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연중제19주일 요한6,41-51 살아있는 빵(성바)

jasunthoma 2015. 8. 13. 05:5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유다인들이 못마땅해 하자 다시 말씀하실 때에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생명의 빵에서 살아있는 빵으로 달리 말씀하십니다.

빵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빵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말도 믿을 수 없지만 빵이 살아있다는 말도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소리군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빵가루가 내리는 것도 아니고 빵이 직접 하늘에서 내린다거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빵이 살아있으면 빵을 심으면 나무가 되어 빵이 가지에 주렁주렁 달리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밀이 살있다면 몰라도 빵이 살아있다는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도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물어보다가 이게 무엇이냐라는 뜻의 만나로 부르는 것조차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민족이었습니다.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을 보잘 것 없게 여기거나 하찮게 여겼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실재로 그들은 만나를 먹으면서도 불평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빵이다 하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살아있는 빵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은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보잘 것 없거나 하찮게 여길 수 없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빵은 세상의 피조물이지만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인 인간에 의해서 생명을 주는 피조물도 곧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만나가, 보리가, 밀이 빵으로 구워지듯이 피조물은 인간에 의해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 신음하는 우주에서 핑의 마음으로 >>

다음은 김영희잼마루시 수녀님의 선교지에서 읽는 바오로서간 일곱번째 편지로 소개된 글에서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는 새로운 인간에 의해 완성된다는 사도바오로의 정신을 잘 설명해 주고 있어서 잠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정신을 프란치스코 성인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생각합니다.

 

[ 10월이 되면 네팔인의 가장 큰 축제인 '더사인(Dashain)'이 시작됩니다. 이때 높게 잘 자란 대나무를 질긴 밧줄로 엮어 7-8미터 높이의 그네를 만들고 더사인부터 티하르 축제까지 온 공동체가 함께 그네타기를 즐깁니다.

네팔어로 ''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 그네는 단순한 놀이기구가 아닙니다. ''은 네팔의 문화와 전통, 공동체 정신, 무엇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그들의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그네를 타면서 네팔인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발을 높이 띄워 땅을 딛지 않음으로써 세상 근심에서 자유로워지고, 잠시라도 땅을 가볍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받치며 말없이 수고해 주는 땅을 한 순간이라도 가볍게 해 주고 자신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인 것입니다. ]

<<출처 : 성서와함께,473, 20158월호, 22-25>>

 

"내가 생명의 빵이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말씀을 사도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새인간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즉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인 새인간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특히 로마 8장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피조물들이 그들의 속삭임을 들어줄 인간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그 인간이 바로 새인간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8,19-23)

 

즉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순간이 바로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리는 생명의 빵으로 맞이하는 순간이 바로 하늘에서 빵이 내린다는 의미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실재로 생수를 양 쪽에 떠놓고 한 쪽에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좋은 말로 칭찬해주고

다른 한 쪽에는 볼때마다 짜증납니다. 미워합니다. 싫어합니다. 아주 죽겠습니다. 하고 나쁜 말로 야단을 치면

좋은 말을 들었던 생수는 달고 부드럽게 변해서 향기가 나서 마시면 생명이 살아나고

나쁜말을 들었던 생수는 쓰고 고약한 악취가 나서 마실 수 없는 물이 되어 버린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피조물들은 인간의 상태에따라 탄식하기도 하고 찬미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변화야 말로 그 어떤 피조물의 표징보다 중대한 표징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새인간을 입은 사람은 모든 피조물을 멸망의 구렁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창조이래 지금까지 그분을 기다리며 다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듯이 우리자신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녀인 새인간으로 변화되어 우리의 죽을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빵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빵은 우리 육신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양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그런 정체불명의 빵/ 피조물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빵은 더이상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선포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신은 곧 사라지고, 또 지금도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광야에서 만나가 생명의 빵이었지만, 그리고 그들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가 그들의 배를 불렸지만,

이제 그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만나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빵이자, 살이있는 빵.

배고프지 않는 빵이자,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느님의 참된 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한 번 먹으면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빵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빵은 분명 이시대의 중요한 양식임이 분명합니다.

그 빵은 아무리 먹어도 탈이 나지 않고, 또 한번 먹으면 영원히 배고프지 않으니 삼시세끼 때마다 계속해서 먹지 않아도 되는 생명의 빵입니다.

그것은 또한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전해지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의 빵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이번 한 주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살아있는 빵, 생명의 빵을 서로 나누어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