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예수성탄대축일 낮미사 요한1,1-18 기쁜말씀(성바)

jasunthoma 2012. 12. 25. 07:58

아기 예수님께서 베들레햄 마굿간에서 탄생하셨을 때에

아기가 큰 소리로 울었을까요? 울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울었을겁니다.

울어도 너무 울었을 겁니다.

아기가 너무 크게 울자 당황한 요셉이 이리저리 살피다가

마땅치 않치만

아기를 누일 적당해 보이는 구유에 아기를 누였습니다.

아기는 곧 울음을 그치고 조용히 잠들었습니다.

그러자 별이 쏟아지도록 고요한 평화가 마굿간에 가득찼으리라고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로고스(말씀)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귀여운 아기로 오신, 즉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만드실 때 말씀으로 빚어 만드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오늘 탄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 오신 이유가 있듯이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받아들이고,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권한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게된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우리는 여기서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나 백인대장이나 똑 같이 말로써 사람들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이 아무리 명령해도 안 풀리는 것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멀쩡하고 성한 부하에게는 모든 말이 다 통하고 명령대로 움직여 집니다.

'이 사람에게 가라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하면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을 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안통했습니다.

아파 죽겠는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아파서 드러누운 사람에게 저리 가라하면 가고, 이리 오라하면 옵니까?

아프거나 병들어있는 사람에게는 제 아무리 큰 권력을 지닌 사람이라도 자기 권한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 권력의 한계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는 세상의 권위와는 다른 권위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한 사람에게도 아픈 사람에게도 모두 통하는 말씀 자체이시자 말씀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을 잘못해서 멀쩡한 형제를 아프고 병들게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병든 그 형제를 다시 낳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탄생하신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기쁜 말씀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렇게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은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아픈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은 언제나 말들이 많습니다.

들어보면 대부분 맞는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말들의 주인은 분명 말씀이신 하느님이심을 잊어서는 않 될 것입니다.

아무 말 없이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 안에서 기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