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짓는 것보다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더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톨릭교리서 404항을 보면 인간의 죄는 두가지로 나눠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죄와 인격죄입니다.
원죄는 범한 죄가 아니라 짊어진 죄이며 행위가 아니라 상태~~~~~라는 것이 교리서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원죄는 또다시 원조죄와 유전죄로 나누어 집니다.
원조죄는 타인과 관련되지 않은 상태죄로서 원조(아담하와)가 지은죄입니다.
그리고 유전죄는 원조죄의 결과로서 인간 번식을 통하여, 곧 인간 본성의 전달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앞으로도 계속해서 전해지는 죄입니다.
여기까지는 세례를 통하여 사해지는 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죄를 짓는 것과 죄를 짓게하는 것은 모두
원죄가 아니라 인격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짊어진 죄가 아니라 우리가 범한 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격죄 또한 두가지로 나누어 짐을 알 수 있습니다.
타인과 관련되지 않은 (자기)죄와
타인과 관련된 (보상)죄 즉 (결과)죄, 결과가 있는 죄 입니다.
여기서 타인과 관련되지 않은 (자기)죄는 소죄로서 고해성사를 통해서 사해집니다.
하지만 타인과 관련된 (보상)죄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가 사해졌더라도 죄의 결과로서 잠시벌(잠벌)이 남게 됩니다.
교회법(992조)에서는 이러한 죄의 결과에 대하여 이미 용서받은 죄에 따른 잠시적 벌(잠벌)을 대사/전대사를 통해서 모두 사면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스스로에게 짓는 것보다 죄를 짓게 하여 유전시키는 것이 더 불행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것은 타인과 관련된 인격죄로서 결과가 남는 죄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두가지 죄 사함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 짓는 상태와 죄 짓는 행위를 구분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그 형제의 죄 짓은 상태의 신뢰성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그 상태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 짓는 행위는 분명히 꾸짓고 타일러서 그 형제가 회개하기 전에는 용서를 해 줄 수 없습니다.
그 행실이 선한 행위로/ 형제를 살리는 행실로/ 형제를 배려하는 행실로 변화되기까지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용서함에 있어서 항상 선행되어야 할 것은 죄 지은 상태의 용서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그 악한 행위에 대해서는 말로만 '회개합니다'하였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재로 삶으로 그렇게 회개하고 돌아올 때 용서가 되는 원리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토서를 통하여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흠잡을 데가 없는 원로를 임명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거만하지 않고/ 쉽게 화를 내지 않고/ 난폭하지 않고/ 쉽게 쉽게 술을 마시지 않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을 받은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관대하고 너그러우며 흠잡을 데 없는 모습으로 사도직과 영성생활에 매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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