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부활제3주간 금요일 요한6,52-59 생명의 생명

jasunthoma 2013. 4. 19. 04:46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살을 어떻게 사람이 먹을 수 있느냐를 놓고 유다인들 사이에서 말다툼이 벌어집니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것입니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장면입니다.

그런데 자연의 섭리 안에서보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가시고기의 생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알에서 깨어난 치어 가시고기가 자기 아비의 몸인줄도 모르고 그 살을 뜯어 먹으며 성장합니다.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에서 엘리야가 마실 물 한 그릇과 구운 빵 한 조각을 청하자 그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단지에 남아있는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로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성경에서는 되도록이면 애둘러서 완곡한 표현으로 묘사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역사가인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를 보면 전쟁이나 심한 기근이 든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함락 될 때의 비참함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때에 심한 기근까지 들어 먹을 것이 없어 모두들 굶어 죽어가고 있었는데 어느 젖먹이가 딸린 한 여인의 집에서 고기 삶는 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이를 확인하러 간 군사들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묻자 아기를 삶아서 절반은 먹고 남은 절반을 내어놓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육신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먹고 먹혀야 하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식탁만 보더라도 알수 있습니다.

한 끼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죽어갑니까?

그것을 최소화 해보자는 것이 불가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식물의 죽음이 동물보다 하찮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식탁은 무수히 많은 생명체의 살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비참한 현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양식으로 먹고있는 모든 것은 살생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살생을 한다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을까요?

죽이는 일이 과연 올바르고 선한 일이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본능적으로는 아무것이나 먹을 수 있어도 본성적으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 육신이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듯이 인간의 영혼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인 당신의 살과 피는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육신의 양식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죽음으로 얼룩진 비참한 인간의 품위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거룩하고 깨끗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이상 본능적인 식탁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이 모두의 죄가 사해지는 제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모든 생명의 생명이신 예수님안에서 행복한 하루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