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8,22-2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이를 고쳐주십니다. 마르코복음에서 눈먼이는 모두 두 번 고쳐주시는데 오늘 벳사이다의 눈먼이를 고쳐주시고, 그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예리코에서 눈먼이를 고쳐주십니다. 그러니까 마르코복음에서 눈먼이를 상징하는 사람들은 벳사이다에서 예리코까지 해당되는 모든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벳사이다에서 예리고 사이에는 요르단강이 있습니다. 이 요르단강을 시작하는 마을이 벳사이다입니다. 이곳은 어부출신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고향이자 요르단강 상류 갈릴레아 호수 북쪽에 위치해 있는 그야말로 요르단강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입니다. 그곳에서 오늘 눈먼이를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예리코는 요르단강의 끝자락인데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었고 예수님께서 그곳 요르단강 끝자락에서 세례를 받으신, 세례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입니다. 그곳에서 티메오의 아들을 눈 뜨게 해 주십니다.
이렇게 벳사이다에서 예리코까지는, 요르단강을 시작하고 끝마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상 여정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는 상징적인 두 장소입니다. 마르코복음이 이 두 마을을 눈먼이와 결부시키는 이유는 요르단강을 끼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눈먼 상태라는 주제로 감싸려는데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눈먼 상태는 사회와 공동체에서 따돌림당하고, 고독하고,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고, “빛”과 만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마르코 복음은 이 두 마을 사이를 지나는 도중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세차례에 걸쳐 전해주고 있는 점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입니다. 어떻게 보면 빛(부활)만의 예고가 아니라 어둠(수난)을 겸한 예고라서 제자들에게는 수난만의 예고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이유는 수난을 당하시기 위함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를 시작으로 제자들의 눈은 점점 멀어지고 어두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출세를 위해 서로 다투기만 할 뿐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하는지, 어떻게 보아야 할지조차 망각하게 됩니다. 세 번째 예고를 마치자, 마지막에 가서는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때 예리코에서 바르티메오가 눈을 뜨고 예수님을 온전히 볼 수 있게 되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눈먼이를 단번에 고쳐주시지 않습니다. 점진적으로 시력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침을 바르시고 눈에 손을 대었는데 그때는 그가 완전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손을 얹어서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한번에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다가 오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언제 처음으로 예수님을 보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처음에 보았던 예수님보다 지금 보고 있는 예수님이 훨씬 더 어떻습니까??? 지금 보는 예수님은 훨씬 더 잘생기고 키도크고 지혜롭고 자비롭고 아끼고 사랑하고 자비롭고 용감한 분이실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벳사이다의 눈먼이가 눈을 뜨게 된 것은 세상의 눈먼이들이 예수님을 처음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를 생각하며 지금은 예수님을 얼마나 잘 보고 있는지를 성찰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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