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19
[연피정 묵상글입니다]
욥이나 소돔 주민들처럼 벌을 받을 것 같으면 하소연 해도 천지의 권능 앞에 무력한 피조물이란 인식으로 그것을 한 가닥 이해의 실오라기라고 믿고 인정할 여지가 있지만 같은 피조물의 교활한 속임수에 말 못 할 피해를 입은 경우라면 누구에게 보상을 요청해야 할까.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해악을 저지르지만 참과 거짓을 가리운채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단정해 버릴 때 피해입은 사람과 오명을 뒤집어 쓴 사람은 어떤 보답을 받게 되는가? '오해'라는 말로 결말을 짓기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너무 깊기 때문에 어떤 보상이라도 그들에게 위로로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렁이를 밟고 지나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밟혀서 꿈틀거리며 요동치는 지렁이를 보고 되려 놀라 달아나는 사람이 있고 그 지렁이를 애처로이 보고 화단의 한 쪽 숲으로 올려 놓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묻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 주신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밟힌 지렁이가 고통을 격다가 눈을 떻을 때 누가 그의 곁에 있었는가? 만약 누군가가 혹은 무엇이 그 옆에 있었다면 그는 주님의 사랑으로 주어진 보상이 아닐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게 되었고 특히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게 되었습니다<1고린 1,5>라는 말씀이 있음을 생각하며 지금을 돌이켜 볼 때 먹고 마시는 음식의 풍성함이나 입고 자는 주거의 호화로움이나 사소한 소품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넉넉해졌음을 애써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아니라는 사람은 살이있는 성인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언변과 지식이라고 한 것은 앞서 말한 세속적인 것을 더욱 고귀하고 가치롭게 해 주는 절재된 보석과도 같은 것이다. 지혜롭게 말하는 언변이나 사물의 이치를 통교한 지식이야 말로 더할 나위없이 귀중한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 귀중한 보화를 잘 못 사용해서 이웃을 해쳐서는 안 될 것이다. 세속적인 지혜가 아닌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바보가 되어야함을 믿기 때문이다.
심리적 고통은 무능함, 무지함의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이 장차 어떻게 하느님의 계획대로 될지 몰랐고 자신들이 저지른 결과로 격게될 심리적 고통을 앞서 알수 없는 무능한 인간이었다.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피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동생을 만나기까지 심리적 고통에 시달렸을 것이다.
집게 손가락을 한 독일의 해외 입양아가 고국을 방문한 일이 TV다큐멘터리로 방영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36년간을 독일에서 살았고 자라는 동안 자신의 정체성에 큰 상처를 받고 자기를 버린 부모를 원망했다고 했다. 지금은 독일의 한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정착했는데 자신을 버린 부모님을 이미 용서했고 이제는 어머니를 만나 뵙기를 간절히 원했다.
만약 집게 손을 가지고 한국 땅에서 살았더라면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되었을까. 자신에게 버림이라는 고통이 다가왔으나 훗날 더 좋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지금의 모습을 고통의 산물로 보기보다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믿고 있었을지 사뭇 궁금했다.
고백록 마지막 권에 '그누가 짠것들을 한 사회에다 모았나이까?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시간적인 지상의 행복인것 이것 때문에 갖은 고생에 들까불리면서도 허구헌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라고 적혀있다. 바다란, 물들이 한군데로 모인 것이다. 모이기 전에는 순수하나 모이고 나면 모두들 짜다고 표현한다. 여러가지 맛이 드러나지 못한 채 다만 짜다라고만 표현된다. 지금껏 살면서 좋았던 기억은 찾지 못하고 죽는 순간까지 고통스러워하기에 인생은 고통이라고 밖에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선 자체이신 하느님이 어떻게 고통의 악을 만드셨겠는가? 인간이 바라 볼 때 악이라고 해서 모두 고통스러운것은 아니고 또한 선이라고 해서 모두 즐거운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다 지으시기 까지 일곱번을 '보시니 참 좋았다'하고 표현하셨을 만큼 이 세상은 다 좋은것 뿐인 것이다. 낱낱이 보시고 참 좋으셨던 것과 같이 이 모두를 한데 모아 전체로 볼 때도 참 좋았으니 하느님 앞에서 악이란 고통이란 보이지 않는 것에 불과 할 뿐 모두가 바닷물을 그저 짜다라고만 말하듯이 이 모두가 좋은 것 선 자체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표현됨이 지당하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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