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연중마지막주일이자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에서는 예수님의 호칭 셋을 소개합니다. 사람의아들/ 그리스도/ 임금(왕) 입니다.
1. 첫 번째 호칭, 사람의 아들은 누구일까요??? 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에서 “사람의 아들”에 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과 그날에 관해서는 네 복음서에서 말하는 관련된 기사를 모두 참조해 볼 수 있겠는데, 특히 마태오복음 24장에서는 조금 더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태오에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의 재림”이라 하고, 마르코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이라며 그날에 관하여 가르쳐주십니다. 마태오와 마르코에서 사람의 아들의 재림에 관하여 말씀하신 이유는 먼저 예수님께서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자 제자들이 그렇다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게 되느냐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성전파괴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요한2,20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허물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의 날/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또는 사람의 아들의 재림은 성전파괴처럼 먼저 당신의 몸이 허물어지는 때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허물어지는 날부터 다시 일어나는 날까지입니다. 허물어지는 고통에서 다시 일어나는 기쁨까지 사흘이면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즉 허물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그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태초의 한 사람으로 창조되었던 아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창세기 이야기는 본디 한 사람에서 두 사람이 되었고 두 사람은 곧 한 사람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한 사람을 떠나 바깥으로 나갔던 사람이 다시 안으로 모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서 분리되었던 사람이 이제는 눈에 보이는 바깥세상이 아니라 사람 속을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본문에서 아담과 하와가 첫아들, 사람의 아들/자녀를 낳았는데 본문에서는 빛을 낳았다고 표현했습니다. 빛은 곧 사람을 알아보는 눈동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중에서 유일하게 빛이 나는 곳이 눈동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태초에 이 눈동자를 떳을 때와 마찬가지로 두 눈을 감게 될 때가 바로 사람의 아들의 날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눈동자 안을 어떻게 들여다 봅니까??? 눈동자 안을 들여다 보려면 눈을 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루카17,24) 하고 말씀하신 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 나아가 이날에 관해서 사도바오로는 1코린토 15장에서 순식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 소리에 그리될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을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순간을 마태오복음에서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마태24,32)고 하십니다. 무화과나무는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은 다음 여름이 오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꽃을 피우지 않고 드러나지 않게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내적 성화의 은총의 또다른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메시아)/ 임금(왕)이라는 호칭을 두고 굳이 당신을 일컬어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그러한 자기 성화의 은총에 참여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태초에 부여받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은총의 이름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하루의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하여 잠들때에 아주 작은 것, 우리가 숨쉬는 것에서부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우리가 눈을 감고 내 속의 사람의 아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내면의 은총이 가득한 시간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두 번째 호칭 그리스도(메시아)는 누구일까요??? 오늘 제2독서 묵시록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십니다... 알파요 오메가... 아멘 자체이신분...”
3. 세 번째 호칭 임금(왕)은 누구일까요??? 임금(왕)이란 호칭은 지난 주간 복음 미나의 비유(루카19,11-28)를 통해서 좀 더 깊이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미나의 비유에서는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서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임금의 모습은 임금이란 얼마나 많은 권력을, 얼마나 많은 재력을, 얼마나 많은 지력을 갖추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개방하고 소통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나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가진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의 원리를 연상케합니다. 돈이 돈을 벌고 많이 벌어들이는 사람이 칭찬받는 세상이 바로 자본주의의 원리로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의 원리는 자본주의 개념을 초월하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액수가 아니라 우리의 무익한 노력이 기쁨으로 환산되는 원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루카복음 미나의 비유에서는 누가 얼마를 더 벌어들였냐가 관건이 아닙니다. 누가 몇 배의 소득을 내었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방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시험하는 비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숫자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이 소통하고 자기를 개방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통하고 개방하는 능력을 잘 발휘하는 사람이 먼 고장으로 떠나서 왕권을 받아왔던 어떤 귀족이었다고 미나의 비유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귀족이라는 명칭에서도 드러나는데, 귀족-“에우게네스”는 너그러운/개방적인/관대한 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왕이 되고 임금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귀족은 먼 고장으로 떠나기 전에 종들을 불러 각자 한 미나씩을 나누어 주며 자기 종들에게 “벌이를 하여라”하고 일렀습니다. 여기서 “벌이를 하여라”라는 단어 또한 속 뜻이 있는 말입니다. “벌이를 하여라-프라그마테워마이”는 장사를 하라는 의미라기 보다 갈고다듬다/아름답게꾸미다/시작하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그들이 위임받은 미나를 보자기에 싸서 장롱속에 넣어두는 것이 아니라, 미나를 갈고 다듬어서 아름답게 꾸미기를 시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이 개방하고 잘 소통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또는 열미나를 벌어들였던 종은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몸과 마음과 생각 열가지를 개방하여 소통했던 것입니다. 다섯 미나를 벌어들인 종은 다섯가지를 개방하여 소통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악한 종은 위임받은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다고 했습니다. 미나를 소중하게 간수하였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악한 종은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인은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간다며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일을 시키면 어떤 사람은 잘 못한다고 하면서 막상 시작하면 아주 잘해서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나를 갈고 다듬어서 아름답게 꾸미기를 시작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잘 한다고 해서 시작해 놓고 하다 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을 공동체가 도와주지 않아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불평합니다. 개방하지 않고 감추고 혼자 간직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극적인 사람을 겸손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소심하게 자신을 낮추기만 한 사람을 당신 제자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주인의 뜻대로 모든 일과를 다 끝내고 집에 돌아가면 식탁봉사를 하면서도 자신은 해야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며 자기를 낮추는 이가 바로 겸손한 사람일 것입니다. 잠언31,19에서 "한 손으로 물레질하고 다른 손으로 실을 잣는다"고 했습니다. 일을 많이 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과 소통하고 친밀한 이를 드러높이려는 것입니다. 소통할 때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 기쁨의 소출도 달라질 것입니다.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는 이번 주간을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100% 활용하여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연중 마지막 주간동안에 예수님 안에서 왕이며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겸손함을 토대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고 기쁜 대림시기를 맞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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