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연중제25주간 금요일 루카9,18-22 그리스도 호칭(--)

jasunthoma 2014. 9. 26. 06: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갑자기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세례자요한/ 엘리야/ 옛예언자 한 분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이를 듣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

당신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일깨워주십니다.

 

그런데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기에 앞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바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수행하는 동안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보다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이 먼저 알려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사실보다 십자가와 부활이 먼저 알려지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세상에 먼저 알려지면 안되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메시아 비밀에 해당하는 그리스도 고백에 관해서 잠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분부하셨는데

이에 관해서 대부분 신학자들의 관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랍비이며 예언자였던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였다는 주장은 분명히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거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부활을 인정하는 바리사이들을 비롯하여 

동포 유다인들의 대다수에게 어떤 커다란 신학적 이슈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의 그리스도, 즉 메시아성이 세상에 드러나 수난보다 먼저 알려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역할의 핵심이자  정점입니다.

문제는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것과 예수님은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영상이 겹쳐질 때  때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메시아는 곧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 라는 전혀 새로운 등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자이지 저주를 받은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보시기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예수님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세상에 먼저 알려지게 되어서 유다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킨다면

메시아적 역할의 핵심이자 정점인 그리스도가 즉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사건이 실현되는데 걸림돌로 작용할 소지가 다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하느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이라는 신명기21,23의 통론이 공식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신봉하던 오경인 율법을 거스르는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는 결과를 초래하는 꼴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당신이 이루실 구원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은 마태오/마르코복음에 비해 베드로의 반박 다루지 않습니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예고를 듣고 있던 베드로가 "맙소사 주님! 그런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반박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  베드로를 아주 강하게 꾸짖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 제임스D.G., 박문재, 바울신학,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308-309 참조 -

 

예수님에게 있어서 당신의 케리그마는 강생에서 십자가 그리고 부활 순으로 선포(케리그마)되었지만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케리그마는 시대의 역순으로 선포됩니다.

먼저 부활체험에서 시작해서 십자가 그리고 강생신앙에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까지는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를 수 있도록 이끄실 때에 가능합니다.

부활의 영광에 앞서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이 산재한 우리의 봉헌생활을 충실히 살아갈 때에 우리 자신의 부활도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전생이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과거의 자기 조상들의 삶이 현재와 미래의 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선포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이 제 아무리 내 아버지라도 그로부터 어떤 혜택도 없는 철저히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하는 외롭고 고독한 삶입니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 어떤 시련이 다가 오더라도 그 일은 어제의 일이 반복되는 것이 아닌 오늘의 새로운 일로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아버지의 권한을 물려받아서 내가 특혜를 보는 삶이 아니라 오늘 이라는 일생 일대의 단 한 번뿐인 새로운 시간을 철저히 자기 자신의 삶으로 선포해야하는 삶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우리의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우리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힘과 활력을 주시기를 청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