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대림제3주일 요한1,6-8.19-28

jasunthoma 2014. 12. 13. 09:54

오늘은 대림제3주일이자 "자선주일"입니다.

지지난 주(대림1주일)의 메시지는 "깨어있으라(마음)" // 대림제2주일의 메시지는 "준비하여라(길)"// 

대림3주일 메시지는 "베풀어라(세례)" // 대림4주일의 메시지는 "기뻐하여라(생명)" 로 볼 수 있습니다.

주일복음의 전례주기는 3년 주기 가해, 나해, 다해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해당하는 요한복음은 항상 둘째해인 나해 대림제3주일 복음으로 정해져있습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세례를 베푸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첫째해인 가해는 마태오복음(마태11,2-11)인데 여기서는 오늘 복음과는 반대로 예수님이 오히려 세례자 요한을 증언하는 장면으로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그는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하면서 세례자 요한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예수님임을 증언하였고

마지막 셋째해인 다해 루카복음(루카3,10-18)은 오늘 복음인 나해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세례를 베푸는 장면이 대림제3주일 복음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세 복음서가 겹쳐지면서 공통적으로 전해고자하는 복음 내용은 세례를 베푸는 장면입니다.

즉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입니다.

특히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리고 길을 닦기 위한 방법으로 세례를 베푸는 장면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요한은 첫번째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곧이어 오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장면 또한 연결해서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왜 주님을 맞이할 길을 닦는데 세례를 베풀었던 것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주님을 맞이할 거대한 성전을 짓거나 혹은 잔치 음식을 장만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사실은 지난 대림1주일의 메시지인 "깨어있으라"는 말씀으로 우리는 이미 주님을 모실 집을 마련한 바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둘째 주간에는 주님을 깨어기다리면서 거칠고 밋밋한 음식이지만 정성을 다하여 절재하며 천상의 음식을 준비해 왔습니다.

이렇게 두 주간에 걸쳐 주님의 길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세째 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준비해 온 것을 나누고 베풀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사람들을 시켜서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당신은 누구요?'라며 묻습니다.

그러자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서 세차례에 걸쳐 "아니오"라고 증언합니다.

 

이에 세례자 요한은 증언을 합니다.

이 증언은 '증인'을 뜻하는 그리스어(martus)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순교자란 순교를 (마르투스) 의미하는 증언입니다.

 

그 첫번째 증언은  세차례에 걸쳐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증거됩니다.

먼저는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두번째는 엘리야도 아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끝으로 그 예언자냐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예언자는 누구를 말하고 있을까요?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는 무수히 많이 있어왔습니다.

유다인들이 함부로 입에 담지 않는 이름이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야훼'와 '모세'가 아닐까 합니다.

유다인들은 모세를 그들의 유일신교인 유다교의 창시자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모세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새겨서 전한 예언자들 중에 예언자로 보았습니다.

신명기 18장 15절(혹은 18절)에 참예언자에 관하여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15절)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18절)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결국 요한은 자신에 관하여 의혹이 드는 여러가지 질문을 명확하게 증거하며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도 없노라고 증언합니다.

 

모세 -> 이스라엘을 홍해를 건너가게 하면서 세례를 베풀었음

여호수아 -> 느보산에서 내려와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차지하였음

 

세례자요한 -> 백성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품

예수님 -> 성령으로 세례를 베품

 

"당신은 누구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 곳에 머물러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 가족을 위해서, 부모 형제를 위해서도 일해야 하지만

내 입을 것과 내 먹을 것을 벌기 위해서도 일을 해야하지만

그보다 더 심오한 곳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머물러 있지 않다면 우리의 수고로움은 한낱 바람에 쓸려가는 검불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는

신앙인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물음이 됩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시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을 좋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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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아기예수님을 기다리며 예수님을 맞이할 합당한 준비를 잘 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봉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적대자(거짓선교사)들로부터 얻어진 상(象)을 다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는 적대자들은 유대교의 보편주의적 경향에 그리스도교를 편입시키려한다. 둘째는 적대자들은 그리스도를 신인(神人: 특히 모세)으로 선포하는데 그리스도가 지상인으로 양도받은 능력을 영의 힘으로 접근 가능하다고 본다. 이는 지상의 예수님과 하늘의 그리스도 사이에의 경계를 제거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십자가를 불필요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셋째는 신인(神人)의 운명에 접근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넷째는 그리스도의 생명의식에 중점을 두면서 고난과 고통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격하시킨다고 본다. 다섯째는 전승과 성경의 해석의 도움으로 참 인식에 도달하여 완전한 자가 된다고 본다. J. 그닐카, 『필립비서-국제성서주석』, 337-338 참조.

 

 2004/12/31 [ 말씀이 ] 요한1,1-18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면서 복음에 귀를 귀울이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바쁜 중에서도 복음을 생각하고 그 의미를 되새긴다면 더할 수 없는 은총이지만

신앙인의 대부분이

하루의 쳇바퀴를 돌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생활 하면서 복음에 잠긴다는 것이 어려운건 사실이지만

더 나아가 그것을 느끼고 감동하여 실행에 옮겨본다는 것은

늘 하루의 과제로 남겨질 수 있는 상황 속에 가장 큰 은총일 것이다.

감히 복음을 논하는 단계는 아닐 지라도

내 속에 그 말씀이 머물 수 있다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요한 복음은 그 심오한 깊이 만큼이나 다기오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 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