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연중제27주간 화요일 묵주기도의동정마리아 루카10,38-42 두가지 사랑(대전협력)

jasunthoma 2014. 10. 7. 04:5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십니다.

마르타 하면 뭐가 떠오르고 마리아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타를 통해서 천국을 향한 두가지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복음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즉흥적이라든지 또는 의도적인 흐름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사건의 기승전결이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단락단락이 아주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흐름안에서 본다면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는 장면 바로 전에 배치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서로 다른 지향이 주님의 기도 안에서 완성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에 이미 마리아와 마르타의 서로 다른 지향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앞서 이미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일흔 두 제자의 파견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본문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해 있었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달라도 서로가 너무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맞아들인 사람은 마르타였는데 정작 마르타는 예수님 곁으로 갈 수 없었고

마리아는 평소때와는 달리 오늘 만큼은 기필코 예수님 곁에서 꼼짝하지 않고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가족이지만 오늘 따라 왠일인지 서로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마리아와 마르타를 통해서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마리아 스타일이다~~!! 혹은 나는 마르타 스타일이다~~!! 각자의 모습이 서로 다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씨가집에 가서는 마르타가 되는데 친정에 오면 마리아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처가집에 가면 마당쇠가 되는데 본가에 오면 대감님이 되는 것은 아닐런지.

 

그런데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모습을 통해서 두가지 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통해서 제시된 두가지 길입니다.

먼저 마리아는 하느님 사랑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르타는 이웃사랑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뭡니까?

오늘 복음 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연결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과 연결된 앞쪽을 따라 훑어보면 일흔 두 제자들이 파견되었다가 돌아와서 기뻐하자

예수님께서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성령안에서 즐거워하며 함께 기쁨을 나누셨습니다.

그 때에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유도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율법에는 뭐라고 씌여있느야?'하고 되물으시자

율법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고 되어있다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하고 알려주십니다.

즉 우리의 간절한 소망인 하늘나라로 가는 길, 영생을 얻는 길은 다름 아닌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율법교사가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웃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는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예수님의 비유이야기는 뭐가 있을까요???

 

복음을 통틀어 하느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는 꼽는다면 포도밭 소작인이야기(루카20,9-19; 마태21,33-46; 마르12,1-12)가 될 것입니다.

이번 주일(연중제27주일) 복음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해서 포도밭 소작인 비유가 하느님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되는지를 잠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는

포도밭 주인(소작인)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여기서 만약 제가 포도밭 주인이라면 어떻게 처신했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셨을 것 같으세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포도밭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세차례에 걸쳐 보냈지만

그들은 종들을 하나는 붙잡아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만약 포도밭 주인이라면 마지막 남은 아들, 사랑하는 아들을 그 소작인들에게 보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윤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종교적으로는 가능한 일입니다.

 

며칠 전에 당고개성지(신계동)를 다녀왔습니다.

제 출신본당 선배신부님과 그 어머니께서 서울에 잠시 올라오셨다고해서 잠깐 찾아뵌 김에 가까운 성지를 찾아 순례를 했습니다.

이번에 복자품에 오르신 이성례 마리아의 생애를 다룬 성화들이 따로 전시되어있었습니다.

~~~

 

예수님께서 포도밭 소작인(주인)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아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 조차 아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마리오 수사님의 그 거친 사도직이 생각납니다.)

즉 이 말은 '나는 나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 고로 나는 타인도 아끼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맞는 말 같으면서도 뭔가 좀 미심적은, 뒤끝이 있는, 속시원하지 않는 면이 있는 말인것 같습니다.

윤리적으로는 분명 지탄을 면치 못할 처신이 될 것입니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가지고 자기 십자가를 부모님께 맞겨놓고 평생을 잘먹고 잘 사는데,

누구는 부모를 더 잘 만났는지는 몰라도 부모님 십자가까지 짊어지고 가기 싫은 골고타로 파견되어야 하기때문입니다.

빵도 지팡이도 없이 파견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일상안에서는 어떻게 부모가 자기 자식을 죽음으로 내 몰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안에서는 이 일들이 가능합니다.

종교적으로는 자신을 아끼지 않으면 자녀도 아끼지 않음이 가능합니다.

사실은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와 타인을 아끼지 않는다 사이에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자신을 아끼지 않으신다. 그래서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 조차 아끼지 않으셨다.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은 아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아드님을 아끼지 않으셨다.

즉 아니다 사실은 당신의 자녀를 아끼신다 가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를 아끼심에도 불구하고 아끼지 않으셨다 입니다.

그렇다면 왜그랬을까요??

이웃의 벽을 허물기위해서였습니다.

이방인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울타리를 부수시고 길가는 사람마다 따먹도록 내어 놓으시는 초 윤리적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우리를 갈라놓은 벽을 허물지 못하고 우리를 둘러친 울타리를 결코 겉어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가 평소와는 달리 마르타를 돕지 않고 내버려둔 것에 관하여 '하느님 사랑의 길'이라며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에 동의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마르타와의 관계, 즉 가족관계까지 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사랑의 극치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 자신의 모든 것에 해당하는 순 나르드 향유 옥합마저 깨뜨릴 수 있는 것도 하느님 사랑의 극치라는 것입니다.

또한 전쟁과도 같은 일상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잊고 예수님 발치에서 조용히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일 또한 하느님 사랑의 극치입니다.

이른 마리아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에더해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서도 암시되는 '하느님 사랑의 길'이 부정적인 면에서 부각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웃사랑의 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관하여 대답하는 율법교사를 칭찬하십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느님 사랑 보다 이웃사랑에 초점이 맞춰져있습니다.

먼저 강도를 만난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봉변을 당했습니다.

마침 사제와 레위인도 같은길로 내려가다가 봉변을 당해 초주검이 된 동료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사제와 레위인은 반대길로 달아나버립니다.

그러나 여행을 하던 사마리아인은 위험에 처한 그 사람을 간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잠자리까지 마련하여 보호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살펴보았던 두가지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이 걸었던 길과 사마리아인의 길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이 걸었던 길은 사마리아인에 비하면 불의함과 비겁함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을 따르되 이웃사랑의 실천이 없는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에 사제와 레위인에 관하여 느끼는 대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려서 그렇지

사실은 사제와 레위인이 걸었던 길은 하느님을 위한 사랑의 길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마르타가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여 마리아의 도움을 호소하지만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장면과도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인들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정신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께 시중들고 제사를 드리며 하느님 사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사람들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 사랑에 심취해 있던 사람들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 사랑 외에 다른 일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으십니다.

다만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지 못했던 점에 관해서 '그렇다면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며

하느님 사랑도 중요하지만 강도만난 이의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 점을 부각시켜 주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은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는 율법교사의 부족한 점이 무엇이었는지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길은 여행을 하던 어떤 착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아니라 이웃사랑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여행을 하는 사람은 사무적인 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순례길에 오른 사람과 같습니다.

순례자는 업무와 격식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이웃 안에서 찾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 보다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길로 초대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합니다.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과 흡사한 사랑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마르타는 이웃사랑을 실천한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맞아 들였는데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마르타 곁에는 배고픈 제자들만 몰려와 아우성을 칠 때에

인간적인 자비심이 극에 달할 지라도 끝까지 이웃사랑 실천을 저버리지 않는

마르타의 모습이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마리아 인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어떤 사마리아 인이 그런 자비를 베풀어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순례자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사랑이지만 순례자는 그 순례 여정 중에는 이웃을 사랑에 더 목말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타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두 가지의 길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인간적인 면에서 윤리적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수모를 겪으면서 종교적으로는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게되고

또한 종교적인 면에서는 하느님과의 약속을 저버리며서까지 윤리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마지막 권에 '그 누가 짠 것들을 한 울타리에다 모았나이까'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바다란 물들이 한 군데로 모인 것을 말합니다.

물들이 흐르고 흘러서 한데 모이면 그곳은 바다가 됩니다.

그런데 모이기 전에는 순수하나 모이고 나면 모두들 짜다고 말합니다.

여러가지 맛이 드러나지 못한 채 다만 짜다고 표현합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좋았던 기억은 잊어버리고 고통스러웠던 때를 되새김질하기 때문에 인생은 짜다라고 밖에 말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다 지으시기까지 일곱번을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감탄하셨을 만큼 세상은 다 좋은 것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낱낱이 보시고 참 좋으셨던 것 같이 모두를 한데 모아 전체를 놓고 보아도 참 좋았으니 하느님 안에서 고통이란 순수한 제각각의 맛에 불과할 뿐 모두가 바닷물을 그저 짜다라고만 말하듯이 이 모두가 좋은 것 선한 것 자체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표현됨이 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번달을 묵주기도 성월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혹시 기도중에서 가장 완전한 기도는 무슨 기도인지 모르시는 분이 있을까요?

"주님의 기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는 말 그대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무슨 기도일까요???

"성모송" 그렇습니다. 성모송입니다.

성모송은 에페소 공의회(테오토코스 : 천주의 어머니) 와 관련됩니다.

성모송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꽃으로 엮어 천주의 성모님께 영광을 드리려는 순수한 우리의 신심에서 우러나온 기도입니다.

누가 가르쳐 준 기도가 아니라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하느님 사랑을 담은 기도가 성모송입니다.

그렇다면 묵주의 기도는 무슨 기도가 됩니까?

최고의 기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종합하는 최상의 기도가 바로 묵주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소출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인간적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사랑안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