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이야기

사랑에로의 초대를 읽고 - 죠지 스위팅

jasunthoma 2008. 12. 9. 16:15

내 무의식의 세계에는 무엇이 있을까? 예전에 분명히 있었던 일이지만 지금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기억이 한계가 있기에 아무리 중대한 사건이라도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내 몸에는 그 어떤 프로그램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내면에는 잠재된 정서 프로그램이 있다.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가 무의식 속에 산재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되살아 날 수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밖에 나가 놀기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를 몰랐다. 학교를 다니기 전 어렸을 때에도 동네 아이들과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며 하루해가 져서 어두워질 때까지 뛰어노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그런데 지금 수도원에서의 생활은 아주 정적이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활동적이고 외적인 성향을 보이며 살아와서 침착하게 앉아서 기도하거나 묵상하기가 어려우리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내 자신이 가정환경과 그때의 사회 환경에 따라서 달라진 행동을 보인다고 생각된다. 지금생각하면 그 때의 생활환경은 좁은 방 한 칸밖에 안되는 집에서, 숨쉬기조차 어려울 것 같은 곳에서 하루 종일 있어야 할 처지였다. 그런 곳에서 밖에 나가 마음껏 뛰어 놀 수 없다면 금방 질리고 말 것이다. 좁은 집 환경이었기에 실내에서 할 수 있는 놀이보다는 밖으로 나돌아 다녔던 것이다. 그것은 그 동네에 있던 대다수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나가서 놀고 싶어서 나간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강요 섞인 목소리에 의해 나가놀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이 살아오면서 잊혀졌지만 내 안에서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나는 어머니께서 ‘나가놀아라’고 하실 때 집에서 쉬고 싶었던 것이다.

 

내안에 숨어있던 거짓 자아는 수도원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나는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형제들에게 못마땅해 하며 불쾌히 여기기 일쑤였다. 그것은 어머니가 차려준 조반은 자다가도 일어나 들어야 했음에 대한 거짓자아였다. 내가 형제에게 수도원 일중에서 집중 사도직을 소홀히 한다며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려는 뜻에서 보란 듯이 성실히 노동한 것을 비추어볼 때 그것 또한 내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 벌였던 거짓 자아의 소산이라고 생각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 자신이 수도원 형제들보다 탁월하게 건강한 것도 아닌데도 그런 약한 나를 받아들이기보다 형제들을 깎아 내려 내 약점을 감추려했던 기억들이 난무했음을 반성해 본다. 이러한 악습들을 없애려 애를 쓰지만 매번 되풀이되는 모습에 그만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며칠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것 말고도 너무나 많은 결점들을 혼자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에 같은 회사에 다니던 동료가 있었는데 그가 왜 수도원에 들어가느냐고 물었다. 이제 한참 일할 나이에 좋은 직장을 구했으니 곧 승진도 할 것이고 결혼을 해서 가정도 꾸려야 하지 않느냐며 말리려 했다. 그는 모든 세속적인 것을 정리하고 수도원에 들어간다는 나를 붙잡듯이 말리려한 것이다. 동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심했음을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그때에 나는 회사에 입사할 때 면접에서 내가 심사원들에게 했던 말이 되살아났다. 자네는 왜 이 회사에 입사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조직적인 생활을 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회사처럼 큰 조직에서 일하며 살아간다면 비록 혼자서는 약하지만 함께 할 때 강해짐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속으로 수도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라는 큰 조직에서 일하면 승진하고 높은 자리로 올라가듯이 수도원에서도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으리라는 거짓 맹세였던 셈이다.

 

내 안에서 가장 치유되기 어려운 거짓 자아는 색욕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때에는 별로 흥미롭지 않은 듯이 무관심하게 행동할 때에도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음성적인 행위들에 있어서는 더욱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이러한 불편한 정서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내가 욕망에 불타 욕정의 노예로서 살아가기를 거부하려는 것은 자아의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의 긍정적인 참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무심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두려움을 이겨내고 나를 평화로 이끈다. 떨쳐버리기를 원하지만 떨쳐지지 않는 집요한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안토니오 성인의 생애를 통해 볼 수 있다.

 

안토니오 성인의 일생은 한마디로 두려움에대한 극기라고 생각한다. 순교의 영성으로서 동정을 지키신 안토니오 성인의 사막에서의 투쟁은 실로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거칠게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나로서는 선뜻 이해가 안 된다. 흔히 생각하기에 영적투쟁은 조용한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잡념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와 다르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앞선다. 나는 아직 성인처럼 성욕을 이기려고 격렬한 몸부림을 쳐본 적도 없고 싸워서 맞아본 적도 없고 붙잡고 늘어진 적도 없다. 지금까지도 그러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그러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더욱 비굴해 짐을 느낀다. 군대가서 전쟁과 유사한 훈련들은 받아봤지만 실재로 전쟁을 해 본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떻게 성인처럼 성욕과의 전쟁을 치를 수 있을까? 정해진 생활에 이미 몸담고 있는 수도자들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성욕과의 전쟁을 치를 수 있을까? 피정을 통해서 다소 접근은 가능하겠지만 현실적으로도 그렇고 지금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전례력 안에서 행해졌던 의무적인 미사와 기도는 내 안에서 실재하지 않는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는 안토니오 성인처럼 악마들과 직접 싸워보지도 않았는데 그 외에 다른 유혹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일차적인 싸움 후에 나타나는 유혹들이 계속해서 생겨난다. 금욕에 대한 유혹을 비롯하여 재산과 권력 그리고 부모님과 친척들에 대한 유혹들이 끊임없이 다가온다.

 

금욕에 대한 유혹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하게 느껴진다. 지속적으로 포기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내 찾아오는 계절처럼 찾아온다. 특히 성욕을 절제하도록 내 자신을 컨트롤 하고 있지만 사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과 같은 처지임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성욕을 절제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고백성사를 통한 내적 결심을 꾸준히 했고 염경기도를 반복함으로써 떨쳐버리려고도 했다. 또 다른 편으로는 차라리 모르면서 공상하느니 모든 것을 알아보자는 생각에서 인터넷을 통해 성을 이해해보려고 살펴본 적도 있었다.

 

고백성사 때 고해사제가 들려주셨던 말씀을 귀담아 들었다가 실천해 보기도 했다. 성욕 절제에 있어서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그 시간적 여유는 사람마다 다르며 각각의 건강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정말 아무도 모르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도둑처럼 올 것이라는 말씀과 같이 나에게도 그런 사건이 발생한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무한히 감사드렸다. 마음으로부터 충만해 오는 뿌듯한 감정이 여러 날 동안 지속되었다. 그 후로는 예전과 같은 혼란스러움이 사라졌다. 성적인 장면 안에서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느끼는 시각이 열린 것 같다. 음성적으로 행하던 행위와 생각들이 끊어지고 말과 행동이 성에대해서 개방되는 방향으로 점점 바뀌는 내 모습을 보게 되어서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전에는 회피하고자 했던 말과 행동이 이제는 자신이 있게 되었고 스스럼없이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자유가 하느님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부모에 대한 유혹은 나에게 있어서 시급하게 다가왔었다. 회사 다닐 때 벌어두었던 돈과 퇴직금을 어머니께 드리고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어서 약간의 안도감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수도원 들어간다고 하면 부모님이 자기 자식에게 돌아갈 재산을 떼어 놓았다가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을 하겠지만 오히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어머니께 드리고 떠나야 했다. 재산 없는 부모님과 내 자신을 원망하기보다 버릴 재산이 별반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것도 하느님의 이끄심이라 생각한다.

 

수도원에서 살기 시작한지 몇 년째 되던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오랜 지병으로 이 세상 떠나신 어머니를 바라보며 슬피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병이 있었고 그 때문에 병원을 정기적으로 다녀야 하셨다. 내가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고 어머니를 계속 모셨더라면 어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더욱 슬퍼졌다. 지금까지 내 마음 한 곳에는 어머니를 끝까지 모시지 못한 죄송한 마음이 남아 있다. 그 죄송한 마음을 보속하기 위해서라도 수도원에서 수도자답게 잘 살아야함을 느낀다.

 

수도원에서 살면서 특히 음식에 관한한 많은 형제들이 소홀히 여기는 경우를 보았다. 물론 하느님께서 주신 양식을 기쁘고 감사하게 먹는 것은 아무 탈이 없다. 그런데 어느 때에는 절제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수도원에 들어와서 좋았던 것 중에 하나가 식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잘 차려진 음식을 매일 세 차례에 걸쳐서 끊임없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잘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맛있게 혹은 배부르게 먹는 데에서만 즐거움을 찾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건대 음식을 제대로 즐기는 것은 절제할 때 가능하다. 먹는 것을 절제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그 의미를 느껴본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가끔은 나 홀로 산행을 하는데 하루나 이틀 정도의 기간을 잡고 산을 오른다. 이때 중요한 것은 먹을 것을 적절하게 챙겨가는 것이다. 너무 많이 준비하면 산행하는 동안 계속 무게부담이 되어서 힘이 들고 너무 적게 챙기면 만약에 기상 조건에 따라 많이 먹어야 할 때 먹지 못하게 되어서 불상사가 생길 것에 대비하지 못하니 불안하다.

 

한 번은 산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정상이 다가오자 깎아지는 듯한 절벽에 이르렀다. 종일토록 물만 먹으며 산행을 했기에 배가 많이 고파서 무엇이든 먹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다. 그러나 멈추고 배낭을 풀어 헤치기도 번거롭고 먹을 장소도 마땅치 않아서 기어이 정상을 밟은 후에 먹으려는 강한 의지를 발휘하며 배고픔을 꾹 참으며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식은땀이 나는 듯 하더니 체온이 급격히 떨어짐을 느꼈다. 더 이상 걷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자 절벽에 가까운 곳에서 메달리다시피 바위에 몸을 붙이고 배낭을 풀어헤쳐서 초코파이를 꺼내서 먹었다.

 

그런데 초코파이가 내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신비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많은 음식을 먹어왔지만 그토록 감미롭게 먹어본 적은 없었다. 음식이 녹아들면서 내 몸속으로 들어갈 때 손끝과 발끝뿐만 아니라 온 몸 끝으로 번지는 동안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새로운 힘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때 너무나 기쁘고 가슴이 벅차 눈물이 흥얼거릴 정도였다.

 

먹는 것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차원에서 벗어나 삶과 죽음의 기로를 의식하는 것이다. 먹음과 동시에 느껴지는 생명력의 소중함을 맛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먹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먹을 수 있도록 해주신 모든 이에게 감사하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관상기도가 어떤 것인지 나로서는 확실치 않다. 토마스 키팅 신부님이 책에서 언급한 대로 분명한 것은 인간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그 무엇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은 관상으로 들어가려는 이에게는 중요하다. 내가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다가오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그분은 누구보다도 공평하신 분이시기에 인간적인 잘 잘못을 따지지 않고 우리에게 오신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상기도의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온갖 잡념들이 일으키는 부산물이 나의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올라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사막의 체험을 하지 못한 나로서는 도저히 고독한 마음으로 침묵 속에서 단순한 기도를 반복해서 드리지 못한다. 내가 잘 났다고 자랑할 것도 없지만 너무 죄책감에 사로 잡혀서도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일상생활 안에서의 관상이 어려운 것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부족한데서오는 과로 현상 때문이 아닐까? 복음을 통해서 충분히 묵상하고 세속적인 질병에서 탈출 할 때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었음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