은 특이하게도 토라인 레위기 25,8-13에 있는 내용과 같은 구절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예언서를 건넸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예언서를 통하여 토라를 봉독하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그들은 예수님을 무시했지만 예수님은 무시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더러운 영들의 특징은 아주 작은 데서 시작됩니다.

독사는 아주 작을 수록 더욱 강한 독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독사가 나뭇가지에 붙어있으며 가늘고 여린 가지처럼 보여서 알아보기 쉽지 않다고 합니다.

사람이 행여나 알아차리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여리고 작아서 자세히 보면 귀엽기까지 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까이 가서 바라보아도 아무런 위험이나 경계심을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심하고 손을 가까이 하는 순간 손 끝을 물어버립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 작고 귀여운 뱀이 손끝을 물었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생기겠는가?? 라고 생각하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더러운 영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치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의 선한 마음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괜찮겠지.. 괜찮겠지... 이정도라면 아무렇지도 않겠지... 라는 마음이 들도록 부추깁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도록 온갖 방법들을 다 동원해서 무방비 상태로 스스로 가만히 있도록 속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그들의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오늘 복음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있던 더러운 영이 들통나버린 자신을 감출수가 없었던지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몸시 놀라 서로 말하였습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요헌12,35)

 

오늘 하루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예 할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단호하게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권위와 힘이 우리 안에서도 머물수 있도록 청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