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콘을 했으면 결혼을 해야지~~!!
식사시간에 여러가지 채소가 나왔는데 그 중에는 야콘이 있었습니다.
야콘을 처음 본 수사님이 이건 뭐야?하며 물었습니다.
옆에 있던 수사님들이 그것도 모르냐며 야콘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또 다른 수사님이 약혼하면 꼭 결혼해야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를 요셉의 시각으로 전해줍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준비를 세례자 요한이 하였다고 소개합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에 앞서 요셉이야말로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자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하여 다각도로 준비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요셉이 마리아만을 맞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 예수님을 함께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양부이신 요셉이야말로 구약의 대를 끊고 신약을 가장 정성껏 준비한 인물임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잉태된 아기가 자기 자식이 아닌지 알면서도 그럴 수 있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예를 들어 요셉은 아버지는 나를 낳아서 내가 세상에 태어났지만 아들인 자신은 자기 자식을 낳지 못하겠구나 하고 생각할 법도 했습니다.
요셉은 단지 맞아 들였을 뿐이지만 인간적으로는 대가 끊긴 셈입니다.
이는 곧 인간의 족보는 요셉에게서 끝이 났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담이 아브라함을 낳고 아브라함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요셉을 낳듯이
인간이 인간을 낳아서 인류의 족보는 이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져오던 이스라엘 축복의 대를 잇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아담이 지은 죄의 사슬에서 인류가 풀려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닐까???합니다.
즉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심으로써
인간의 도움없이 인간에게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잉태된다는 것을 요셉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마리아와 그 태중의 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마리아와 그 아기를 아내로서, 자식/아들로서가 아니라 주인/주님으로서, 그리고 자신은 종으로서 섬기기로 결심했습니다.
요셉은 먼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서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태중의 아기가 총명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모든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
하지만 요즘들어 생각해보면 아낌없이 받을 줄 아는 사람만이 아낌없이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듯 부전자선이라고 예수님 또한 요셉처럼 아낌없이 주는 것이 가능하셨던 것은 당신이 아낌없이 받아들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을 아낌없이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무엇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낌없이 받아들이신 것은 당신이 머무실 거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먼저는 성모님의 태중에 거처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받이들이셨고 곧 성탄을 맞이하게되면서 구유를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나자렛이라는 마을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어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는 별볼일없는 제자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믿음도 부족하고 용기도 모자란 그들을 당신의 수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들에게 배반당하시고 끝내는 십자가까지 지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다 누릴 수있는 자유가 있고, 누리지 않기로 한 것을 결정하는 자유야말로 아낌없이 받아들이는 삶의 원천입니다.
그 원천에서부터 우리는 아낌없이 내어줄 수있는 평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올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내 안에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평화를 아낌없이 누릴 수 있도록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기쁜 마음으로 다가오는 성탄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야고보 수사님께서 돌아가신지 한달 보름이 되었다.
이 곳에 있다보니까 거의 매일 자의든 타의든 수사님의 묘비를 둘러보게 된다.
수사님이 생각이 나서 올라가 볼 때가 많지만
그저 산책삼아 거닐다가 어느새 발길이 닿은적도 있다.
이 세상에 오시어 열정을 다해 일하셨는데,
주님께서 보고싶어하시고 당신은 이에 응답하셔서
이 세상에서 못다한 일을 아쉬워하지않으시고
반갑게 주님께 다가갈 수 있었으니 은총을 받으셨으리라.
누구든지 인간이라면 한번쯤은
내가 왜 이세상에 왔는지 생각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묻거나 책을 통해서 알아보려 하지만
그것을 알기에는 쉽지 않다는 것을 곳 느낄 것이다.
그 물음만으로 살아가는 수행자들도 곧 자신의 생명이 다해가면
그제서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저 죽음을 달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혹시 믿을 만한 제자나 슬하에 자식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련만
인간적으로 그것 조차도 없다면 허무한 뜬 구름속으로 빠져들 듯
사라져버리는 자신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 임마누엘이란
성서 속에서만 알아 볼 수 있는 말이 아닌듯 하다.
인간적으로 불행이란 불행은 다 겪고 간 요셉 성인이
임종 할 때 온 마음을 다해 고백하며 부르짖었던 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건 아무것도 없었고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며 죽기까지 힘을 다했으니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큰 일을 하신 것이다.
야고보 수사님께서 임종하실 때 보여주신 그 모습이 바로
우리가 알던 모습이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이제 다시 일으키시리라는 것을 고백하시며
평화롭게 눈을 감으셨으리라 생각한다.
엄마가 아이에게 성당에 가라고 오백원짜리 동전 두개를 주며
하나는 봉헌하고 다른 하나는 과자를 사먹으라고 했다.
아이는 평소에는 봉헌금만 주시던 엄마가 오백원을 더 주시니
신이나서 성당가는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룰루랄라 꽁들꽁들거리며 가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손에 쥐고 있떤 동전이 떼구르르 굴러서 한개가 하수구 구멍으로 빠지고 말았다.
아이는 남은 동전 하나를 얼른 줍더니 '어머, 봉헌금이 하수구에 빠졌네...'
왕으로 오실 아기 예수를 찾으려고 해도 그 징표를 볼 수 없었던 헤로데는
동방박사들에게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달라고 한다.
무엇을 봉헌하고 예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는 꿍꿍이를 품고서...
아기예수님이 계신곳을 인도하던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이 아닌가보다.
진심으로 경배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드릴수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난 징표가 아닐까?
평소에 어떻게 봉헌의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보고
내가 진정으로 주님께 봉헌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낀다.
'말씀한머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해 성탄팔일축제내제7일 송년미사 마태5,1-12ㄱ 행복한 결심(스승) (0) | 2014.12.31 |
---|---|
나해 대림제4주간 수요일 아침미사 루카1,67-79 아기(스승/ 241224 성바) (0) | 2014.12.24 |
나해 대림제3주간 화요일 마태21,28-32 생명의 나눔(딸) (0) | 2014.12.16 |
나해 대림제3주일 요한1,6-8.19-28 (0) | 2014.12.13 |
나해 대림제2주간 화요일 마태18,12-14 기쁜 양(성바) (0) | 2014.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