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사순제4주간 화요일 요한5,1-16 평화의 기도(대전협)

jasunthoma 2014. 4. 1. 04:0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서른 여덟 해나 앓는 사람의 건강을 되찾아 주십니다.

이 병자의 나이가 얼마나 되며 또 언제부터 병을 앓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지 않지만 그는 38년간을 병석에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사람이 아픈 상태로 38년을 살아있는 것 자체로 사실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또 어떤 이에게 38년의 세월은 평생에 해당하는 햇수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오래 움직이지 못하고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병자가 그만큼 오래 움직이지 못하고 기다린 이유가 뭘까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38년을 기다린 샘입니다.

너무 간단한 결론이 아니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 병자 말고도 평생동안 예수님을 기다린 인물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되는 인물은 시메온과 한나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시메온은 그렇게 성전에서 평생을 기다리다가 아기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팔에 받아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이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루카2,29-32 공동번역)

 

그리고 시메온과 한나 이외에도 우리가 잘 알고있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할 선구자가 자기 아들이 되라라고 생각치도 못했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평생을 기도드린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여달라는 기도였지 엘리사벳이 임신하여 그 구원자의 길을 닦을 요한을 보내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이루어졌고 한나와 즈카르야처럼 그들도 주님의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또 구약성경에서 모세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병자의 이야기를 더욱 잘 설명해주는 장면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사십년을 광야생활을 해야했습니다.

그는 요르단 건너편 모압땅 느보산에서 시온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가지 못하고 임종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죽기까지 온 이스라엘을 이끌며 두차례에 걸쳐 물을 건너왔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땅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모두 세차례에 걸쳐 물을 건너게 되는데 모세는 마지막 물인 요르단강은 건너지 못하고 그 건너편에서 그의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죽기 2년전 그는 온 이스라엘을 이끌고 홍해에 이어 또 한차례의 물을 건넜습니다.

그 일은 그가 카데스 바르네야 광야에 진을 친 후 38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신명기2,14-16 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이제 일어나 제렛 시내를 건너가라 그래서 우리는 제렛시내를 건너갔다. 우리가 카데스 바르네아를 떠나 제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걸린 기간은 삼십팔 년인데 그동안에 주님께서 맹세하신 대로 군사들의 한 세대가 백성들 가운데서 다 죽어 진영에서 사라져 갔다'

주님께서는 백성 가운데에서 군사들이 모두 죽어 없어지자 이스라엘을 일으켜 세우셨는데 그 기간이 무려 38년이나 걸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서 곧장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카데스 바르네야 광야에서 진을 친 후 38년을 기다렸는데 그 동안 싸움을 할 수 있는 군사들은 모두 죽어 그들 진영에서 사라졌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야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두번째 물을 건너게 됩니다.

곧 제렛 시내를 건너게 됩니다.

제렛 시내는 오늘 제 1독서에도 나오는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짠물로 흘러들어가면 그물이 단물이 되어 온갖 생물이 되살아나 우글거리는 사해로부터 아라바해로 연결되는 냇물을 말합니다.

모세는 홍해를 갈라 온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였고 두번째 제렛시내를 건너게 하였지만 세번째 강인 요르단강은 건너지 못한채 느보산에서 그곳을 바라보며 임종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무엇이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구원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베짜타 못가에서 서른 여덟 해나 아파서 꼼짝할 수 없었던 병자는 자기가 움직일 수 없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못의 물이 출렁이며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었고 또 그러한 물결 속에 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아무도 다가가서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묻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저 잠잠한 연꽃처럼 조용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물이 출렁거리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그곳은 아비규환처럼 난리 법석이 날 만도 한 그러한 기운이 늘 감도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의 시선은 그 어디에도 있지 않았고 오직 물결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못의 물결이 움직여지기를 보고 있던 병자에게 못 물결이 움직여지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아무에게도 38년간 관심을 받지 못한 채 그저 물결만을 바라보아야 했던 병자의 마음에 생명을 던지듯 말씀으로 다가간 예수님께서는 당장 병자를 건강한 삶에로 부르셨습니다. 물결이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또 그 물속으로 몸이 던져지지도 않았지만 병자는 자기 들것을 들고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그 속에서부터 모든 폭력과 군대가 죽어갔고 드디어 평화의 움직임을 본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밖에서 구원을 찾았으나 예수님을 만나고부터는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물결을 만났고 이미 그 출렁이는 물결이 내 안에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내가 물속으로 던져지지 않아도 구원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연못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연못이 내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말씀의 체험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부드러운 마음속에 생명의 말씀을 던지시는 분이십니다. 그 말씀이 내 속으로 들어오면 나는 출렁이게 되고 변화하게 됩니다. 기뻐서 환오를 지르기도 할 것이고 아파서 통곡을 쏟아내기도 할 것입니다. 베짜타 못가의 병자는 그날 예수님을 직접 뵙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베짜타 못가의 병자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치유 받을 수는 없는 현실이지만 예수님은 살아계신 말씀으로서 지금도 온 세상에 충만해 있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그 말씀이 내 영혼의 심연 속의 생명이 되어 내 속으로 던져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마음의 물결이 출렁이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이 세상에 충만해 있는 말씀의 연못으로 생명이 되어 던져져야 합니다. 즉 말씀의 물결이 출렁이며 살아서 움직이도록, 널리 확산되도록 투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를 위한 가장 강한 변호는 그리스도교적으로 생동하는 그리스도교인이다.” 라는 말이 이루어지도록 늘 평화의 기도안에 머무르며 얼마 남지 않은 사순시기를 주님과 함께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생동안 세가지 강을 건너갑니다. 첫째는 출산의 강이고 둘째는 세례의 강이며 셋째는 임종의 강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오시면 앓는 이가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생명의 물이 그 속으로 흘러가 눈먼이가 보게되고 다리저는이가 제대로 걸으며 말라비틀어진 팔다리에 생기가 솟아납니다. 내 상처는 깨끗해지고 그 살갗에 새살이 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