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부활제5주간 화요일 요한14,27-31ㄱ 내적 평화(대전협력/ 240430 행운동성당)

jasunthoma 2015. 5. 11. 19:5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하고 세차례에 걸쳐 평화를 강조하십니다.

이 평화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하는 3중의 평화입니다.

이 3중 평화를 깨닫는 사람은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먼저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직접적인 평화입니다.

즉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결국 나 자신 속으로 하느님이 들어오시는 평화이기 때문에 나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평화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주는 평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간접적인 평화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외부에 의한 평화, 타인으로 인한 평화이기때문에 나와는 상관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쉽게 말하면 국가는 평화로운데 나는 위태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국가는 부자인데 국민은 가난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당에만 오면 은총이 쏟아지는데 집에만 가면 머리에 쥐가 나는 상태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평화는 튼튼한 국가 안에서 커다란 사회조직 안에서 그리고 안정된 가정 안에서 누리는 외적 평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평화는 인간이 인간에게 복종하기 때문에 누리는 권력에 종속된 평화라고 볼수 있습니다.

이러한 평화는 자기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도 국가를 위해서 그리고 사회를 위해서 또는 자녀를 위해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일궈낸 평화입니다.

 

어떤이들은 병고는 참을 수 있지만 의사에게 진찰받을 진료비가 없는 것은 견딜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런 경우도 같은 맥락입니다.

또 어떤이들은 내가 병드는 것은 좋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싫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자신으로부터 평화가 옵니까?

아니면 타인으로부터 평화가 옵니까?

또는 내부 지향적으로부터 평화가 오는 편입니까?

아니면 외부 지향적으로부터 평화가 오는 편입니까?

 

40일피정 받을 때에 22일차에 접어들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도록 하는 의지 봉헌의 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만약 제가 말기암 환자로서 곧 호스피스 병동에서 수발을 받아야 할 처지라고 가정했습니다.

그랬더니 병으로 얼룩진 나 자신의 비참한 모습과 병고를 짊어진 참기힘든 나 자신을 수발해주는 형제들의 모습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를 온전히 봉헌 해야 했습니다. 외부 지향적으로 나의 의지를 모두 봉헌하는 것이 이 봉헌하는 기도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며 자신의 모든 의지를 십자가 뒤에 못박으셨던 예수님처럼

외부로 부터 주어지는 평화를 위해서 그 어떤 일에도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지 않으신 예수님처럼

나 자신도 외부로부터 오는 자신의 모든 의지를 봉헌하도록 끊임없이 기도를 드려야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드렸던 기도인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기도가

과연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였을까요? 아니죠 자신을 위해 기도를 드리셨다면 "주님 저를 구원해 주소서"였겠죠.

아니면 당신의 어머니와 제자들 또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을까요? 아니죠 이웃을 위한 기도였다면 "주님 저들을 버리지 마소서"였겠죠.

따라서 예수님께서 드렸던 기도는 하느님을 내 안에 초대하는 기도가 됩니다. 

분명한 것은 그때에 엄청난 고통은, 당신 자신이 당하는 어떤 시련과 고통은 견딜 수 있지만

당신의 제자들과 어머니 그리고 당신을 바라고 있던 모든 선량한 사람들이 장차 당하게 될 시련과 고통 앞에서 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죽으면 죽었지 내 형제 자매 자녀들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다는 것이 곧 예수님이 받았던 유혹이자 오늘날 우리가 받고있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국 자신도 아니고 이웃도 아닌 하느님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것이 바로 세상이 주는 평화, 외부로 부터 오는 평화가 아닐까 합니다.

이것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내적인 평화, 내적 의지로부터 오는 평화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넘겨주시고 당신의 사랑하는 모든 사람마저 하느님께 넘겨주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전해주시고자 했던 평화가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즉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 안에서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내적 평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3중의 평화를 깨달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내적 평화를 누린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먼저 이사악을 봉헌한 아브라함을 들수 있습니다.

희생될 뻔했던 이사악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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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외부로 부터 주어지는 평화를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참평화 안에서 기뻐했던 아브라함과 이사악을 생각하며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은 그들 안에 영원히 살아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인 우리의 신앙선조들을 들수 있습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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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순교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하느님, 치명자들의 하느님!! 우리 신앙 선조들 안에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

왜냐하면 그들도 세상이 주는 평화에 머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오월은 성모성월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모님과 함께 오월의 은총을 가득 받으시시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