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연중제8주간 금요일 복자윤지충바오로와동료 루카9,23-26 신앙의 딜레마(딸)

jasunthoma 2015. 5. 29. 07:24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딜레마(진퇴양난)가 시간이라면

신학자들에게 가장 큰 딜레마는 예수님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딜레마는 뭘까요???

신앙인들에게 자장큰 딜레마는 자기 자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신앙의 가장 큰 딜레마가 뭔지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렇듯 신앙의 딜레마는 "자기 생명의 경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생명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정작 자기 생명은 소홀히 대할 수 있을까?에 해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봉헌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다 믿고 바라고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모든 것을 다 믿는 것도 나고, 봉헌하는 것도 나고, 뉘우치는 것도 난데 그런 나를 버리면 어떻게 되겠냐는 데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의 가장 큰 딜레마는 포기하지 않는 삶까지도 포기하라 할 때 발생된다고 생각합니다. 

 

[닐기유메트의예화-땅끝까지]

사막의 어느 수도원에  한 젊은이가 입회를 했습니다.

그는 대수도원장인 파코미오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명상가가 되고 싶습니다 저를 지도해 주십시오"

연로한 수도자는 그 젊은이가 대견한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래 어떤 유형의 명상가가 되고 싶은가, 젊은이?? 외적인 명상가인가, 내적인 명상가인가?"

젊은이로서는 기습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명상가에 두 종류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던 것입니다.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신부님, 질문을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파코미오는 젊은이의 반응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물론이지, 외적 명상가란 이런 사람일세. 생활규칙을 준수하고, 영적인 책들을 읽고, 금식하고, 기도문을 암송하는 사람이지. 반면에 내적 명상가란 하느님을 바라보는 사람이지. 그렇다면 자네는 어떤 명상가가 되고 싶은가?"

젊은이는 즉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내적 명상가입니다. 신부님"

"오, 아주 좋은 결심일세. 내적 명사가만이 진정한 명상가이니까!!"
기쁨으로 싱글거리는 원장의 눈빛은 마치 개구쟁이 같은 눈빛이었습니다.

젊은이가 다시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명상가가 될 수 있습니까?"

"방금도 말했지만 하느님을 바라봐야되네"

"그렇다면 그것은 어렵습니까?"

"처음엔 쉬울 수도 있지만 좀 지나면 여렵지"

"얼마나 걸립니까?"

"글쎄 나름이지. 그것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끈기에 달렸기도 하지만, 대개는 하느님의 은총에 달렸네. 왜냐하면 명상 중에 하느님께 이른다는 것은 순전히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지. 그러니 당연히 그러한 선물을 내릴 수 있는 이는 하느님게 달렸네"

"그럼 제가 명상을 시작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런데 신부님!! 제가 명상가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보실 수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되다마다. 내가 삼년마다 자네에게 질문을 해서 그 대답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네"

"어떤 질문인데요??"

"아주 간단한 거라네. 바로 이것을 질문할 거라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렇게 하여 젊은이의 수련은 시작되었습니다.

대수도원장 파코미오가 말한대로 절은 수련자는 그의 온 정신과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입했습니다.

 

3년이 되었을 때에 피코미오가 물었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젊은 수련자는 할 말이 많았습니다.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시는 무한 존재이시며, 천상과 지상의 그 모든 사람들의 근원이시며 어머니이시고. . ."

젊은 수련자는 그가 하느님에 관하여 발련한 모든 것들을 원장 앞에 다 쏟아 내었습니다.

"훌륭하네. 출발이 좋아보이는군. 하지만 아직 명상가는 아닐세. 그렇지만 희망의 싹은 보이네. 온 정성을 다하여 계속 기도하게나"

젊은 수련자는 계속해서 명상에 잠겼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명상에 잠겼을 때에는 첫단계 때보다 더 어렵게 느껴져서 상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에 관하여 발견한 것은 데 빈약한데다가 참신한 생각과 신선한 마음도 식어가는 것 같았고 게다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발생되는 내적 죄업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파코미오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변함없이 하느님을 보려는 노력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3년이 되었을 때에 파코미오가 물었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젊은 수련자는 원장의 물었을때에 전보다 말수가 줄어들긴 하였지만 여전히 말할것이 많았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에 빠진 나를 구원해주시는 자비로우신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은 방탕한 아들의 아버지이시고, 죄 많은 저를 받아 주시는 동정심이 많은 분이시고. . ."

젊은 수련자는 그동안 발견했던 하느님의 모습을 진지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피코미오는 용기를 북돋아 주며 친근하게 말했습니다.

"아주 잘 하고 있네. 자네 생각과는 달리 자네는 명상의 길에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있네. 그대로 계속 나아가면 목표에 도달하겠네"

그리하여 젊은 수련자는 다시 3년간의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세번째 3년은 고문과도 같았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정신집중은 불가능했으며, 그동안에는 어렴풋이라도 보인 듯 했던 하느님이라곤 흔적도 없어 보였으며, 심지어 자신 마저도 사라지고 없는 듯 했습니다.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으며, 아무런 생각도 주지 않으셨으며, 아무런 마음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젊은 수련자는 곤혹스러워졌습니다.

'하느님은 왜 나를 거부하고 계신걸까? 왜 침묵만 지키고 계신걸까?"

 

그리고 또 다시 3년이 되어 파코미오가 물었을 때에 그는 드릴 말씀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냐고요? 그분은 어둠의 계곡에서 나를 이끌어주시는 목자이시고. . ."

그리고 그는 깊은 침묵에 잠겼다.

 

그 뒤 또 다시 3년이 되어 수도원장 파코미오가 그 질문을 했을 때에 그 젊은 수련자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이 누구시냐고요??? 존경하는 대원장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분이 누구신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분은 그분 자체이십니다.저를 캄캄한 어둠속으로 던져 넣으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그분에 대해서 확실하게 아는 것이라곤 '나는 그분에게 속하고 그분 또한 내게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머지는 제게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명상가가 되든 못되든 상관없습니다"

수도원장인 파코미오는 그 말을 듣자 곧 그 젊은이가 마침내 바라던 목표에 도달했음을 알았습니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입니다.

우리나라 124위 순교 복자들을 처음으로 기리는 날입니다.

작년 광화문에서 있었던 시복식을 떠올리며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들이 가장 어렵게 지켜냈던 신앙고백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순교 복자들이 지켜냈던 신앙고백은 단연 제1계명인 "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여렵지 않은 고백일지 몰라도 그당시 순교자들에게는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온 집안의 가족들과과 맞바꿔야만 했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 날을 기념하는 오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살아가야 할까?하고 고민해 봅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대로 또한 이 곤혹스러운 신앙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방법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각자가 체험한 하느님과 함께 수련해 온대로 신앙고백을 하면서 신앙의 딜레마를 잘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그리스도 내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 발생되는 고통을 잘 이겨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