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사순제5주간 금요일 요한10,31-42 아버지와 하나

jasunthoma 2013. 3. 22. 05:33

깊은 산 속에 홀로 사는 도예가가 있는데 진흙으로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성상을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거울도 없고 조각칼도 없이 손으로 빚어 만들어야 한다면 과연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만들 수 있을까요?

진흙 속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진흙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자신을 닮을 수 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또 돌을 던지려고 하자 그 이유를 묻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 번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했었는데 그때는 예수님께서 아무말 없이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로 물러가시지 않고 돌을 던지려고 하는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여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 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해하기 힘든 삼위일체 교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얼마만큼 하느님을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손수 만드신 사람을 보시고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수 있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렇게나 만들어놓고 이게 내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모순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온갖 피조물들은 아무렇게나 만들었을지 몰라도 사람을 만드실 때에는 온전히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신과 똑 같은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이신 하느님 당신이 직접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자신의 모습으로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아들은 아버지를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내려오신 아들이 아버지 사랑을 증거하는 최고의 고백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모습뿐만 아니라 영혼과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하신 그 말씀대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침묵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결국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말씀은 고백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아들이 고백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이미 그렇게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다인들도 예수님 못지않게 하느님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율법에 기록된대로 의무를 다하는 기계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아들의 사랑이 아닌 종의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종의 사랑이 폄하되어서는 안됩니다.

종의 사랑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들의 사랑을 믿지않는 것도 모자라 아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는 종의 열정은 왜곡된 사랑입니다.

어떤 것이 진실로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말씀에서 사랑의 극치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기득권과 권력의 전임이 아니라 희생과 봉사의 받아들임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셨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종으로 살아가려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가 우리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죄를 피하고,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머무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