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연중제24주간 화요일 루카7,11-17 행복한 울음-(스)

jasunthoma 2013. 9. 18. 03:49

웃으면 복이와요라는 개그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웃는 시간이 많습니까? 우는 시간이 많습니까?

왜 사람이 태어나면 태어난 사람이 울고 죽으면 살아남은 사람이 울까요?

상식적으로는 태어난 사람이 좋아서 웃고 산 사람이 좋아서 웃어야 하는데 현실은 좀 다른 면이 있는것 같습니다.

왜 태어나면서 울고 죽어도 울까요?

울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는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의 외아들을 살려주십니다.

과부가 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애절하게 울었으면 예수님께서 성문밖을 나가는 상여를 잡아 세우십니다.

상여와 수많은 군중이 무리를 지어 성문밖을 나가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르던 군중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성문앞에서 서로 마주서서 있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상여를 세우시고 과부의 통곡을 들으십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만듭니다.

특히 죽음에 임박한 이들을 곁에 둔 부모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께 간청하며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되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간청은 이루어지기도 하고 이루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백인대장의 종처럼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만으로 치유 되기도 하지만 오늘 과부처럼 아들이 죽어서야 비로소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는 일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현실은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웃는 일보다 우는 일이 더 많은 것이 가슴아픈 현실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종처럼 임종에 임박한 사람도

과부의 아들처럼 죽어서 들것에 누여 무덤을 향하는 사람도

라자로처럼 아예 무덤에 뭍혀서 사흘이나 지나서 육체가 썩어 허물어지는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만나면 아픔이 사라지고 멈추었던 숨을 다시 들이쉬며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부패한 육신의 썩은 냄새가 아니라 갓 태어난 아기의 향긋한 젖살과 같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피어오르기 때문입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이어서 외아들마저 잃고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는 한 여인의 심정을 예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여인을 가엽이 여기시는 심정을 묘사하면 그 측은하심은 속에서부터 흐느끼는 감정입니다.

그것은 내적 울음입니다.

아주 깊이 느끼는 연민의 눈물입니다.

그 많은 군중 속에서 이런 심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예수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셨기에

그토록 깊이있는 마음으로 아들을 잃은 한 여인을 위로해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활신앙은 죽은 사람이 직접 살아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며 함께 죽었던 내영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되는 일도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한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속에는

이웃의 눈물을 그냥 보아넘지기 말고 함께 울어주어야함을 전재로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하여 웃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울어야 복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되어 이웃과 일치되기 위하여 우는 일이 많아질때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고 죽음이 생명으로 되살아 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 울음을 머금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