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부활제4주간 토요일 요한14,7-14 십자가와 부활 사이(딸/ 20240427 스승)

jasunthoma 2014. 5. 17. 04:52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어떻게 보셔요?

거기에서 주인공 꼬마(제제)는 아버지와 아저씨(뽀르뚜가) 사이에서 성장합니다.

자기 아버지는 능력이 없는데 그 아저씨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상처를 주는데 아저씨는 상처를 싸매주십니다.

아버지는 희망이 없는데 아저씨는 희망이 있습니다.

결국 제제는 아저씨에게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고백합니다.

그 어린 것이. . . 뭘 안다고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여운을 남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말씀은 곧 내가 아버지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아버지가 아니지만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분이시므로 그 역할을 보아서라도 아버지로 받아들여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제자들에게는 어린 제제와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은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능력자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지만 그들은 예수님은 인간이었고 인간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존심 상하는 존재고 창피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한 곳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최소한 삼년을 그렇게 했습니다.

함께 살아보셔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같이 살면 어떻습니다.

거룩함도 사라지고 경건함도 사라지고 그리움도 사라지고 십자가만 남습니다.

 

최소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해야 했습니다.

십자가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제자들 역시 제제처럼 예수님과 하느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군중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거의 다 모였다고 합니다.

그 모여든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차 바오로의 말을 반박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유다인들이 반박해도 군중은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군중이 바오로에게 전해 들은 복음은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그들을 기쁘게 하고 찬양하게 했을까요?

오늘 제1독서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바로 전에 이어졌던 어제 독서 내용 중에  안티오키아에서 선교할 때에의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제 독서에서 바오로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전개하며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 인용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이 말씀으로 바오로는 바오로대로 군중은 군중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하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이 "당신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또 아버지가 당신 안에 계신다"는 것을 살아생전에 전수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실 수 있을까요?

뭐 창립자의 DF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잠깐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칠삭둥이와 같은 자신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하늘에 하느님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내 곁에 계시고 내 안에계신 예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먼저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바오로는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고 우리는 우리곁에 있는 성인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이 에 해당하는 이들을 통해서 만났습니다.

헐벗은 이들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도 헐벗고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병든 이들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도 병들었습니다.

진짜 병들었습니다.

병들기 위해서 노력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육신의 병듦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진짜 병든것입니다. 

표징과 기적은 찬란하고 호화로운 모습 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추하고 남루한 차림, 헐벗고 가난한 모습에서 기적은 더 많이 일어납니다.

멀쩡한 사람이 형제를 위하여 병들면 그것이 표징이자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로인해 예수님의 부활이 목격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