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한다"라고 하시면서 “하느님 사랑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왜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일까요??? 어찌하여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일까요??? 이와 관련해서 오늘 복음 본문의 범위를 좀 더 확장해서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렇습니다.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습니다.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렸는데 바리사이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들이 모일만한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에 모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사이들이 모였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렸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리사이들은 받아들일 만한 내용이지만 사두가이들에게는 듣기가 거북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렸던 내용을 그들은 예수님께 확인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오늘 복음 바로 이전에 나오는 부활에 관한 사두가이들과의 논쟁입니다.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바리사이들은 부활신앙을 믿고있었습니다. 사두가이들의 주장은 만약에 부활이 있다면 부활때에 그들의 일곱 형제 가운데 그 맏이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두가이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따지고 보면 하느님 사랑보다 자기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사두가이들의 그러한 이기적인 면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현세주의이고, 속세주의입니다. 내세의 삶인 하늘나라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자기를 사랑하는 일보다 더 쉬운 일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두가이들의 자기 사랑이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의미는 아닐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자기에 해당하는 범위는 자기형제, 자기가족, 자기고향, 자기가문, 자기계레에게 까지 넓어지고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현세의 삶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있을 때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자기 혈육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사두가이들에게는 현세에서 자기 혈통으로서의 자녀가 되는 것이 중요한 반면 예수님은 내세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현세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두가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예를 들어봅시다. 그 좋은 예로 오늘 제1독서 룻기를 들 수 있습니다. 룻기에는 한 가족이 등장하는데 모두 여섯명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우선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름이 소개되는데 엘리멜렉, 마흘론, 킬욘이고 그리고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두 며느리 룻과 오르파입니다. 먼저 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엘리멜렉의 이름에는 “내 하느님이 다스리신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아들의 이름 마흘론과 킬욘이 있는데 마흘론은 “쇠약한” 그리고 킬욘은 “폐결핵”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어머니 “나오미는 “내 감미로움이여”, 룻은 “내 친밀한 벗”, 오르파는 “뒤 돌아섬//등돌림”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룻기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 중에서 룻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보아라 네 동서 오르파는 제 겨레와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 그러자 룻이 말하였습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례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즉 룻은 그들이 한 가족으로 지내는 동안 그들의 친밀한 벗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룻과 비슷한 또 다른 이방인 여인이 등장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알려주는 예수님의 족보에 의하면 네명의 이방인 여인이 등장하는데 타마르, 라합, 룻, 밧세바입니다. 여기서 라합과 룻은 족보상에서 곧장 연결되어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혈통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유다의 자손이라는 말입니까??? 아닙니까??? 유다의 혈통이 될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또는 다윗의 자손이 될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그 전에 타마르도 이방인 여인이었고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도 이방인이었으니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룻은 라합과 떨어져있지 않고 족보상에서 직접연결 되었습니다. 룻의 이야기 또한 자연스럽게 라합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라합과 룻은 이방인이지만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데에 도움을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요르단강을 중심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리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로 연결해 주는 안내자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듯이 요르단강을 건널 수 있게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라합이라는 명칭은 – 바다 괴물을 의미하는 “레비아탄”이라고 합니다. 또는 “용-드레곤”을 의미하기도 하고, 혹은 “날으는 불뱀-세라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라합은 물의 신인데 붉은 물의 신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물이 감돌고 있었다고 할 때에 감도는 물, 소용돌이치며 혼동스러운 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이후에 이 라합이라는 명칭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에 밟고 지나갔던 홍해를 떠올려주게 됩니다. 홍해를 밟고 건너갈 때를 떠올린다면 라합이 이스라엘의 족보에 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마른땅을 밟고 홍해를 건넜갔음을 떠올리며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라합을 죽은 몸뚱이처럼 짓밟으시고 당신의 그 힘찬 팔로 당신 원수들을 흩으셨습니다.”(시편89,11) 또한 그 이후에 여호수아기 2장에서 요르단 강을 밟고 건너기 위해서 예리코에 정탐꾼들을 보낼때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라합에게 구원의 표징으로 진홍색 실로 짠 줄을 주면서 창문에다가 매달아 놓으라고 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요르단 강을 건너 예리코성을 함락할 때에 그 진홍색 줄을 매달아 놓은 창문을 보고 그 집에 모여있는 라합의 사람들은 모두 구원해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라합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현세의 삶에 안주하지 않았고 하늘나라의 삶을 갈망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듯이 이방인 여인들은 자기겨례를 버리면서까지 떠돌이 부랑민이었던 베두인족을 그리고 이집트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을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방인 여인들을 통해서 우리는 현세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누구인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룻이라는 이름에서 알려주듯이 진정한 하느님의 벗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현세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내세의 삶도 충실히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말고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했던 대표적인 히브리 여인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인간적인 관계를 끊어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했던 또 한 인물이 있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그는 바로 모세의 어머니일 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이방인을 따르면서도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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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한분이신 하느님을 일편단심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계명이 하나의 계명이 아니라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신 의미를 잘 살펴볼 수 있는 하루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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