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연중제17주간 토요일 마태14,1-12 생명의 잔치

jasunthoma 2013. 8. 3. 05:11

제 생일은 음력 칠월인데요 양력으로 치면 항상 8월에 들어 있습니다.

생일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것이 뭐가 있을까요?

저는 미역국이 떠오르는데요.

하얀 쌀밥을 말아먹으면 제격입니다.

그런데 왜 미역국에는 소고기가 들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소고기 미역국에는 두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미역국에다가 소고기를 조금 넣으면 뭐라합니까?

소고기 미역국이라합니다.

그리고 소고기국에다가 미역을 조금 넣으면 뭐라할까요?

미역 소고기국 이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두번째를 좋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경위를 전해줍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죽이게 된 이유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하고 말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왜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맞아들이는 것을 반대했을까요?

헤로디아가 동생의 아내였기 때문일까요?

요한이 헤로데의 처신을 반대한 이유는 그여자가 이미 동생과 결혼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와 동생 사이에 자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형제가 자식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가 죽은이의 아내와 혼인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헤로데가 동생의 아내를 맞아 들인 것이 아니라 차지햐였다고 번역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데리고사는 것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차지하였다는 의미를 들여다보면 맞아들이거나 데리고 사는 것에 비해서 좀 더 복잡한 관계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맞아들이거나 데리고사는 것은 수용의 차원에서 혼인 당사자에게만 국한된 의미이지만

차지한다는 것은 수용의 차원이 아니라 지배와 착취의 차원에 가깝고 또 혼인 당사자뿐만 아니라 제 3의 경쟁대상자의 존재를 의식하게 해줍니다.

그러니까 헤로데가 동생의 아내를 차지한다는 것은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생의 딸을 비롯하여 또 다른 관계성을 묵살시킨 폭력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폭군들은 자신을 아무리 미화시키고 순진한척 괴로워하더라도 결국은 감추어둔 폭력성은 어떤 식으로라도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과연 어떻게 자기 생일에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그것도 자기 생일에 음식을 담아와야 할 쟁반에 요한의 머리를 베에서 잔치상에 가져오게 할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생일은 자기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복해 주는 날입니다.

그런 날인만큼 남의 생명도 존중하고 서로 살려주고 묶인 이를 해방시켜 주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저 잔치를 벌리고 위안을 받는 날이 아니라 생명의 소중함을 기억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연중시기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시기인 만큼 우리 생명의 한 가운데에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