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연중제14주간 금요일 성베네딕토아빠스기념일 마태10,16,-23 복음의 실현(제주협력)

jasunthoma 2014. 7. 11. 04:17

베네딕토 아빠스 축일을 보내면서 순교의 두가지 유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를 뽑는다면 신앙의 자유가 선포된 콘스탄티누스 칙령으로 (밀라노칙령 313년)입니다.

신앙의 자유로 인하여 박해와 순교가 없는 시대가 오자 베네딕토 성인은 또 다른 순교의 삶을 살기 위하여 수도원을 세워 공동생활을 시작합니다.

베네딕토 성인의 삶은 박해가 사라진 오늘날의 순교의 영성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때문에 끌려가 증언할 것이고,

너희는 내 이름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사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몇 가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너희는 나때문에'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때문에'입니다.

즉 사도들이 미움을 받고 증언하여 순교를 하게 되는 원인이 바로 예수님 때문이고 또 예수님 이름때문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왜 그토록 당신 자신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계실까요?

먼저는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한 번도 당신의 죽음을 제자들 탓으로 돌리지 않으셨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당신 자신 때문에 제자들이 그리 될 것이라고 걱정하고 염려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당하실 수난에 대해서는 어느누구의 잘못으로 그리 되는지 밝히지 않지만

당신 제자들이 받을 수난에 대해서는 자신의 탓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즘 자녀들이 부모마음에 못을 박는 가장 흔한 표현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무슨 말을 들었을 때에 가장 마음이 아프십니까?

우리는 자녀가 부모에게 '이건 엄마/아빠 때문이예요' 라고하거나

또한 부모가 자녀에게 '이건 너때문이야'하고 서로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자신 때문에 그리 될 것이라고 고백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는 '내탓이요, 내탓이요'하지만

우리는 '너 탓입니다, 너 탓이예요'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누구누구 때문에라고 말할 때에

그 대상이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이름이면 사랑과 생명이 약동하지만

그 대상이 내곁에있는 사람이면 미움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우가 형에게 "이건 모두 형 때문이야"라고 하거나

부모가 자식에게 "이 웬수야!" 라고 하거나

자식이 부모에게 "엄마 때문이야", 혹은 "아빠 때문이야"라고 한다면

분명한 것은 내가 살고 상대방이 죽는 것입니다.

생리적으로 숨을 거두게 하는 것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탓을 돌려 죄를 뒤집어 씌우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죽게되는 것입니다.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에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리의 교활하고 난폭함으로 인해 양이 잡아먹히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순교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김대건 신부님처럼 참수당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순교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주 거창하고 무시무시한 육신의 형벌로 인식하기 쉽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순교는 아주 쉽고 단순합니다.

수도생활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베네딕토 성인의 삶처럼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는 것,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는것,

그리하여 나에게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는 생명이 약동하게 하는 것'(2코린4,11-12)이

오늘날 우리가 감당해야할 순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렇게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방식으로 순교를 하게되면 우리는 어떻게 변화됩니까?

로마5,2 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믿음 덕분에" 평화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누구누구 때문에라며 죄인의 처지에 이었지만

나중에는 누구누구 덕분에라고 고백하여 의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은 쉽게 수긍이 가지만 예수님 이름때문이라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둘째로 도대체 예수님의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유다인들은 하느님(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 하느님을 속되게 하는 것을 극구 경계해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너무나도 부르고 싶지만 하느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단지 '하늘'이라고만 한다거나 아예 '침묵'으로 건너뛰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사랑한다는 말은 못하고

매번 '좋아해'라고 말하거나 아예 딴청을 피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것보다 더 가슴아픈 사연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인간으로서 그 누구도 감히 하느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인간사이에 당신의 이름을 남겨놓으심으로써

그동안 하느님의 이름조차 마음대로 부르지 못해 가슴앓이를 하며 전전긍긍하던 제자들의 숨통을 트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하느님으로 고백해 부름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흠숭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라고 말할 때 그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되고

또한 하느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를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 때문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고발자나 변명자가 되지 않고 오히려 선포자 증거자가 되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구원되어 버리는 이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미운 감정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일어나는 미운 감정들

부모가 자녀에게 일어나는 미운 감정들

부부간에 일어나는 미운 감정들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이제는 내탓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럴때에 나는 잠시 죽게 될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을 내 목숨에 신선한 생명의 바람을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순교하신 신앙선조들을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 덕분입니다. 아닙니다. 형제님 자매님 덕분이지요.

어머니 덕분입니다. 아버지 덕분이예요.

내 아들 덕분이군. 내 딸 덕분이야.

당신 덕분이야. 아니예요 당신 덕분이예요.

 

이것이야말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에 보내는 근심과 걱정 불안과 심적 부담스러움이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함으로 인하여 복음이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되는 이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이번 한주간 또한 이 여름 한달을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칭찬과 영광을 돌려 지금 이 자리에서 복음의 기쁨이 실현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양과 이리 그리고 뱀과 비둘기 두 부류의 동물을 예를 들어 비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부류는 먹이사슬에서 먹고 먹히는 관계입니다.

잡아먹히는 동물에게 잡아먹는 동물을 일컬어서 천적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정해줘서 본능적으로 대적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16절을 두 부류로 나눠서 면밀히 살펴보면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에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천적 관계이지만

즉 첫 구절에 나오는 양들과 이리떼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근심과 걱정입니다.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에 보내는 것 같아서 매우 불안하고 심란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둘째 구절에서는 그러한 근심과 걱정 불안과 심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는것이 파견된 자로서 박해를 받아들이는 제자들의 자세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파견된 자가 지녀야할 소양을 유비적으로 잘 보여주고있습니다.

뱀과 비둘기처럼 조용한 동물이 또있을까요?

양도 마찬가지로 짖거나 울지 않습니다.

왠만해서는 소리를 내지 않는 동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양과 이리, 뱀과 비둘기를 통해서 단점을 애기하기보다 장점을 애기하고 있습니다.

첫구절에서 비춰지는 뉘앙스는 양의 약하고 무능한 점, 그리고 이리의 난폭하고 교활한 점입니다.

이리떼 가운데에 들어가는 제자들의 파견 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