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주님공현전 토요일 요한1,35-42 구세주 메시아(딸/ 20240104성바)

jasunthoma 2014. 1. 4. 03:24

어떤 부인이 만삭이 되어 병원에 가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기 낳았다고 합니다.

그 때 엘리베이터 안에는 의사가 함께 타고 있었는데

의사는 그 부인이 부끄러워 할까봐

한사코 괜찮다고 하면서 격려하는 차원에서 이렇게 위로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작년에 어떤 산모는 글쎄 병원 마당 잔디밭에서 아기를 낳았지 뭐예요

그랬더니 부인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챙피해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에 그 사람이 바로 저였어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찾느냐"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무엇을 찾느냐' 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첫번째 말씀으로 기록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첫번째 말씀에 제자들은 엉뚱하게도 "라삐 어디에 묵고계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어떻게 보면 동문서답하는 격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느냐 혹은 너희는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었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거처를 묻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신지가 궁금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예수님의 거처를 알고 싶어하고 왜 그토록 확인하고 싶었을까요?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아였습니다.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하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의 거처를 가서 확인한 결과 그들이 얻은 답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입니다.

즉 그들이 예수님의 거처를 알고싶어 했던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올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믿고 있었고

또 행여 만약에 오더라도 성경에 쓰인 대로 산악지방인 유다 베들레헴에서 그리고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오실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시 갈릴레아 사람이었고 모두가 나자렛 출신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두들 알고 있는 대로 분명히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닌데 그들의 스승인 세례자 요한은 그분을 가리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며

너희가 그토록 찾고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은 "와서 보아라"하고 말씀하신 그곳에 따라가서 그분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라가서 그들이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을 때에 과연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 묵으시는 곳이 나자렛 성가정과 같은 곳이었을까요??? 또는 그 곳에 성모님이 계셨을까요? 안계셨을까요?

분명한 건 예수님이 어디에 어떻게 누구와 살고 계셨는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예수님과 그날을 함께 보내고 나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때는 오후 네시쯤이었다고 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제자들은 갈릴레아 호숫가에서 부르심을 받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베타니아는 유다 지방에 두 군데인데 성경지도에 의하면 먼저는 오늘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강가에 있는 낮은 고을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곧 올리브 산 근처에 있는 높은 베타니아(마르11,1) 즉  벳파케와 베타니아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있고 난 뒤 이튿날,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일컬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을 한 뒤 이튿날,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자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고 하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같은 이튿날이든 아니면 다른 이튿날이든 만약 그 때가 이튿날을 시작하는 아침이었다면 오후 네시쯤까지 약 10시간쯤 되는 거리를 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른이 10시간을 걸으면 얼마나 갈 수 있을까요??? 요르단강 근처에서 예루살렘 근처까지 약 40Km 남짓된다고 하니까 아마도 오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따라간 첫 제자들은 요르단강 건너편 낮은 베타니아에서 예루살렘 인근 높은 베타니아까지 따라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서 묵은 곳은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인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타이아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분과 함께 묵기 시작한 시각은 오후 네 시쯤이 되어서야 여장을 풀고 그날을 묵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르단강가 베타니아에서 산악지방인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곳 베타니아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간 곳은 다윗의 고을인 베들레헴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지리적 정황에의하면 베타니아에서 가까운 유다의 고을인 베들레헴에 머물고 계셨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면에서 보자면 메시아가 올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동방박사들이 구세주 메시아를 찾아낸 곳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곳은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외양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아기가 아주 훌륭하고 근사한 집의 침대 위에 아늑하게 누워있었다면 아마도 동방박사들은 발길을 돌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난 곳은 온전한 거처가 아니었습니다. 메시아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하는 장소라는 것은 메시아가 구름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면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장소라는 말과 같습니다.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워서 태어난 곳이 차마 이곳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일컬어서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8,20)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날 그분과 함께 묶고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성모님이 천주의 어머니로 더욱 분명해지듯이 성모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더욱 분명히 메시아임이 드러납니다. 

오늘 하루 성모님을 한 시도 떠나지 않으신 예수님께 우리의 온 정성을 다해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생명과 사랑 ] 요한1,35-42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선언한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요한은 왜 예수님을 가리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을까?

   유다인들은 로마로부터 억압 받는 자기 민족을 해방시켜줄 왕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으나 그들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켜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 양은 무리를 이루며 잠시라도 주인의 보호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힘없는 존재다. 양을 하느님의 메시아로 본 것은 장차 있게될 하느님 나라에서는 율법의 통치를 바탕으로 권력을 행사하며 타민족을 지배하는 강한 나라를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주인의 보호뿐만이 아니라 어미양으로부터 형제양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이중 삼중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양, 어린양처럼 생명과 사랑의 보호가 필요한 나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서로가 아무런 법적인 관계가 없지만 형제가 되고, 육적으로 낳지 않았지만 부모가되고, 자란 곳이 다르지만 가족이 되는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가 있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느님 나라다.(이사 49,21)

   하느님의 어린양을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고백한 제자들은 그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느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