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연중제18주간 금요일 마태16,24-28 (제주협력)

jasunthoma 2015. 8. 12. 07:1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 하며 당신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십자가 수난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당신을 따르는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져라는 말씀의 의미는 알듯말듯 하면서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에 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 오늘날 신앙인들의 숙제가 아닐까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와 더불어 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몇 가지가 떠오르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새벽미사입니다. ~~~

[닐기유메트의예화-땅끝까지] 사막의 어느 수도원에 한 젊은이가 입회를 했습니다. 그는 대수도원장인 파코미오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하느님을 따르고 싶은데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지도해 주십시오" 연로한 수도자는 그 젊은이가 대견한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젊은이의 수련은 시작되었습니다. 3년이 되어 찾아갔을 때에 파코미오가 물었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젊은 수련자는 할 말이 많았습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시는 무한 존재이시며, 천상과 지상의 그 모든 사람들의 근원이시며 어머니이시고. . ." 젊은 수련자는 그가 하느님에 관하여 발견한 모든 것들을 원장 앞에 다 쏟아 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명상가는 아닐세. 가서 계속 기도하게나"

그리고 다음 3년이 되어 찾아갔을 때에 파코미오가 물었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젊은 수련자는 원장의 물었을 때에 전보다 말수가 줄어들긴 하였지만 여전히 말을 많이 했습니다. 하느님은 구세주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에 빠진 나를 구원해주시는 자비로우신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은 방탕한 아들의 아버지이시고, 죄 많은 저를 받아 주시는 동정심이 많은 분이시고. . ."

그런데 이번에도 "아닐세. 계속 기도하게나" 그리하여 젊은 수련자는 다시 3년간의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세번째 3년은 고문과도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으며, 아무런 생각도 주지 않으셨으며, 아무런 마음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3년간을 깊은 침묵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3년이 되었을 때에 그는 파코미오를 찾아갔습니다. 수도원장이 물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성화주이십니다!!! 그는 구세주를 통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거룩하게 되는데에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는 의미로 받아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 뒤에 십자고상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구세주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구세주께서 저런 모습으로 계시는 이유는 창조주의 뜻에따라 성화주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주일마다 사도신경을 외우며 3중 믿음에 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를 때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시기 때문일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소리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말도 이야기도 비록 소리 없어도 그 소리 온 땅으로 퍼져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가도다"(시편19,4-5, 성무일도제2주간월요일아침기도) 그래서 항상 웃으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는 양치기 개처럼 살아갑니다. 양치기 개를 잠시 생각해봅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뒤를 따라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울타리를 넘어가는 이는 도둑이며 강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따라가지 않고 앞서가는 이는 도둑이며 강도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공을 찰때에 공격수가 공을 앞서가면 공을 빼앗긴 거나 다름없습니다. 항상 공이 앞서 나가야 하고 앞에 있어야 이기는 경기가 바로 축구라는 것입니다. 공이 내 뒤로 빠져나가는 것은 곧 실점이나 다름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축구장의 공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목자는 항상 앞서가시고 양들은 목자 뒤를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양떼 뒤를 따라가는 임무를 맡은 이가 있습니다. 양치기 개입니다. 양치기 개는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양떼를 따라갑니다. 그 개는 양을 앞서가지도 목자를 앞서 가지도 않습니다. 항상 뒤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소리를 치지도 않습니다. 항상 웃으며 즐겁게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밝고 순하던 양치기 개라도 늑대가 나타나면 크게 소리치며 사납게 맞섭니다. 늑대가 나타나지 않는한 언제나 양들을 따라다닙니다. 이러한 양치기 개의 모습이야말로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 도미니코//성 라우렌시오의 삶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자의 삶이 아니라 양치기 개의 삶을 사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성인의 삶은 죽음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입니다. 일상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은 부끄러움을 무릅쓰는 삶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저 십자 고상을 보면 어떻습니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십자가 영성을 살아간다는 것은 실재로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터에서 원수와 말다툼 하는 위협을 늘 느끼며 살아가는 순교영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우리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름으로서 세상에서 어떤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세가지 부끄러움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드렸던 바 있습니다.

먼저 정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 그리고 청빈하게 살아갑니다. ~~~ 또한 순명하면서 살아갑니다. ~~~

그래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자존감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부끄러움을 버리고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끄러움을 버린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과 전혀 다름니다.

-> 그사람이 바로 전대요(예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어두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

부끄러움을 모르는 상태를 어린이라면 부끄러움을 버린 사람은 어린이처럼 사는 사람이 됩니다. 즉 어린이는 부끄러움을 모르지만 어린이처럼 사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압니다. 알면서도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이번 한달동안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복된 십자가를 통해서 행복에 이를 수있는 삶을 살 수 있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