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고독과 불안, 공허한 인간 군상 어떻게 군중속에서 공허할 수 있겠는가. 사막에서 충만할 수 있겠는가. 고독감... 인간은 자아의 번지수를 찾기 위해서는 남편과의 관계를 맺기가 긴요한 것이고 따라서 남들이 없으면 고독을 느끼는 것이다. 사회적 적응도 중요하다.
단순히 혼자있는 것만이 고독의 전부일까. 현대인의 고독의 또 하나의 측면은 그가 혼자 있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현대 문명에서는 마치 혼자 있다는 것은 잘못되고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예를 들면 바닷가에는 종류 이상의 가족들이 모여들어서 마음껏 휴가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매일 저녁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전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칵테일을 마시며 아무런 화제도 없으면서 되지도 않는 소리를 계속 지껄이고 있으며 서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유에는 무슨 내용의 대화가 이루어지느냐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그저 무슨 소리든 계속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때 침묵은 하나의 죄를 범하는 것이 되는데, 왜냐하면 침묵이 계속되면 외로워지고 따라서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많이 느끼는 것도 금물이고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해도 않된다.
고독에 대한 두려움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우리자신에대한 의식을 잃지는 않는가하는 불안에서 온다. 만일 우리가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고 공기 속에 울리는 라디오마저 없는 가운데 혼다있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희미한 종말에 서 있는 것같이 느끼게 되고 자신의 경계선을 잃으며 따라서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가 하는 좌표마저 잃게 되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온자 있을 때에는 실컷 일도 할 수 없거니와 놀 수도 없고 심지어는 잘 수도 없다는 말을 흔히 듣게 된다. 이때 물론 이들은 그 원인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것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이들이 깨어 있는 것과 잠자는 것의 경계를 잃어버린 탓이고, 이것은 마치 그들이 자신의 주관적 내적 세계와 객관적 외적 세계 간의 구분을 잃은 것과 같다고 하겠다.
현대인의 또 다른 특징으로 위리는 공허감이나 고독감보다 더욱 기본적인 정신병리인 불안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공허나 고독감도 이 불안이라고 불려지는 특이한 심리적인 고통이나 곤경과 결부될 때에 한해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불안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과 가다. 즉 불안이 커지면 개체는 방향감각을 잃게 되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또는 누구인지 하는 것도 몰라보게 되며, 마침내 자신의 주위세계에 대한 현실ㅈ거인 판단력을 상실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가치관의 상실.
여기서 니체는 전통적인 신에 대한 믿음을 되찾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는사회가 그 가치의 중심을 잃었을 때에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짖거한 것이다. 그의 예언이 옳았다는 것은 중세기에 있은 대학살과 특히 유태인 참살 및 전제정치의 횡포에서 볼 수 있어쑈다. 그야말로 거창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인도적이고 히브리 기독교적인 가치가 사라지게 되면, 무서운 야만성으로 뒤덮인 밤이 닥쳐올 것이다. 여기서 빠져나올 길은 니체에 의하면 우리가 새로운 가치의 중심을 찾는 데 있으며, 그것을 니체는 모든 가치들의‘재평가된 가치’ 또는 ‘초월가치’라고 명명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모든 가치들의 ‘새로운 가치화’야 말로 ‘내가 제시하는 구원의 처방’이라고 했던 것이다.
오늘날 인간이 자아감각을 상실한 데 대한 놀라운 모습은 알베르까뮈가 쓴 ‘이방인’의 주인공에서 볼 수 있다. 작품의 주인공 뫼르소는 별로 이상한 인간이 아니고, 오히려 가장 정상적인 현대인인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하러 가고, 일상생활을 하고, 어떤 여인과 성교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별로 의식하지도 않았으며, 스스로 결심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후 뫼르소는 한 인간을 총으로 쏘아 죽였는데 그것조차 그가 명백히 어떤 결심을 가지고 했는지 희미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는 살인죄로 기소되고 마침내 처형되는데, 모든 것이 그저 무서울 만큼 무관심과 무감각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사형집행의 순간에 자신을 깨닫게 되었고 자아 존재를 실감했지만 때는 늦었다.
그러나 우리가 불안의 공황에 휩싸이게 되면 웃을 수도 없거니와 자신과 주위 세계와의 구분을 할 수도 없게 된다. 우리가 웃을 수 있는 한, 우리는 완전히 불안이나 공포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니고, 노래에도 있듯이 웃을 수 있는 자는 용기가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 예수님은 어떤때 웃으셨을까. - 대화를 위한 언어의 상실 - 인간의 고향인 정신에 대한 무관심
그것은 잠시 집에서 멀리 떠났다는 것을 뜻하며 혼자 지나다가 너무 놀라운 일이 생길 때에는 언제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는 돌아갈 집이 없는 선을 넘어선 비행사처럼 되돌아갈 휘발유가 없기 때문에 폭풍이 불거나 그외의 어떠한 위험이 닥치더라도 오직 전진할 수 밖에 별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 무엇을 경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사유하며’, ‘직관하며’, ‘느끼며’, ‘행동하는’ 통일체올서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란 결코 어떤 ‘역할’의 총화가 아니고 오히려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아는 능력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자신의 여러 측면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미루어본다면 자신을 자기로서 받아들인다는 것과 ‘사람으로 된다’는 말은 그 자체가 간결하면서도 가장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만일 우리가 어린이를 놀리기 위해서나 혹은 잘못해서 그의 이름을 달리 부르게 되었을 때 그는 아주 당황하고 강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것은 그 아이의 자아동일성을 빼앗아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며, 그것은 이 아이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구약성서에 ‘나는 그들의 이름을 빼앗겠노라, 그리하여 그들의 존재성을 없애버리고, 결코 이 지구를 없었던 것처럼 맞들겠노라’하는 말이 있는데 실은 이것이 육체적 죽음보다 더 가혹한 말이다.
다행히 종자가 떨어지며 자라나는 나무나, 나자마자 자기 스스로 방어를 해야 하는 개와는 달라서 인간은 유아기나 아동기 따위의 성장기가 매우 긴 것이 특징인데, 인간은 이 기간에 장차 닥쳐올 난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지식과 능역을 무장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앞날의 선택과 결정의 능력을 기르게 된다.
따라서 자책감은 교만이라는 웃옷을 입고 위장한 때문에 오는 느낌이다. 자기의 자만심을 감추기 위해 자책감을 나타내는 사람은 스피노자가 말한 ‘자신을 경멸하는 자는 교만한 자’라는 말을 음미해 복 필요가 있다.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들은 노동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 일부러 구멍이 뚫린 남루한 옷을 입고 다녔는데, 소크라테스는 이 허휘성을 갈파하면서 ‘당신들의 허영심이 그 옷의 구멍마다에서 흘러나온다’고 말했다.
공허감의 시대에서 자책감이나 자기 경멸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병든 말을 채찍질하는 것과 같다. 채찍질을 하면 일시적으로는 더욱 잘 뛸지 모르지만 마침내 인간의 존엄성이 마비된다는 결과에 이른다. - ‘죄와 벌’에서 나귀를 때리는 인물.
물론 20세기의 의학이 놀라우리만큼 발전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신체를 이토록 소홀히 다룰 수는 없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나 조화 없이 다만 자율신경에 맡기게 되면 모든 종류의 이른바 정신신체증상이 오고야 말 것이다. 많은 신체의 병은 가령 바르지 못한 자세나 걸음걸이의 잘못, 또는 숨쉬기의 불완전 등에서 시작해서 자신의 다리나 손과 같은 신체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기계적생활에서 유래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피력한 견해 중에 둘째번의 요류는 행동주의에 빠지지 않는가 하는 데 있다. 즉, 우리가 깨달음 대신에 행동성을 강조할 우려가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더 많이 행동할 수 록 더욱 참신한 삶을 가진다는 이른바 행동주의의 미신이 있다.
‘가만히 있기 위해서는 강한 자아동일성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강조한 자아의 의식은 생생한 삶이지만 조용한 형태로 나타난다. 즉 심사숙고나 명상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는 현대 서양 사회가 상실해가고 있는 점이다.
‘만약 인류가 하나의 사람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증오하는 부모님들의 쇠사슬을 풀어버려야 하고 필요하다면 그런 부모님의 살생도 불사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레스터스는 용서 받았다. - 어머니를 죽으시게 놔두고 수도원에 입회한 것과 흡사하다.
성장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성장과 자유를 가로막는 권위주의적 힘에 대해서 반대하고 나서는 것이다. 가족 단위 속에서 보면 그런 힘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서 찾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탯줄을 통해서 너무나 어머니에게 밀착되었기 때문에 의존과 편견과 미숙에서 독립과 지혜와 성숙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외루운 길이며, 따라서 희랍인은 지혜와 선행의 여신에 대한 신화에서 탯줄에 대한 투쟁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한 진의를 짐작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예수는 ‘나는 형화가 아니고 칼을 가지고 왔노라.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를, 딸은 어머니를,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보능ㄹ 보이려 이 세상에 왔도다. 그래서 인간의 적은 그들 가족 속에 있는 사람들일지니라’하고 외치지 않았던가. 물론 예수는 가족끼리 서로 증오하라고 한 것은 아니고, 인간의 영적인 발달은 근친상간적 향내적 사랑이 아니라 밖으로 이웃이나 이방인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야말로 가족 내의 인간은 만일 서로 얽혀 있기만 한다면 하나의 원수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여기에 첨부해서 말한다면 ‘안으로 향하는 근친상간이 아니라 밖으로 향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인류는 발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식의 몇 가지 단계를 지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 첫번째 단계는 자기의식이 아직 생기지 않은 유아가 가지는 천진난만한 시기이다. 둘째가 소위 반항기로서, 이때는 자아가 어떤 내적 힘을 가지기 위해서 자유를 추구할 때 생긴다. 이것은 어린애가 2,3세 될 때나 사춘기에서 가장 잘 볼 수 있어 이 시기에는 반항과 적대의식이 나타나고, 극단으로는 오레스테스의 자유를 위한 투쟁과 같이된다. 이 반항은 인간이 낡은 유대를 끊고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할 때 나타나며 크든 작든 이 반항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반항 그 자체가 곧 자유라고 혼돈해서는 안된다. 셋째번 단계는 자기에 대해 일상적인 의식을 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과오를 볼 수가 있고 어느 정도의 편견도 가지게 되며, 죄악감이나 불안감이 들어도 이것을 가지고 어떤 인생경험을 배우기도 하고 때로는 책임있는 일을 결심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일반이 말하는 건강한 인격의 단계이다. 그러나 네째번 단계는 대부분의 사람이 흔히 느끼지 않는 어떤 특별한 의식을 가지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며칠 씩이나 해답을 찾기 위해서 고민하다가 그와 같은 문제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는 시기인데, 이때 통찰은 갑자기 들이닥치게 된다.
니체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이 자신의 내적인 증오감을 정리하지 못한다면 결코 참다운 사랑도 도덕도 자유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모두 동의할 줄 안다. 증오감과 노여움은 반대로 인간의 자유를 재확립시키는 데 있어 그 원동력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런한 일을 하지 않고 파괴적 감저응ㄹ 건설적 감정으로 변형만 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는 누구를 미워하며 무엇을 미워하는가를 똑바로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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